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를 구한 위대한 전적지의 위용을 되찾아야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18/07/05 [10:46]

나라를 구한 위대한 전적지의 위용을 되찾아야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18/07/05 [10:46]

▲ 이규홍 대표이사     ©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이후 속절없이 밀리기만 하던 국군이 최초로 승리한 곳은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에서 벌였던 일명 동락전투다.

 

동락전투는 충주에서 창설한 6사단이 춘천지구방어에 나서면서 한번도 패하지 않고 춘천 사수 명령을 끝까지 지켜내고 있었다. 그러나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고 국군이 속절없이 밀리자 자칫 고립될 것을 염려하여 남하하면서도 계속적으로 적을 방어하였다. 6사단은 충주 도착 후 2연대는 충주 방어 명령을 받고 7연대는 음성 방어 명령을 받는다. 음성 방어명령을 받은 7연대장 임부택은 1대대를 무극리 방어에 2대대를 진천 방어 명령을 내렸다가 다시 충주 신니면 동락리 부용산 방어 명령을 내리고 3대대를 생극으로 남하하는 적 15사단 48연대를 생극에서 공격하라고 명령한다. 3대대장 이남호는 부대를 이끌고 생극에 갔으나 3천이 넘는 부대를 1개 대대병력으로 공격할 수 없음을 알고 퇴각하기에 이른다. 퇴각한 3대대는 질책을 받고 다시 용원 앞에서 적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때 이미 적 48연대는 동락리로 진입하면서 동락주민에게서 국군은 다 도망갔다는 말을 들었고 학교를 지키던 김재옥 여교사에게서도 같은 대답을 들은 터라 안심하고 휴식을 취하였다. 이때 집에 잠깐 다녀오겠다고 적을 속이고 학교를 빠져나온 김재옥 여교사는 그길로 부용산으로 향하던 2대대장 김종수 소령에게 적의 상황을 상세히 알렸고 이 정보를 입수한 김종수 대대장은 신용관 8중대장(박격포 중대)에게 파악된 적의 위치를 향해 박격포를 설치하라 명령하였다. 박격포 설치를 끝낸 2대대는 정확한 박격포 공격으로 휴식을 취하던 적을 공략하여 사살 2186명, 포로 132명과 포 및 차량 등 적의 무기를 다량 탈취하는 큰 전과를 올린 것이다.

 

동락전투는 최초의 대규모전투를 승리로 이끌면서 국군에게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희망을 주었고 유엔군 파견으로 위기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게 된다. 그것은 이해 8월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의장국으로 등장한 소련의 방해로 유엔군 파견이 어려워지자 동락전투에서 노획한 무기들을 증거로 삼아 소련의 주장을 무색하게 하고 유엔군의 파견에 대한 당위성을 얻어 유엔이 한국 전쟁에 참여하여 낙동강 이남으로 밀려 쓰러져 가던 한국을 위기에서 구해낸 의미가 큰 전투인 것이다. 그러나 동락전투 전승지는 아직도 나라를 구한 위대한 전투라는 전적에 비해 초라하기 그지없다. 20억 원을 투입하여 몇 가지 볼거리는 만들어 놓았으나 국가를 살린 위대한 전투라는 역사적 사실을 담기에는 턱 없이 부족한 것이다.

 

최초의 승리를 담고 국군의 기상을 드높인 전투 그리고 유엔을 끌어들여 나라를 구한 전투의 전적지로서 박물관 하나 없는 것은 매우 안타까움을 더하는 것이다. 또한 국방부에 음성전투로 되어 있는 이름도 되찾고 화려한 전적지와 국가를 위기에서 구한 위대한 전적지의 위용을 되찾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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