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때 추리소설을 처음 읽게 된 나는 코난 도일이나 뤼팽보다 아가사 크리스티를 훨씬 좋아했다. 그녀의 독특한 문체와 귀족보다 서민들의 소소한 사건전개와 탐정으로 할머니가 등장하는 독자의 허를 찌르는 구성이 마음에 들었다. 이십여 년이 흐른 뒤 다시 만난 영국소설은 나를 추억에 잠기게 했다. 작가 엘리스 피터스는 본명이 에디스 파지터인데 처음 듣고 남자인 줄 알았다. 영국의 작은 시골 시로프셔 주에서 태어났는데 우리나라 지도와 비교하면 결코 작은 시골이 아니다. 이 시리즈를 읽고 시로프셔 여행이 버킷리스트 삼위 안에 들어갔을 정도로 매력적으로 묘사되어 나온다. 화학실 조교와 약조제사를 거쳐 제2차 세계대전에는 해군으로 참전했던 작가의 다양한 경험이 모두 소설 속에 녹아 있다. 주인공의 약초 처방과 독초를 이용한 범죄는 모두 작가의 지식과 경험에서 나온 살아있는 생생한 정보였다.
캐드펠시리즈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국의 역사를 알면 알수록 더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치가 곳곳에 숨어있다. 십자군 전쟁 전후이며 아직 왕권이 안정되지 않아서 반란이 자주 일어나던 영국은 결국 모드왕후와 스티븐 왕 사이의 왕위를 겨냥한 내란으로 이어져 한 마을의 이웃이 서로 칼을 겨누며 싸우게 된다. 마치 우리나라가 광복 후 남북이 서로 이념다툼을 하다가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와 흡사해 더욱 감정이입이 되었다. 주인공 캐드펠은 젊은 시절 십자군전쟁에 참여하고 수사가 되기 전 여성과의 사랑도 나누던 평범한 젊은이였는데 십자군전쟁을 겪으면서 신에게로 귀의하여 수사가 된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아마 수사가 되는 것은 매우 신성한 일이며 모범이 되어야만 하는데 속세의 물을 잔뜩 묻힌 이가 수사가 되어서 그런지 주인공을 바라보는 눈이 예사롭지는 않았다. 말년에 수도원에 들어와 수사가 된 캐드펠이 살인사건을 만나면서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들은 그의 이력을 사람들에게 종종 상기시키기도 한다. 캐드펠이 십자군 전쟁 참전시 사랑했던 여인이 낳은 아들이 나타나기도 하고 아들을 구하기 위해 수사의 길을 포기하고 구하러 나서기도 하는 캐드펠을 보면 참으로 인간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주인공 캐드펠에게 느끼는 감정은 언제나 상반된 두 가지였다. 캐드펠은 늘 따뜻한 시선으로 전쟁을 겪었음에도 인간에게 환멸을 갖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그대로 믿어주는 장점이 있다. 그가 살면서 터득해온 삶의 깊이와 지혜를 더해 사람들에게 옳은 길을 알려주기도 하고 때론 돌아가더라도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나이어린 관리와 허물없이 우정을 쌓으며 협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든 범인이 처벌받는 것은 아니며, 가끔 범인의 도주를 일부러 유도하기도 한다. 우리네 사고방식은 범인의 벌을 받아야 한다는 인식이 있는데 캐드펠은 꼭 그렇지도 않다고 하며 신이 벌을 주어 범인이 병에 걸려 일찍 죽거나 사고를 당해 불구가 되기도 한다. 때로는 너무 종교적인 사제가 교구의 목사로 와서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데 꼭 그래야만 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인간이니까 따뜻해야 한다고 하지만 신이 아니라 인간이니까 따뜻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하며 아쉬움이 남았던 나는 아직도 이런 부분에서 공감할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꼭 추리영역이라거나 종교이야기로 분류하고 싶지 않다. 이 책은 중세 영국의 역사와 수도사의 길을 보여주기도 하고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문화도 보여준다. 책의 첫 단락은 이야기 전개상 살짝 지루할 수도 있으니 그럴 때는 후딱 넘기고 다음 장부터 읽어도 좋다. 이 시리즈를 스무권으로 끝낼 생각이 아니었는데 작가가 죽음으로 시리즈가 끝이 났다. 난 오히려 그래서 더 깔끔하다고 느낀다. 마지막으로 매우 공감이 가는 이 책의 표지 뒷면에 있는 문장을 인용하고 싶다. ‘캐드펠 시리즈는 한권 한권이 각각 독립된 추리소설 시리즈입니다. 어떤 작품을 먼저 읽든 관계없습니다. 단 한권만 읽어도 재미있습니다. 하지만 한권을 읽고 나면 다음 책이 궁금해집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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