[4.19혁명] 충주의 학생들이 떨쳐 일어난 그날의 함성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16/04/19 [13:11]

[4.19혁명] 충주의 학생들이 떨쳐 일어난 그날의 함성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16/04/19 [13:11]
충주 4.19학생 혁명 시위는 2월 28일 대구와 3월 8일 대전에 이어 전국 3번째 학생 혁명 시위로서 충주고등학교를 비롯한 충주여고, 충주농고(현 국원고) 등 학생들이 총궐기 하여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며 순수한 비폭력적 사건으로 4.19혁명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었다.
자유당 정권은 독재를 이어 가고자 부정선거를 획책하고 시위가 일어날 만한 것들을 원천 봉쇄하였다. 이에 동아일보나 신동아 등 신문을 읽고 깨어있는 학생층에서는 울분을 참지 못하고 마분지에 직접 글을 써 시내 담벼락이나 전봇대 등에 붙이고 길가는 행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충주고등학교 장구환, 유석우, 박종환 등과 충주여고 이정자 학생을 비롯한 몇몇 학생들이 현실 정치에 분개하고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고 벌린 일이다.
그러던 중 3월 9일 충주 제2로터리에서 민주당 장면 후보와 박순천 여사의 연설이 있었는데 학생들이 이 연설을 들으러 갔다가 경찰에 의해 제지당하고 쫓겨나는 수모를 당했다.
다음날 아침 장면 후보와 박순천 여사가 떠나는 길가에는 학생, 시민 등이 길에 나와 박수를 치고 환호했다. 이 때는 한참 선거가 막바지에 이르고 있을 때라 학생 시민들의 반응은 자유당을 초조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에 다급했던지 자유당 측에서는 충주고등학교에 당시 민의원(현 국회의원)인 H씨를 충주고등학교에 파견하여 강연을 하여 학생들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이무렵 충주고등학교는 3월 10일이 토요일이면서 기말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당시의 학교 편제는 4월부터 새 학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이때는 새로 입학한 신입생은 없었고 4월 1일이면 한 학년씩 올라갈 1, 2학년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학생들이 학교에 등교하자 교무실에서는 기말고사를 연기하고 H의원의 강연이 있을 예정이니 강당으로 모이라는 연락이 왔다.
“학생들은 무엇인가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고 학생회장 윤한상씨, 대대장 이규열씨, 규율부 이상건씨 등 학생회 간부들이 모여 이 강연이 학생들을 정치적으로 족쇄를 채우려하고 학생들의 활동을 묶어 놓으려 하거나 이것이 정치적 문제로 비화되면 떨쳐 일어나 시위를 하자는 모의를 하고 강당으로 들어갔다. H의원의 강연이 시작되고 점차 강연이 정치 문제로 비화되자 “집어치워라!”, “나가자!” 하는 선창에 따라 물밀듯이 밖으로 나와 스크럼을 짜고 시내로 돌진하기 시작했다.
“학원의 자유를 달라!”, “독재를 타도하자!” 등의 구호를 외치며 충주고등학교(현 여고자리) 정문에서 일직선으로 용산동을 가로 질러 나아가던 학생들은 구 연초제조창(현 영진아파트 옆 세중 참사랑 아파트)을 지나 경회루(도로 끝에서 교차로 다방 쪽으로 꺾여 지는 곳에 있었음)까지 다다랐을 때 경찰의 진압으로 다시 되돌아가 남산초등학교 뒤 하천 둑을 따라 다시 진군하기 시작했다.
하천 길을 지나 큰 도로에 구 완행버스 주차장(현 CCS충북방송자리에서 제2로터리 쪽으로 50m 부근)을 거쳐 제1로터리까지 다다랐을 때 제2로터리에서 경찰의 진압이 대대적으로 강행되었다.
경찰의 진압에 분산된 학생 시위대는 뿔뿔이 흩어졌지만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이어갔다. 일부 시위대는 충인동 상가와 노점상들이 있는 곳을 지나 충주농고 앞까지 진군했다.
당시 3월 10일은 충주 장날로 노점상들이 많이 나와 있었는데 경찰에 쫓긴 학생들이 급히 뛰는 바람에 노점상들이 펼쳐놓은 각종 씨앗 등 상품들을 밟고 지나자 씨앗과 상품들이 밟히고 흩어져 못쓰게 되는 것이 많았는데도 상인들은 불평한마디 없이 학생들을 오히려 도와주려했다는 것이다. 그만큼 자유당 독재 정권에 대한 불만은 시민들에게도 큰 불만으로 다가와 있었던 것이다.
뿔뿔이 흩어진 학생들은 저녁에 제2로터리에서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였으나 제2로터리는 이미 경찰에 의해 봉쇄되어 다시 대수정 다리에서 만나기로 하였으나 이 역시 봉쇄되었다.
할 수 없이 학생들은 사직산에 집결하기로 했다. 사직산에 집결한 학생들은 사직산에서 시내쪽으로 진군하면서 시위를 계속했다.
이때는 충주여고와 충주농고도 합세 했다. 저녁부터 어두운 밤까지 시위는 계속 됐고, 많은 학생들이 경찰에 연행돼 고초를 겪었다.
또한, 장구환씨는 이때 고문까지 당했다 한다. 충주의 학생 시위는 그렇게 전개됐으나 이때부터 충주 학생들은 경찰의 심한 감시를 받게 된 것이다.
 
◇ 충주 4.19기념탑을 세우게 된 동기

이러한 찬란한 역사적 사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충주 3.10학생 시위는 세인들의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갔다.
그러나 2000년도 충주고등학교 60년사가 발간되면서 충주학생시위가 수면위로 떠올랐고 정부에서도 이를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당시 학생회장이던 윤한상씨가 국민 훈장을 받게 된다.
또한 충주신문은 그동안 지속적으로 발행인칼럼, 사설 등을 통해 이를 보도해 왔었다. 충주의 정신이 살아 있는 역사적 사건을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다.
그러한 일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청주에서 김현수(전 청주시장)씨를 비롯한 청주 4.19학생시위 주모자들이 충북 4.19학생 기념탑을 세우게 되는데 충주학생시위는 싹 빠지고 청주학생시위만 탑에 기록하는 우를 범하게 된다.
이에 충북일보 조혁연 기자가 이를 바로 잡고 충주 학생 시위가 충북 최초라는 기사를 써 이것이 빌미가 되어 충주에서는 도에 강력히 항의하고 문구를 고쳐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청주 쪽 추진위원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단지 충주에서도 학생시위가 있었다는 것만 탑의 문구에 기록한 것이다.
이에 충주 대화합위원회에서는 충청북도에 강력 항의하는 것을 비롯 탑을 건립하자는 안이 거론되었으나 이후 충주시장이 바뀜에 따라 대화합위원회가 해체되고 다시 탑 건립 추진위원회가 만들어져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충주4.19기념탑 추진위원회는 2015년 1월에 발족하여 그동안 많은 노력 끝에 관공서의 도움 없이 순수한 시민의 힘으로 탑을 건립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또한 2016년 3월 10일을 기해 작품 공모에 들어갔고 설명회까지 마쳤다. 이제 작품 선정과 제작을 거쳐 9월 또는 10월 정도에는 탑의 완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충주 4.19기념탑의 의미

충주 4.19기념탑은 다른 고장 기념탑과는 달리 순수한 시민들의 성금 모금으로 이루어진 의미 깊은 탑이다.
작게는 1만 원에서부터 많게는 몇 백만 원씩 성금을 모아 추진하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시간이 흘러 2015년 1월 추진위가 발족한 이래 지금까지 성금모금을 하고 3월 10일 공교롭게도 충주시위가 있던 날 충주인 작가들로 한정하여 공모를 실시하였다는 것이 무엇보다도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순수한 충주학생들의 기개와 정신이 살아있고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과 그동안 많이 잊혀졌던 충주의 정체성을 되살리게 했다는 역사적 의미가 크다고 보겠다. 이는 충주 미래를 이끌어 갈 학생들에게 중요한 귀감이 되고 정의 수호에 대한 충주의 정신을 일깨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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