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사람들은 단월의 충렬사(忠烈祠)라고 하면 누구나 아는 익숙한 이름이며 공간이다. 그러나, 단월의 충렬서원(忠烈書院)이라고 하면 낯선 이름이다. 또한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라고 하면 익숙한 단어이지만, 존치된 47개의 서원 중에 단월의 충렬사가 포함됐다고 하면 조금 의아해할 수도 있다. 서원(書院)이란 단어가 붙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47개의 서원 중에 충렬사(忠烈祠)가 4개였다고 하면 전혀 낯선 얘기가 된다. 충주 충렬사 외에 강화(江華), 동래(東萊), 고성(固城)의 충렬사도 47개 서원 중에 포함되어 있다.
현재 ‘충렬사’란 이름의 사우(祠宇)를 검색해 봐도 전국적으로 28개 정도가 확인된다. 개중에는 최근에 복원한 경우도 여럿 있다. 그만큼 충렬사란 이름이 흔하다. 그렇다고 그 의미와 가치가 적다는 뜻은 아니다. 합당한 업적이 있어야 쓸 수 있는 이름이기 때문이다.
충주 충렬사의 경우 1697년(숙종 23)에 창건하여 1727년(영조 3)에 사액된 이래 여러 차례 보수되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배향 인물은 우리가 잘 알고 있듯 충민공(忠敏公) 임경업(林慶業, 1594~1646) 장군이다.
1697년 12월, 임경업의 아들 임중번(林重蕃)이 ‘그 아비의 원통함을 호소[訟其祖冤]’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숙종은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대신들에게 논의하라고 하였다.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남구만(南九萬, 1629(인조 7)~1711(숙종 37)),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서문중(徐文重, 1634(인조 12)~1709(숙종 35)), 우의정 최석정(崔錫鼎, 1646(인조 24)~1715(숙종 41)), 영의정 유상운(柳尙運, 1636(인조 14)~1707(숙종 33)), 좌의정 윤지선(尹趾善, 1627(인조 5)~1704(숙종 30)) 등이 의견을 냈다. 그러나 숙종이 직접 결론을 내려줄 것을 청했다. “임경업이 흉측한 역적 모의를 미리 알지 못하였다는 상황은 이미 성조께서 환하게 아신 바였고, 도망하여 중국으로 들어간 한 건은 비록 일을 이루지 못했다 하더라도 뜻은 존주(尊周)하는 데 있었으며, 당시 성조께서 여러 번 탄식하고 애석하게 여긴 것은 저절로 은미한 뜻이 있었으니, 성조의 뜻을 추모하여 단서(丹書)를 씻어 주고 그가 의리를 부지한 것을 장려하는 것이 아마도 불가함이 없을 듯하다. 특별히 관직(官職)을 회복시키고 사제(賜祭)하도록 하라.”(『숙종실록』, 숙종 23년 정축(1697) 12월 9일(을묘) 3번 기사) 숙종의 결정에 의해 복관된 것이 사후 반세기만인 1697년 (음) 12월 9일이었다. 열흘 뒤에는 부인 이 씨에게도 품처(品處)하고 정표(旌表)를 내리는 결정이 있었다. 그리고 1706년(숙종 32) (음)2월 5일에 ‘충민(忠愍)’이란 시호를 내렸다.
1697년의 복관으로 이루어진 조치는 1727년 정만근(鄭萬根) 등이 올린 상소에서 확인된다. “대개 30년 전부터 향신(鄕紳)인 여러 원로와 유생들이 더불어 그의 유풍(遺風)을 마음속 깊이 사모하여 그가 옛날에 살았던 곳의 근처를 따라서 사우(祠宇)를 세우고 유상(遺像)을 걸어서 안치하여 봄과 가을에 제사를 드리는 장소로 삼았습니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6월 5일자 25번 기사)
충주 지역의 유림이 뜻을 모아 사우(祠宇)를 세우고 유상(遺像)을 걸고 봄ㆍ가을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다. 그 장소가 충주 달천촌(達川村)이라고 했으니, 지금 단월 충렬사를 기준하면 될 듯하다.
“아, 이 한 폭의 진영(眞影)은 대개 황조에서 하사한 것으로 모발(毛髮)이 시원스럽고 정신이 늠름하지만 그 자손이 한미하여 잘 간수하지 못하였고 오랜 세월이 지나니 그림이 흐릿해져서 그 면모의 10분의 7은 거의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영중추부사 정호(鄭澔)와 판중추부사 민진원(閔鎭遠)이 서로 안타까워하면서 선정이 남긴 뜻을 이을 방법을 강구(講究)하여 각각 녹봉을 덜어 도우면서 다시 갖추어 모사(模寫)하게 하니, 원근의 인사(人士)들도 모두 소문을 듣고서 따랐습니다. 드디어 작년 4월에 화상(畫像)을 걸어서 모신 뒤에 봉안하기를 의식에 따라 하였습니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6월 5일자 25번 기사) “내가 즉위한 초기에 다시 유사(有司)에게 지시하여 사당을 수리하였고, 무신년(1788, 정조12)에는 또다시 장군의 유상(遺像)을 그려서 사당에 안치하고 정문(旌門)을 세워서 장군이 살던 마을임을 표시하고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내리고 공덕을 새긴 비명(碑銘)을 지어 세우기까지 하였으니,…(후략)…”(정조, 『홍재전서』, 제184권, 군서표기(羣書標記) 6 ○ 명찬(命撰) 2, 임충민공실기 중에서) 처음은 1726년 4월에 모사하여 새로 봉안했다고 한다. 우암의 제자이며 당시 정계의 중진으로 있던 정호(鄭澔, 1648(인조 26)~1736(영조 12))와 민진원(閔鎭遠, 1664(현종 5)~1736(영조 12))이 녹봉에서 보태고, 그 소문에 원근의 인사들이 동참한 결과였다. 그리고 1788년에는 정조가 직접 명하여 새로 그리고 그것을 사당에 안치했다고 한다.
1727년에 정만근을 대표로 충주지역 유림이 뜻을 모아 상소를 올린 이유는 충렬사의 사액을 청원하는 일이었다. 정조에 의해 편찬된 『임충민공실기』에는 <충렬사청액소(忠烈祠請額疏)>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는데, 이 상소를 본 영조의 결단이 시원스럽다. “그대들의 상소를 살펴보고 충의(忠義)를 기리는 그대들의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임경업의 외로운 충성과 크나큰 절의는 선조에서 기려서 포상(褒賞)하였고 온 나라가 모두 칭송한다. 근래 서원에 사액하는 폐단을 실로 내가 병통으로 여기지만, 이 서원의 경우에는 다른 곳과 차이가 있으니, 말세에 충성을 배양하고 의리를 격동시키는 도리에서 볼 때 어찌 한 서원에 현액을 아끼겠는가. 해당 조로 하여금 선조에서 포상하던 성의를 본받아서 속히 거행하도록 하겠다.”(『승정원일기』, 영조 3년(1727) 6월 5일자 25번 기사) 이에 대한 사관의 평이 같은 날짜의 실록에 있다. 사신은 말한다. “임경업은 충주 사람으로서 남한산성에서 하성(下城)을 당한 뒤에 중(僧) 독보(獨步)를 불러 주문(奏文)을 싸서 중국으로 들여보내 숭정 황제(崇禎皇帝)가 조서(詔書)를 내리고 포가(褒嘉)하였다. 가도(椵島)ㆍ금주(錦州)의 일에 이르러서는 충절이 더욱 드러났다. 일찍이 바다를 건너 명(明)나라 조정에 들어가 부총제(副摠制)의 직을 배수(拜受)하여 마침내 사막(沙漠)을 쓸어서 깨끗이 하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여겼었는데, 명나라 국운이 이미 끝났고 조선으로 송환되어서는 역적 김자점(金自點)에게 얽혀 들어 옥(獄)에서 죽으니,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곧 그가 살던 지역에 사당을 세워 제사지내고 그의 유상(遺像)을 봉안하니, 유상은 바로 명조(明朝)에서 내린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정만근 등이 상소하여 사액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특별히 윤허하였던 것이다.”(『영조실록』, 영조 3년 정미(1727) 6월 5일자 3번 기사) 당시 조정의 중진으로 충주 출신의 정호가 있었고, 또한 송시열의 의리론(義理論)을 따라 그 명분을 삼던 때에 ‘충렬사’가 사액되었다. 이 과정에서 영조는 ‘서원(書院)’이라고 표현했다. 충렬사에 대한 사액이 결정됨에 ‘제사할 토지’도 함께 내렸다.(정조, 『홍재전서』 제184권, 군서표기(羣書標記) 6 ○ 명찬(命撰) 2, 임충민공실기 중에서)
사액과 함께 서원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1727년부터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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