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학연구소의 제2회 충주학 학술세미나가 충주의 대몽항쟁과 충주성 전투라는 제목으로 7월 6일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국원관 강당에서 열려 대몽항쟁에 대한 기대감을 한층 높였다.
그러나 기조강연이나 발표자 모두 나름대로 많은 연구를 한 흔적은 있으나 충주시민들이 열망하고 있는 충주산성의 비정에 대한 결론은 속시원히 풀리지 않아 시민들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발표자 중 많은 사람이 대림산성일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지만 중지를 모으지 못하더라도 어디부터 발굴하여 해답을 얻을 것인가에 대한 그림을 그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충주시민들의 여망은 대몽전에서 싸웠던 충주산성이 어디인가를 빨리 확인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번 학술대회에서도 그러한 결론을 얻지 못하고 학술적 논쟁만 커진 상황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더욱이 그동안 거론에서 제외됐던 동악성이나 봉황성까지 거론되었다는 점이 그렇다는 것이다. 다만 몽골의 역사를 전공한 충남대학교의 고명수 교수가 토론에서 제기한 몽고 장수 야굴에 대한 위상에 대해 정확히 설명함으로써 충주의 대몽항쟁의 위대성을 더욱 공고히 했다는 것은 이번 토론의 성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야굴(에쿠)은 칭기스칸 테무진의 동생 주치카사르 가문의 수장으로 몽골 황족 안에서는 상당히 높은 위상을 지니고 있는 인물이라 한다. 칭기스칸의 세동생 주치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김 가문은 동방삼왕기, 동방제왕, 동도제왕 등으로 불리면서 일찍이 요동에서 강력한 군사력으로 막강한 세력을 형성하였으며 우구데이, 뭉케, 쿠빌라이가 즉위할 때 이를 적극 지지하고 도왔기 때문에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했고 금나라 정벌에 참여하여 금나라를 멸망시키는데 크게 이바지했으며 뭉케 사후 쿠빌라이를 도와 반대 세력인 아릭부켸를 격퇴하는데 큰 공을 세우기도 해서 그의 군사력은 고려를 침공했던 살레탑이나 당고, 아모간, 차라테 등과는 차원이 다른 위상과 강한 군사력을 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충주의 대몽항쟁이 그동안 수차례의 대몽항쟁 때보다도 크고 강력하여 매우 힘든 상대였다는 것이다. 충주의 대몽항쟁이 대몽항쟁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를 상대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강력한 군대를 맞아 싸웠던 충주산성은 30년 대몽항쟁에서 가장 돋보이는 승전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충주에서는 대몽항쟁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점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이상 학술적 논쟁을 이어가기보다는 가장 주목을 받는 대림산성부터 발굴을 시작하는 것이 충주의 대몽항쟁 역사의 진실을 세우고 바로 세우고 충주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대외에 알려 호국의 표본으로 삼아야하며 앞으로 충주의 강력한 정신력을 이어받아 충주발전의 기틀을 다지는 초석으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대몽항쟁, 동락전투 등은 충주시민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진취적인 충주 정신을 새롭게 다져야 한다. 대몽항쟁 역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는 우선 충주산성이 어디인가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급히 이루어져 충주의 대몽항쟁에 대한 위대성을 널리 알리는 호국 관광의 중심지로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조길형 시장이 제시한 마즈막재의 대몽항쟁탑을 많은 시민과 관광객들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옮기는 것도 시급히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또한 한국전쟁 때 첫 승리로 노획한 무기를 유엔에 제시해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이 개입됐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써 유엔군의 한국 진입의 당위성을 입증하여 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동락전투에 대한 호국 관광지 만들기도 함께 추진하여 충주가 국가 누란의 위기에서 항상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는 점을 부각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충주산성에 대한 발굴조사는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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