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김영희 | 기사입력 2018/11/14 [07:45]

바람은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김영희 | 입력 : 2018/11/14 [07:45]

▲ 김영희 시인     ©

오늘은 일찍 나와 바람으로 먼저 세수를 한다. 그 많던 별들은 어디로 멀어진 걸까. 하늘에는 헤아릴 수 있을 정도의 별들이 졸고 있고, 갓 세수하고 나온듯한 샛별만 반짝인다. 밤마다 가을을 노래하던 귀뚜라미 소리도 그치고 툭 툭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 처렁처렁 울린다.

 

떨어져도 아쉽지 않을 다 익은 나뭇잎의 떨켜를 바람이 고른다. 생기가 조금 남은 빨간 단풍이 바람에 앉아 시소를 타다가, 날개를 단 듯 가분가분 떨어진다. 입동이 지난 새벽바람이지만 상쾌함이 느껴진다. 아직 가을의 물기가 남아서일까. 나무마다 또 한 해를 걸어온 고단한 단내가 난다. 오늘처럼 부드러운 바람만 분다면 자연에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게 될까.

 

온난화 때문인지 태풍의 위력은 점점 잦아지고 강력해진다. 태풍은 7월에서 10월까지 발생하여 힘들게 지어놓은 농작물을 한순간에 휩쓸고 가기도 한다. 눈은 내리면 깨끗한 풍경을 만든다. 비도 내리면 깨끗해진다. 그러나 바람이 성나면 아수라장이 된다. 그런 바람에 색깔이 있다면 얼마나 무서울까. 자연 바람은 아무리 강해도 서로 부딪히지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상대를 만나야 소리로 자신을 드러낸다. 이름은 바람이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것도 바라지 않지만 창자 없는 뱃속으로 세상을 삼킨다.

 

어릴 때 어머니는, 태풍이 불어오면 집도 집어가고 사람도 데려간다고 했다. 어머니는 늘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이야기했다. 독수리나 매가 머리 위 높은 데서 날고 있으면 나를 채 갈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어머니가 겁을 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이야기를 통해 매사 조심하기를 바랐다. 가끔 그런 바람이 불어올까 겁이 나기도 했지만 아직은 태풍을 만난일은 없다.

 

육풍은 바다로 향하여 불고 해풍은 육지로 향하여 교대로 분다고 한다. 지구는 속도위반하지 않고 스스로를 참 잘 다스린다. 파도는 밀물과 썰물을 만드는 기조력(달과 태양의 중력이 지구의 바닷물을 끌어당기는 힘)도 조석파라는 파도를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파도는 대부분 바람에 의해 일어난다. 바다는 바람을 통해 파도로 숨 쉬는 것 같다. 바람을 통해 바다는 뛰고 소리치고 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바람은 그리하여 세상 모든 것에 이른다. 바람은 애초부터 비움의 철학을 타고 난 걸까. 어디든 인연이 닿을 때면 자신의 소리가 아닌 상대의 소리를 들어준다. 그러한 바람도 알게 모르게 숱하게 상처를 내고 달아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그래서 바람은 가끔 허공을 거닐다가 쓸쓸하고 또 쓸쓸한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는 걸까.

 

바람이 가만히 가을 소리를 낸다. 마른 잎 밟는 소리도 내고 감 떨어지는 소리도 낸다. 모두가 겨울 채비에 야물어지는 시간이다. 그러나 바람이 바람은 들지 말라고 타이른다. 바람 든 무처럼 될까 염려가 되는 모양이다.

 

어느덧 잊혀져가는 어린 날의 풍경이 바람 속에 되살아난다. 매년 가을이 되면 문짝을 떼어 놓고 꽃과 꽃잎을 넣어 창호지를 바르던 날들이다. 새로 바른 새하얀 창호지가 마르면서 팽팽하게 당겨진다. 그날 밤 풀냄새 풀풀 나는 문으로 달빛이 들면 잠을 설치곤 했다. 바람이 불면 문풍지는 방에서 들은 이야기를 밤새워 바람에게 들려주었다. 바람으로 세수하고 나와 샛별이 질 때까지 바람을 쐬고 들어와 내 안의 바람을 뺀다. 보려고 해도 보이지 않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바람이지만, 한 번 마음먹으면 세상을 크게 움직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바람 몰이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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