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지나가면 흙먼지 펄펄 날리던 ‘신작로(新作路)’가 마냥 익숙했었다. 그 신작로라는 것이 말그대로 새로 난 길인데, 그것의 시작은 일제강점에 두는 것이 맞을 것이다. 즉, 자동차가 다닐 수 있는 새길이 필요했고, 그에 따라 유사 이래로 이용해오던 도로를 확장 또는 정비한 것이 곧 신작로의 시작이다. 충주에 그 ‘신작로’ 다운 신작로는 언제,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① 충청북도 충주는 구 관찰도(觀察道) 소재지로 ② 한강(漢江)의 수리(水利)를 이용하야 상취인(商取引)도 은성(殷盛)을 극(極)하되 ③ 시가(市街)는 구래에 무이(無異)하야 소호(小毫)도 개(改)치 안이하였더니 ④ 금회에 사세국(司稅局) 엽연초(葉煙草) 경작지(耕作地)가 건설된 결과 ⑤ 그 수송 도로로 탄금대(彈琴臺)까지 3간 폭 도로를 개착(開鑿)하기로 된 동시에 ⑥ 시내도 성벽을 취훼(取毁)하고 종횡으로 시가도로를 통할 설계가 성(成)하야 불원에 착수한다더라.(매일신보. 1912년 11월 14일자,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定)>)
짧은 기사 하나에 담긴 정보는 다양하다. 이것을 풀어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충주는 충청북도 관찰도 소재지였다. ② 한강의 수리, 즉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상거래가 성행해 극에 달한다. ③ 그러나, 시가지는 예로부터 내려온 그대로여서 조금도 고치지 아니하였다. ④ 이번에 (충주에) 사세국 엽연초 경작지가 개설되었다. ⑤ 그 수송도로로 탄금대까지 3칸 폭 도로를 뚫기로 했다. ⑥ 동시에 시내도 성벽을 헐어내고 종횡으로 시가도로를 만들 설계가 이루어져 머지않아 착수한다고 한다.
1913년 9월부터 1916년 9월까지 진행된 충주시구개정을 알리는 신문기사인데 그 전후 상황을 요약해 놓고 있다. 이것을 한 눈에 보여주는 것이 1916년 간행된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에 수록한 <충주시구개정도(忠州市區改正圖)>이다. 신문기사에 소개된 것처럼 성벽을 헐어내고 충주 중심부를 가로세로 직선도로로 구획한 상황과 함께 소위 ‘부민약국삼거리’로 지칭되는 그곳에서 탄금대 방향으로 곧게 뻗은 도로가 표시돼 있다. 이것의 개설 목적은 1912년의 기사에서 밝힌 것처럼 충주에 재배되기 시작한 황색엽연초 수송을 위한 것이었다.
당시 충주에 이르는 교통 여건 관련 기사가 몇 건 확인된다.
[1] 충주군(忠州郡)이라. 도로(道路)는 자(自) 조치원(鳥致院) 지(至) 충주(忠州;220리)가 위(爲) 2등 국도하여 자동차, 마차, 인력거가 무불통행하고, 유(惟) 충주 달천(達川)은 이용 도선(渡船)이러라. 증(曾) 전(前) 위관찰도지(爲觀察道之) 충주군(忠州郡)이 누경(屢經) 내란지병화(內亂之兵火)하여 미면(未免) 소조(蕭條)하고 읍양(邑樣)이 상(尙) 미복구(未復舊)나 우금(于今) 시구(市區)를 정획(正劃)하여 시설을 불태(不怠)하니 불과 기년(幾年)에 구면목을 부정(復呈)할 것은 무의(無疑)하도다.(하충(夏虫), ‘산산수수(山山水水)(1), 매일신보. 1914. 7. 8. 1면 4단)
[2] 시정(始政) 5년 기념 공진회에 대한 충주 부근 인심의 의향은 익익 그(其) 열도(熱度)를 가하여 내선인(內鮮人) 관람 희망자가 돈가(頓加)하여 개회일을 갈망중이오, 차(且) 충주는 황색연초의 특산지로 농사 경영자의 일별(一瞥)에 가치가 유(有)함은 물론 역사상의 유적이 도처에 점재(點在)하여 고고자료(考古資料)의 풍부함으로 자연 그 기(期)를 이용하여 충주를 탐승(探勝)하는 인(人)도 다(多)할 것이오, 개히 경성, 충주간 자동차 운수(運輸)는 인가를 경(經)하여 도로의 준공을 사(俟)하여 운전 개시의 예정인 고로…(후략)(매일신보. 1915. 4. 14. 2면 6단. <충주와 협찬회>)
[3] 청주(淸州) 부강(芙江)간 교통기관으로 궤도자동차(軌道自働車) 등을 누차 계획하였으나 지우금 성립치 아니하여 청주에서 경부선(京釜線)에 연락하는 교통은 조치원선(鳥致院線)만 홀로 융융(隆隆)하고 교통이 편리한 부용선(芙江線)은 도로혀 쇠퇴하는 기미가 있었더니 금회에 부강, 청주, 충주의 유지자가 상의하여 자본금 5,000원의 합자회사를 조직하고 청주 부강간에 매일 4회, 청주 충주간은 격일 운전할 자동차 운수의 의(議)가 있어서 조합장에 민영은(閔泳殷) 씨를, 회장에 길원치삼랑(吉原治三郞) 씨를 천거하여 가사무소(假事務所)를 청주 남정(南町) 3정목에 설치하였더라.(매일신보. 1915. 9. 9. 2면 6단. <충북자동차회사>)
[4]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1915> 광고 기사
<임금표>
직거자동차부(織居自動車部) 청주영업사무소(전화 43번) 충주영업부 우야좌평(宇野佐平) / 광고(전5)
[5] 종래 경성(京城) 충주(忠州) 간의 교통은 충주(忠州) 청주(淸酒) 간 급(及) 청주 조치원의 격일 운전하는 자동차를 이용하여 조치원(鳥致院) 남대문(南大門)간의 철도편에 의하였음으로 급용(急用)에는 불선(不尠)한 불편을 감하던 바, 금회 경남자동차상회(京南自働車商會)에서는 경성 충주간 직통 자동차를 운전하기로 결하고, 당국의 허가를 득하여 작 10일부터 운전을 개시하였는데, 해 구간에 운전하는 자동차는 신조(新造)한 대형자동차 수 대를 가용하고, 연숙(鍊熟)한 운전수로서 운전케 하며, 경충간에는 이천(利川) 장호원(長湖院) 등 중요소 약 7처에 정차하여 중간 연락을 도(圖)하며 매일 오전 8시 30분 경성 충주의 양소(兩所)에서 공히 출발하여 편도 약 8시간을 경할 뿐인데, 경성에서는 황금정(黃金町) 1정목 해(該) 상회 경성사무소에서 승객을 취급한다 하며 해 자동차의 개통으로 인하여 양소간의 교통은 종래보다 비상히 편리하게 되었다더라.(매일신보. 1916. 3. 11. 2면 6단. <경충(京忠) 자동차 개통>)
[6] 대구부(大邱府) 이등길삼랑(伊藤吉三郞)씨의 출원 중이던 충주(忠州) 대구(大邱)간 승합자동차 영업에 대하여 3월 6일부로 써 허가의 지령이 하(下)하였더라.(매일신보. 1918. 3. 12. 2면 6단. <충대간(忠大間 자동차>)
[1]은 1914년 상황으로 경부철도를 중심으로 청주를 통해 충주로 이어지는 도로와 교통 상황에 대한 기술이다. 여기에 한창 진행중인 시구개정에 대한 기대를 피력하고 있다. [2]는 1915년 상황으로 시정(始政;즉, 조선 통치) 5주년 기념 공진회 준비와 관련한 충주의 상황과 함께 서울(경성) 충주간의 자동차 운수 인가가 진행중임을 알 수 있다. [3]은 1919년 9월 상황으로 <충북자동차회사> 설립이 추진되고 있으며, 그에 따라 청주-충주간에 격일로 정기운행을 예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4]는 1915년의 청주-충주간 자동차 운전 개시를 알리며 그 경유지와 요금을 표시하고 있다. [5]는 1916년 3월 상황으로 경남자동차상회(京南自働車商會)에서 서울-충주간 운행허가를 받고 영업에 들어간 사실을 알 수 있다. 그 경로는 3번 국도를 중심으로 이어진 노선임을 알 수 있다. [6]은 1918년 3월에 대구에서 충주로 운행하는 승합자동차 영업 허가가 난 것을 알 수 있다.
일제강점이 구체화되면서 그들의 필요에 따라 차량을 이용한 노선의 확대 과정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기사들이다. 반대로 이것은 종래의 전통적인 도보, 우마차 등의 운송체계를 통한 충주로의 교통로가 자동차 중심의 도로 상황으로의 변화에 따라 수정돼가는 과정을 말해 준다. 이러한 외부적인 변화와 함께 충주 내부에서의 도로 상황 변화의 신호가 곧 충주시구개정이고, 그 첫 사례가 탄금대로 이어진 신작로였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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