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평가된 충주학생의거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 나서야

이규홍 대표이사 | 기사입력 2021/03/05 [15:39]

저평가된 충주학생의거 올바른 평가를 받기 위해 나서야

이규홍 대표이사 | 입력 : 2021/03/05 [15:39]

  

3월 10일은 충주학생들이 자유당 정권의 불의에 항거하여 대대적인 대정부 시위가 있었던 날이다.

 

이날 시위로 충주시는 충주의 정신적 기개를 높였음은 물론 충주시민들의 자긍심을 높이는데도 크게 한몫을 했다는 평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충주시나 충주시민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모르고 있는 점이 안타깝다. 또한 전국적으로 세 번째의 시위였던 충주학생의거가 저평가되고 있는 점이 이를 반증하고 있다.

 

2016년 충주 4.19학생혁명기념탑이 세워지고 5년이 흐른 지금 충주 학생의거를 다시 한번 점검한다. <편집자주>

 

- 충주 4.19 학생 혁명의 전모

 

1954년 11월 이승만 대통령의 3선 개헌을 목적으로 한 편법인 사사오입 개헌이 이루어지고 이후 1956년 대통령선거에서 신익희 후보가 갑자기 서거하고 나자 부통령 선거에서 불안감을 느낀 자유당에서 불법을 저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주당의 장면 후보는 4,012,654표로 3,805,502표를 얻은 자유당의 이기붕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기에 이른다.

 

이에 자유당은 차기 선거에서 기필코 승리하기 위해 갖가지 편법을 쓰기 시작하는데 1960년 제4대 대통령선거에서도 당시 이승만 후보와 대결할 민주당의 조병옥 후보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사고가 일어났고 부통령 후보로는 1956년 때와 마찬가지로 이기붕과 장면의 맞대결로 치러지게 된다. 이에 불안감을 느낀 자유당 정권은 또다시 부통령 선거의 패배를 재현하지 않기 위한 갖가지 불법과 편법을 동원하기에 이른다.

 

충주시 4.19기념탑추진위원이었던 최근배 위원의 기록에 의하면 자유당 정권은 야당의 탄압을 강화하기 위하여 1958년 야당(민주당) 국회의원을 감금시키고 국회에 무장 경찰을 배치하여 국가 보안법 개정을 추진하였다.

 

또한 관권선거를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그동안 실시하던 지방자치단체장 직선제를 임명제로 바꾸는 조치를 단행했다.

 

1960년 1월 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출국한 조병옥 후보의 출국을 계기로 조기선거 카드를 꺼냈다.

 

5월에 실시하던 선거를 3월 15일 실시하기로 한 것이다.

 

민주당은 이러한 와중에 조병옥 후보가 사망하면서 또다시 정권교체가 물거품이 되고 부통령 후보인 장면에게 기대를 걸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는 이미 당선된 것과 다를 바 없어 국민들의 민심이 민주당 부통령 후보인 장면에게 쏠릴까 많은 걱정을 하게 된다.

 

이에 자유당은 부정선거를 획책하게 되는데 이들의 부정선거 계획은 80% 이상 득표율을 목표로 사전 투표율 40% 완료, 3인조 또는 9인조에 의한 공개 투표단행, 완장 부대를 동원한 유권자 위협, 야당 참관인 축출, 유령유권자 조작과 기권 강요 및 기권자의 대리투표, 내통식 기표소 설치, 투표함 바꿔치기, 득표수 조작 발표 등이 그것이라고 했다.

 

학생들도 학도호국단을 만들고 정부나 자유당이 주최하는 각종 행사나 관제 시위에 동원되기 일쑤였고 고등학교나 대학에 까지 경찰들이 매일 파견되어 학생들을 감시하는 등 면학 분위기를 해치고 있었다.

 

교사들에게도 자유당 선거운동을 강요하기 일쑤였다.

 

- 학생들의 분노 폭발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학생들의 불만과 고조된 분노는 폭발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일요일에도 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날 것을 염려하여 대구의 고등학생들을 등교시키자 1960년 2월 28일 대구에서 처음으로 학생 시위가 일어나게 된다.

 

이를 계기로 3월 8일에는 대전에서 3월 10일에는 충주와 수원에서 학생 시위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보다 앞서 충주에서는 당시 충주고등학교 학생이었던 장구환 학생을 비롯한 유석우, 박성천 학생들이 같이 자취하면서 비교적 같은 또래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장구환 학생 주도로 마분지 종이에 정부의 실태를 알리는 대자보를 만들어 전봇대나 벽에 붙여 많은 시민들이 볼 수 있게 했고 학교에서도 학생들에게 이를 알리기 위해 칠판에 독재획책 내용을 적기도 했고 유정 천리 노래를 정치 풍자한 노래를 칠판에 적어 많은 학생들에게 전파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선생 길을 따라

장면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도 떠나갔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구비냐

자유당에 꽃이 피고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15일에 조기선거 웬 말인가

천리만리 이국땅에 박사죽음 웬 말인가

시름어린 신문 들고 백성들이 울고 있네’ 라는 것이다.

 

충주고등학교의 학생 계몽 활동에 이어 충주여고에서도 이정자 학도 호국단장을 비롯한 여학생들이 부정선거 획책에 분개하는 쪽지를 만들어 교복 소매와 허리 등에 넣고 충주 장날을 기해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는 운동을 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60년 3월 9일 민주당 장면 후보와 박순천 여사가 유세 차 충주를 방문했다.

 

학생들은 유세장에 가보려고 노력했지만 경찰의 원천 봉쇄로 실패했고 다음날인 10일은 토요일이면서 이날 충주고등학교 기말고사가 있던 날이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등교한 학생들은 깜짝 놀랐다.

 

기말고사를 다음으로 미루고 강당에서 A의원의 강연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엇인가 내막이 있을 것이란 예측을 한 학생들은 학생회장 윤한상, 부회장 유석우, 대대장 이규열, 규율부 이상건 장구환 등 간부들이 모여 논의한 끝에 강연이 정치로 흐르면 모두 뛰쳐나와 시위를 하기로 결의하고 강연장에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강연이 점차 정치 쪽으로 흐르게 되자 처음 계획한 대로 대대장 이규열의 구호로 나가자 하였으나 무슨 영문인지 몰랐던 학생들이 호응이 미미하였고 간부들은 재차 들어가 다 나가자 하고 구호를 외치자 전 학생들이 모두 호응하여 밖으로 나왔고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에게 장구환 학생 등이 시국 연설을 하였다.

 

이어 모두가 시내 쪽으로 ‘학원의 자유를 달라!’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마라’ 등을 외치며 시내로 뛰어나가자 구 완행버스 주차장(제2로터리) 앞에서 경찰의 진압이 시작되었다.

 

경찰들과 밀고 밀리는 상황 속에서 제1로터리까지 간 학생들은 경찰들의 더욱 강경한 진압에 의해 저녁에 다시 모이자라는 약속과 함께 뿔뿔이 흩어졌다.

 

일부 학생들은 농고 학생들을 이끌어내기 위해 봉방동까지 몰려갔으나 이를 성공시키지는 못했다.

 

저녁이 되어 사직산에서 다시 만난 학생들은 농고 학생들과 여고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저녁 시위에 동참했다.

 

저녁에 다시 사직산에서 제2로터리로 진군하던 학생들은 또다시 경찰들과 마주했고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벌어졌다.

 

제2로터리와 제1로터리에서 경찰의 강경한 진압에 많은 학생들이 부상당했고 곤봉으로 얻어맞았으며 경찰에 연행된 학생들도 상당했다.

 

많은 학생들은 경찰의 민주당과 연결 지으려는 회유와 협박, 폭행 등에 의해 집요한 추궁을 당했으나 학생들이 이를 부인해 아무런 소득이 없자 대부분이 밤늦게 풀려났고 핵심이었던 4명만 남아 고문 취조를 끈질기게 받았다고 한다.

 

장구환씨는 각이 진 장작위에 무릎을 꿇리고 곤봉으로 얻어맞는 등 갖가지 고문을 당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도 4명만이 남아 심문 받았다는 기록을 하고 있다.

 

이들의 시위 도중 경찰에 쫓기면서 시장에 난전장사를 하며 씨앗을 펼쳐놓았던 것을 밟아 모든 씨앗이 버려졌는데도 시민들이나 장사하시는 분들도 오히려 학생들을 응원하고 격려하였다 한다. 이처럼 사회적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충주의 학생의거는 그 뒤 세월에 묻혀 잊힌 역사가 되어가고 있었으나 2000년 발간 된 충주고등학교 60년사에서 당시 학생들에 증언에 의해 다시 부활하였다.

 

- 저평가 된 충주 학생의거

 

당시 충주 학생의거 주동자 중 한명이었던 이상건씨는 충주 학생의거는 고등학교학생운동의 최초 발생지인 2.28 대구와 3.8 대전에 이어 전국 3번째의 학생운동이며 충북 최초의 학생 운동으로 충주의 올 곧은 정신을 전 국민에게 알린 역사적인 사건임에도 충주시민들의 무관심속에서 묻혀 있었고 기념탑 하나 없이 60년 가까운 세월을 보냈다며 이제라도 충주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2015년에 이르러서야 충주 학생 4.19기념탑건립추진위원회가 발족되고 2016년 12월에서야 기념탑이 세워졌으니 학생들의 정의에 불꽃은 남들보다 먼저 불살랐지만 그것이 사회 속에서 인정받는 것은 남들보다 한참을 뒤늦었던 것이고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것이다.

 

충주고등학교 60년사가 만들어지고 난 후 그것을 기록으로 당시 학생회장이었던 윤한상씨가 국민훈장을 받은 것 외에 경찰에 의해 고문과 핍박을 받은 많은 학생들이 작은 표창하나 받지 못한 채 세월에 묻혀 허무한 시간만 보낼 뿐이었다.

 

충주 학생의거는 지금이라도 올바른 평가를 받아야 마땅하다.

 

그들을 위한 기념탑은 2016년 시민들의 성금으로 아담하게 건립되었지만 그들이 흘린 피와 고통 그리고 정의를 향해 용솟음치는 외침은 우리 역사속에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충주보다 한 달 정도 늦게 학생 시위를 했던 청주는 청주의 한 공원에 시민의 성금이 아닌 도비, 시비를 가지고 크게 기념비를 세웠고 그것도 자신들이 충북 최초라고 기록하려다 충북일보 조대현 대기자에 의해 발각되어 충주시위를 최초라는 문구는 빼고 충주서도 시위를 했다는 말로 기록하였으며 청주는 훈장을 받은 사람만도 상당수에 이른다는 것이다. 이제 충주도 나서야 한다.

 

충주 학생의거를 주도하고 고문당하고 사회적 정의를 위해 자신의 몸을 던진 학생들에게 훈장 또는 대통령표창 등을 격에 맞게 받도록 해야 한다. 충주 학생의거는 흘러가는 세월 속에 묻힌 역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불의에 항거한 충주의 강인한 정신을 되살려야하고 충주가 배타적이라는 오명을 벗어던지고 긍정적이고 충주에서 살려고 하는 사람들을 감싸고 포용하는 자세로 끌어안아야 한다.

 

또한 충주 발전과 성장을 위해서는 충주 학생의거나 대몽항쟁 등에서 보듯 강인한 정신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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