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타까움 속 기억으로 되살려야 할 대몽항쟁 추모제 및 위령제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20/10/13 [10:24]

안타까움 속 기억으로 되살려야 할 대몽항쟁 추모제 및 위령제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20/10/13 [10:24]

그동안 충주신문에서 봉행해오던 김윤후 장군 추모제 및 대몽항쟁 용사 위령제가 코로나 19 방역문제로 취소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안타깝지만 전 세계적 재난 상황인 코로나19의 조기 종식을 위해서는 충주시 시책에 따르는 것이 타당하다는 생각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충주 역사 중 충주인의 강인한 정신과 한마음으로 뭉쳐서 70여 일간의 사투 끝에 대몽항쟁을 승리로 이끈 자랑스런 역사를 지나쳐 보낼 수가 없어 다시 한 번 상기하는 마음으로 대몽항쟁의 역사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편집자 주>

 

◇ 강인한 정신 대몽항쟁

 

고려 고종 18년(1231년)몽고의 1차 침입이 있기 전 몽고에 쫓긴 거란족이 대요수국이라 자처하고 고려에 쳐들어왔다. 거란 병이 황해도 재령과 또한 무리가 철원, 춘천을 거쳐 원주를 점령하고 제천까지 밀려오게 되자 중군병마사 최원세와 전군병마사 김취려가 박달현에서 크게 이겼다.

 

이들은 대관령을 넘어 여진땅으로 도망쳐 강동성에 의거하였으나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에 의해 토벌되었는데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고려의 은인이라 자처하고 공물을 요구하게 되자 고려조정과 작은 마찰이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러던 중 몽고사신으로 온 저고여가 귀국도중 국경지대에서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져 몽고는 이를 빌미로 고려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몽고와의 전쟁은 30년에 거친 긴 싸움이었는데 이중 충주와의 전투는 눈 여겨볼만한 항쟁기록으로 남아있게 된다.

 

몽고의 제1차 침입은 고종 18년(1231년) 살례타이를 대장으로 하여 침입을 하게 되는데 이때 몽고의 첨병부대가 충주에 이르고 있다는 보고를 받자 충주에서 부사 우종주는 양반별초를 이끌고 판관 유홍익은 노군잡류별초를 이끌고 대항하기로 하였으나 몽고군인들이 닥치자 우종주와 유홍익 그리고 양반별초들은 다 도망가고 노군에 속해있던 지광수의 지휘아래 힘든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노군 잡류 별초가 몽고군을 물리치고 난 후 도망갔던 우종주가 돌아와 적이 약탈해간 물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노군에게 책임 추궁을 하자 노군들의 대대적인 반란이 일어나게 된 것이다. 두 번째 충주의 대몽항쟁은 금당협 전투다. 김윤후의 대대적인 대몽항쟁이 있기 전 9월 충주의 창정 최수가 금당협에 매복하고 있다가 몽고군 15급을 베고 몽고에 포로가 된 남녀 200인과 병장기를 빼앗았다. 창정 최수는 이전과로 인해 대정에 제수가 되었다.

 

◇ 김윤후 충주산성 방어전

 

충주의 세 번째 대몽항쟁은 가장 치열했고 대대적인 전투가 되었다.

 

당시 충주산성 방호별감인 김윤후는 백현원의 승려로 있었으나 몽고군이 쳐들어오자 용인 처인성으로 나와 처인부곡 주민들과 관군이 함게 모여 살레타이아 군을 맞아 싸우게 된다.(1232년)

 

김윤후는 이 싸움에서 살례타이를 활로 쏴 죽임으로서 사령관을 잃은 몽고군을 격퇴시킨 처인성의 영웅이다.

 

김윤후 장군은 이 공로로 고려 정부에서 상장군을 제수하였으나 이를 사양하고 백현원 승려로 되돌아갔다.

 

이후 고려의 몽고침입이 계속되자 김윤후는 다시 밖으로 나와 섭랑장 벼슬을 받고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산성을 지키게 된 것이다.

 

이때 몽고군의 제 5차 침입(1253년)으로 사령관은 야굴이라는 사람으로서 몽고황제의 아저씨 벌되는 사람이다.

 

야굴은 충주산성을 치기 전 지금의 양평인 양근성(윤춘)과 지금의 노은 보련산성인 천룡산성(조방언) 등을 점령하고 이들 방호별감의 항복을 받아 이들을 이끌고 충주산성을 에워싸 항복을 종용하였다.

 

이들 사이에는 고려를 배신하고 앞장서서 항복을 종용한 이현과 홍복원 등도 끼어 있었다. 고종 40년(1253년) 10월부터 시작된 충주산성 전투는 무려 70여일을 계속 하였다.

 

산성안에서는 군사의 수도 적은데다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고 점차 병사들이 사기를 잃어가자 김윤후는 노비문서를 가져오게 해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불태우고 지금부터 신분에 관계없이 열심히 싸워 공을 세운 사람에게 벼슬도 내리고 상도 줄 것이라고 하며 병사들의 사기를 돋우었다.

 

또한 몽고군으로부터 노획한 우마도 나누어 주었다.

 

김윤후는 절망 속에서도 기지를 발휘하여 병사들의 사기를 끌어올리고 끝내 승리의 길로 나아간 것이다.

 

계속된 싸움에도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전투가 지지부진하자 몽고군 내부에서는 야굴과 황족 탑 자아간에 갈등이 불거지고 결국 야굴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이 전투는 홍복원과 아모간이 남아 좀 더 전투를 하였으나 끝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자신들이 불리하자 철수한 것이다.

 

고려사 김윤후전에는 야굴이 병이 들어 철수한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실제로는 황족 탑자아와의 갈등으로 인해 소환된 것으로 알려졌다.

 

충주는 이 전투의 승리로 인해 지명이 국원경으로 승격했고 김윤후는 갑문위상장군으로 승진했으며 병사들도 군공에 따라 관작이 제수되었다.

 

이 전투로 인해 김윤후 장군의 뛰어난 지도력 살펴보면 그는 피지배 민중들에게 잠재해 있는 항전력을 불러 일으켜 실질적인 전투력으로 승화시켰다는 점이다.

 

또한 1253년 대몽항쟁 충주 방어전은 민중의 항전력과 훌륭한 지도력이 잘 결합되고 모든 사람들이 성을 지키기 위해 단합한 결과인 것이다.

 

◇ 충주민의 네 번째 대몽항쟁

 

다인철소에 대해 동국여지승람에서는 충주 서쪽 30리 지점이라 했고 여지도서에서는 충주목 이안면 이라고 전했다.

 

고려사 지리지 충주목에서는 고종 42년(1254년) 다인 철소사람들이 몽고군을 막은 공이 있어 소를 올려 익인현으로 승격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서 몽고 1차 침입의 최대 격전지로 끝까지 막아냈던 귀주를 정원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것과 처인성 싸움에서 처인부곡을 현으로 승격시킨 것 그리고 충주산성 싸움에서 큰 승리로 인해 충주가 국원경으로 승격되었던 것과 다인철소민의 대몽전투에서 승리하여 소를 익안현으로 승격시킨 것 등 승전으로 인해 지역행정 단위를 승격시킨 4곳에 중 충주가 2곳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때에도 철은 무기제작에 매우 유용한 광물로 전쟁 시에는 누구나 탐을 내는 곳으로 몽고군도 다인 철소를 손에 넣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그러나 다인 철소민 전투는 순수한 지방민들에 의해 자체방어에 입각한 민중항전의 대표적 사례가 되고 있다.

 

◇ 충주민의 다섯 번째 대몽항쟁

 

다인 철소에서 철소민들의 항전으로 물러났던 몽고군은 충주를 거쳐 경상도로 남하하고자 하는데 고종 41년 9월 14일자 고려사에는 차라대가 충주산성을 공격하는데 갑자기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 쳤다. 성안 사람들이 정예를 뽑아 맹렬히 반격하자 차라대가 포위를 풀고 남으로 내려갔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이때의 충주산성은 월악산성 인듯하다.

 

◇ 충주민의 여섯 번째 대몽항쟁

 

고종 4년(1255년) 몽고병이 대원령(지금의 하늘재)을 넘으므로 충주에서 정예병을 파견 1천여명을 격살하였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어 또 다시 대규모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보여주고 있다.

 

◇ 충주민의 일곱 번째 대몽항쟁

 

충주성전투(1256년)로 충주 병사들이 월악산에 입보한 상태에서 취약했던 충주성을 도륙했다는 것을 고려사에 전하고 있다. 이때 계속된 전투의 패배로 보복감정이 앞선 몽고군은 충주성을 처참히 도륙한 것이다.

 

◇ 충주민의 여덟 번째 대몽항쟁

 

월상산성의전투로 충주성을 공략 주민들을 도륙한 몽고군을 월악산성에 입보해 있는 충주민을 공격했다. 이때에도 고려사에서는 산성을 공격하는데 관리와 노약자가 두려워 항거를 못하고 있는데 홀연 운무가 자욱하고 비바람과 우뢰가 함께 몰아쳐 몽고군은 신이 돕고 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멈추고 돌아갔다는 기록을 전하고 있다.

 

◇ 충주민의 아홉 번째 대몽항쟁

 

1258년 10월 일어난 박달현 전투이다. 고려사에는 충주의 별초가 박달현에 숨어 있다가 철수 중인 몽고병을 공격하여 포로가 된 사람들과 우마 및 무기를 빼앗았다는 기록이다. 대몽전투는 약 30년간 이어지면서 11회의 침략을 한 상태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전투가 충주의 대몽항쟁이다.

 

충주는 70여일 간 항전한 김윤후 장군의 충주산성전투와 다인 철소민 전투를 비롯한 총 9번의 몽고 침략 중 충주성전투를 제외한 여덟 번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전과를 기록한 것이다.

 

몽고는 동북아시아, 동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지까지 석권하면서 세계를 제패한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이다.

 

이들이 세계를 제패하는 동안 밀고 밀리는 격전지는 있었지만 완벽하게 크게 패한 것은 고려 충주와 베트남 1~3차 침입 시 모두 패한 기록 그리고 이집트의 아인잘루트 전투의 패배 등 3가지다.

 

이중 아인 잘루트 전투는 몽고의 대칸 몽케의 죽음으로 훌라구의 주력부대가 동쪽으로 이동한 상태에서 시리아 지대 병력과 소수 동맹군들만 남아있는 것을 이집트 맘투크 왕조의 쿠투즈가 격파한 것이라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면 직접적인 싸움의 승리는 고려 충주와 베트남에서의 승리이다.

 

베트남 전쟁은 1차 침입 시 실권자 쩐투도의 기후를 활용한 지구전, 과식량 전소 작전으로 풍토병에 시달린 몽고 쿠빌라이 군대를 격파해고 2차전은 쩐흥다오 장군의 유격전술과 식량 차단 게릴라전으로 병참선마비 등으로 승리하였고 3차전은 썰물 때 강바닥에 수 많은 쇠말둑을 박아두고 밀물 때 적을 유인하여 시간을 벌며 최선을 다해 항전하다 다시 썰물 시각이 되자 적의 배가 쇠말뚝에 걸쳐 옴짝달싹 못하게 된 것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이끌어 낸 것이다.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끈 베트남의 쩐흥다오 장군은 우리나라의 이순신 장군 만큼 추앙받는 장군이 되어있다.

 

◇ 김윤후 장군의 기록은 왜 부실한가?

 

김윤후 장군의 충주산성 싸움은 약 30년 대몽항쟁 중에서도 단연 빛나는 전공이고 이 기록은 현저히 남아 있어야 하는데 지금까지 남겨진 자료에는 김윤후 장군의 기록은 매우 빈곤하기 짝이 없다. 세계적으로 대몽전쟁에서 승리한곳이 몇 안 되는 상황에서 그의 전과 기록은 매우 현란하게 빛나야 하질 않겠는가?

 

이에 대해 윤용혁 공주대 교수는 그 자료들이 적은 것은 대몽항쟁 이후 고려가 몽고의 간섭하에 놓이면서 대몽항쟁 자료들이 의도적으로 지워지고 인멸될 수밖에 없었던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그러나 지워진 역사 역사를 가능한 한 복원하고 또한 이를 오늘의 정신적 지주로 또는 자산으로 삼는 것이 700여년전 위대한 항전의 승리를 빛나게 하는 우리의 몫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충주 항전에 관련한 유적의 조사연구와 주요지대 발굴 조사 그리고 현지 종합 조사가 요구되는 것이다.

 

◇ 대몽항쟁 격전지 충주산성은 어디인가?

 

그동안 대몽항쟁의 격전지였던 충주산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논란은 대림산성으로 압축되기 시작했다. 그동안 “충주산성이 남산성일 것이다. 월악산성 일 것이다”라는 설들이 있다.

 

이에 대해 최규성 전 상명대 교수는 “남산성은 남산 정상에 구축된 둘레 1120m의 성으로서 다수 인원이 70일 동안 버틸만한 장소로서는 성이 협소한데다 물이 절대 부족하여 장기간 투쟁하기에는 적절치 못하고 성 자체도 고려시대 특성을 지닌 성으로 보기 어렵고 고려 이전에 활용 되었던 성으로 볼 수밖에 없어 충주산성으로 비정하기에는 적당치 않다”라고 했고, “월악산성은 명산으로써 산제를 지내던 곳으로 위급한 상황에 처하자 충주의 부로들이 월악산 신령께 구원을 기원했던 곳으로 충주읍성과의 거리도 멀고 충주산성으로 비정하기 어렵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대림산성은 충주읍성의 남쪽을 방어하는 위치에 있으며 삼남으로 내려가는 길목인데다 계립령을 넘어 송계계곡을 지나면 대림산성으로 진입하게 되고 이화령이나 조령을 넘어도 대림산성으로 진입하게 된다는 지리적 관계가 존재하고 지표 조사시 고려 유물이 가장 많이 나왔고 고려시대 건물지가 도처에서 확인됨은 물론 동국여지승람의 충주 목조에서 대림산이 충주의 진산이라고 밝히고 있다는 점. 또한 대림산성은 충주에서 4㎞ 이내에 있고 남산성과는 남북으로 견치와 같은 위치에 있는데다 깎아지는 절벽을 끼고 주위 4㎞가 넘는 4906m의 방대한 규모의 성이 둘러쳐 있으며 치성, 망루, 장대 등 대규모시설을 구비하여 축성됨으로서 충주읍성이 위험에 처하는 경우 대피하여 적의 침입을 막아내는 역할을 하기에 충분하고 수천의 병력과 우마를 먹이기에 충분한 수원을 확보하고 공간 또한 넓게 자리하고 있다. 다수의 인마가 장기가 체류할 수 있는 입지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

 

최규성 상명대 교수는 1997년 대림산성 지표조사를 진행하여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충주시가 그 후 충주의 가장 빛나는 전투인 대몽항쟁 충주산성 전투에 등한시해 발굴조사를 정확히 실시하지 않아 이를 확정 짓지 못하고 충주의 빛나는 유산을 방치한 채로 시간만 보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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