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 충주발전은 충주시민들의 강인한 정신력에 달렸다. 충주의 정신력은 예로부터 대단했던 곳이다. 삼국 각축의 상황속에서도 제2의 도시 위용을 잃지 않았고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고려 건국에도 큰 공을 세웠으며 충주의 세력으로 신명순성왕후의 두 아들 정종과 광종을 고려왕으로 추대하는 막강한 세력을 과시했다.
왕건의 29명의 왕후 중에서 3번째 왕후로서 가장 많은 자녀를 둔 왕후가 충주의 호족 유긍달의 달인 신명순성 왕후(또는 황태후)이다. 2명의 왕을 배출할 정도로 충주의 세력이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가장 역사적으로 가장 빛나는 전투중의 하나가 대몽항쟁의 충주산성 전투다.
김윤후가 이끄는 고려군은 그 세력면에서도 크게 열세인 상황속에서도 70여일간의 치열한 전투속에서 충주산성을 지켜냈고 고려의 자존심을 지켜낸 승리를 안겨주었던 것이다. 또한 몽고의 충주침입은 총 9차례 이어진 중에서 충주는 8번 승리하는 역사속에 충주의 정신과 자존심을 빛낸 것이다. 또 하나의 충주의 정신은 1950년 7월 7일 벌어진 충주 신니면 동락리전투이다.
동락과 전투를 승리로 이끈 6사단은 바로 충주에서 창설된 사단이란 점과 동락리전투 승리에 결정적 제보를 한 김재옥 여교사 또한 충주사범학교 출신의 동락초등학교 교사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충주에서 창설된 6사단의 구성원의 절반 이상이 충주와 그 부근 사람들이란 점에서 그렇고 승리한 지역이 충주시 신니면 동락리였기 때문이다. 동락전투가 한국 전쟁에서 중요한 점은 큰 전투에서 첫 번째 승전으로 국군에게 우리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을 심어 줬고 국군과 미군이 재정비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도 소련에 막혀 불가하게 여겼던 유엔군의 입성을 동략전투에서 탈취한 소련제 무기를 증거로 소련이 한국 전쟁에 깊이 관여했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소련의 주장이 무의미하게 되고 유엔군 참전의 당위성을 입증하며 유엔군 참전으로 풍전등화에 놓였던 대한민국을 구해냈다는 점이다.
동락전투 승리로 인해 유엔군이 한국전에 참전하게 되고 그로 인해 전세를 뒤집는 계기가 되었으니 동락전투는 이 나라를 구한 전투라 할 수 있는 것이다.
6사단은 이후에도 한국전쟁에서 많은 공을 세우고 압록강까지 진군하여 초산리에서 압록강 물을 떠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친 그러한 부대로서 초산 부대라는 별칭도 붙은 부대엿다.
4.19학생혁명당시에도 충주 학생들은 충주고등학교를 필두로 시작하여 야간시위까지 하는 극렬함을 보였다. 또한 이 기록은 전국 3번째 일어난 학생시위로서 4.19혁명의 선구자적 역할을 충실히 했던 것이다.
이처럼 충주의 선인들은 매우 강인했고 진취적이었으며 긍정적이었다. 그러나 요즘 이러한 선인들의 강인한 정신력은 사라지고 ‘배타적이다, 미온적이다’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고 있다. 또한 요즘은 쇠퇴를 거듭하면서 미래를 걱정해야 하는 도시가 된 것이다.
우리는 이제 역사속에서 강인했던 정신력을 되 살리고 모든 시민들이 단합하여 충주를 새롭게 변모시켜야 한다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 많은 지방의 지자체들이 지방 소멸의 위기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충주도 안심해선 안 된다. 좀 더 적극적으로 좀 더 긍정적으로 좀 더 화합적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7월 7일 벌어졌던 동학전투의 재조명과 호국역사를 기리고 충주의 강인한 정신력을 키울 수 있고 호국의 본고장의 위상과 호국 국민관광지 조성에도 더욱 박차를 가해야 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홈피에 게재돼 있는 모든 이미지를 무단도용, 사용이 발각되는 즉시 민형사상 책임을 받게 됩니다. ※ 외부 기고는 충주신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작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관련기사목록
|
많이 본 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