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 새재를 넘으며 - 4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8/30 [10:30]

문경 새재를 넘으며 - 4

김희찬 | 입력 : 2023/08/30 [10:30]

 

교귀정을 지나 걷다 보면 ‘꾸구리바위’라는 재미있는 이름을 설명해 놓은 곳이 나오고, 조금 더 올라가면 ‘산불됴심’이라는 글씨를 새긴 한글 비석을 지난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전동차가 회차하는 곳이 나온다. 양쪽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만나는 곳이다. 거기에 놓인 다리에 서서 보면 2관문이 우뚝 길을 막고 있다.

 

1관문과 마찬가지로 2관문은 조곡관(鳥谷關)과 영남제이관(嶺南第二關)이라는 현판을 앞뒤로 걸고 있다.1808년에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조령성(鳥嶺城)을 설명하면서 ‘산꼭대기의 것은 조령관(鳥嶺關), 중성(中城)은 조동문(鳥東門), 초곡성은 주흘관(主屹關)’이라고 기록하였다. 그리고 1910년에 일제가 측도(測度)한 1대 5만 지형도에는 ‘조령관 – 조동문 – 주흘관’을 차례대로 표시하였고, 용추와 동화원 중간에 조동문을 표시해 놓았다. 조곡관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지만 본래는 조동문이 아니었을까?

 

2관문과 관련하여 할 이야기가 많다. 우선 조령의 관문 개념이 확실하게 생긴 이유가 임진왜란 이후에 2관문을 새로 고쳐 쌓은 데서 시작된다. 2관문을 중심으로 문경 새재에 삼중 방어 구조와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거기에 있는 설명문에는 ‘조선(朝鮮) 선조(宣祖) 25년(1592) 왜란(倭亂)이 일어난 후에 충주(忠州) 사람 신충원(辛忠元)이 이곳에 성을 쌓은 것이 시초가 되었다.’고 하였다. 충주 사람 신충원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래서 기록을 찾아 그에 대한 개략적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선조실록』 선조 27년(1594) 2월 19일자 2번째 기사는 신충원과 2관문에 관한 자세한 사실이 기록돼 있다.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오늘날 형세는 조령(鳥嶺)을 굳게 지키는 계책이 가장 긴급합니다. 충주(忠州)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는 지역으로 나라의 문호가 되니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연한 수백 리가 모두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충주를 보전하려면 조령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조령의 험준함을 막지 못하면 충주 또한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지난날 신립(申砬)의 패전으로 이미 분명히 징험되었습니다.

지금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이란 자는 바로 충주 사람인데 조령의 형세 곡절(曲折)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조령의 영상(嶺上)에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어 지킬 수가 없다. 영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고 가운데에는 계수(溪水)가 고여 있는데 왕래하는 행인들이 횡목(橫木)을 놓아 다리를 만든 곳이 모두 24군데인데 이곳을 응암(鷹巖)이라 부른다. 만약 이곳에 병기를 설치하여 파절(把截)하다가 적병이 올 때 다리를 철거하고 또 시냇물을 가로막아 두 계곡 사이로 큰물이 차게 한다면 사람은 발을 붙이지도 못할 것이다. 이어 궁노(弓弩)ㆍ능철(菱鐵)ㆍ화포(火砲) 등의 병기로 지키면 불과 1백여 경졸(勁卒)로도 조령의 길을 튼튼히 막을 수 있다. 문경(聞慶) 동쪽에는 또 옛날 길[하늘재]이 있어 조령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산세가 극히 험준하여 백 년이나 사람의 왕래가 끊어짐으로써 등나무와 댕댕이 덩굴이 하늘을 가려 햇빛도 희미하다. 또 하나의 길은 문경의 서쪽에서 연풍(延豊)의 동쪽으로 나오는데 이 길[이우리고개, 이화령] 또한 심히 험준하니 수십 인이 숲속에 숨어서 지킨다면 이 두 곳으로는 적이 감히 넘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충원이 또 말하기를 ‘거느린 승군(僧軍)과 산척(山尺)으로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1백여 인은 된다.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또 화약이나 총포(銃砲) 등의 병기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수개월 후에는 정군(精軍)을 이룰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한 바를 보건대 시험삼아 맡겨볼 만합니다. 만약 충원을 때에 맞추어 내려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요해지(要害地)를 가로막는 계책을 쓰게 하고 또 윤승훈(尹承勳)에게 글을 내려 그가 말한 바를 좇아 종자(種子)와 우척(牛隻)을 주어 농사짓는 자산으로 삼게 함으로써 조령의 적로(賊路)가 끊기게만 되면 적이 비록 황간(黃澗)ㆍ영동(永同)ㆍ금산(金山)의 사이[추풍령]에서 나오더라도 우리 군병이 전력으로 파수(把守)할 수 있을 것이며, 충주의 상류를 잃지 않는다면 경강(京江, 한강)을 지키기가 또한 용이할 것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보니, 경이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뜻을 알겠다. 마땅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2년 뒤인 1594년 2월에 유성룡이 선조에게 건의한 조령 방어책이다. 조령 방어책은 곧 한양 방어 전략이기도 하다. 유성룡은 당시에 수문장으로 있었던 신충원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옮기고 있다.

 

신충원은 충주 사람이라고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신립이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 후에 충주에서 활동한 의병장으로 조웅(趙熊)이 이야기된다. 『여지도서(輿地圖書)』 충원현 충신(忠臣) 조의 첫머리에 조웅을 소개하였다. 백기장군(白旗將軍)이라는 별명을 가졌고 앙성과 소태 지역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했다고 한다. 그러나 조총에 맞아 소태 청룡사에서 죽었다고 하며, 피난해 있던 조정(행재소)에서는 그에게 충주목사를 제수하는 교지를 내렸지만 교지가 도착하기 전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반면 임진왜란 당시에 신충원에 대한 이야기는 없다. 유성룡의 이야기 중에 신충원의 활동을 유추할 수 있다. ‘거느린 승군(僧軍)과 산척(山尺)으로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1백여 인은 된다.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는 대목이 있다. 신충원은 승군과 산적을 거느리고 조령을 근거지로 넘나들며 연풍과 수회를 중심으로 의병으로 활약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래서 조령과 관련된 형세곡절을 환하게 알고 있었으며, 그러한 활동 과정에서 체득한 전략을 유성룡에게 말했고, 그것을 유성룡은 선조에게 고했다. 그 결과 신충원의 말대로 하라는 선조의 답을 얻어냈다. 수문장으로 있던 신충원을 조령으로 내려보내 2관문을 중심으로 조령 방어 체계를 완성하게 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1592년 6월 7일 이후에 충주 사람은 슬픔에 숨죽이는 상황이 되었지만, 그러한 슬픔을 가슴에 품은 채 왜적에 맞서 의병활동을 했다는 것이다. 조웅 장군이 있었고, 또한 신충원이 있었다. 다만 신충원의 이전 행적과 활동에 대해서는 전해지는 것이 없을 뿐 저간의 사정을 행간에서 읽으면 충주의 남쪽에서 조령을 경계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충주 북쪽에서 조웅이 활약했다면, 남쪽에서는 신충원이 활약했던 것이다.

 

신충원의 말처럼 응암(鷹巖) 사이의 계곡에 나무를 걸쳐 놓아 다리로 삼은 곳이 24군데였지만, 지금은 2관문 앞에 놓인 조곡교(鳥谷橋) 하나만 있다. 그리고 신충원에 대한 이야기는 충주에서 사라졌다. 2관문에서 할 이야기가 많지만, 모든 것을 하나로 정리하면 ‘충주 사람 신충원’으로 모아진다. 임진왜란으로 인한 7년 전쟁이 끝나고 재연된 정쟁(政爭)에서 신충원은 유성룡의 사람으로 분류되었고, 공격 대상이 되며 정치적인 희생양이 되었다. 정쟁을 벗겨내고 2관문을 수축한 공과 함께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충주 사람으로 좀 더 확실하게 정리할 필요가 있다. 비단 이것은 신충원이라는 개인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임진왜란 상황에서의 충주를 밝혀내는 과정의 하나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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