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탄금대로, 충주에 개설된 첫 신작로 ②(왜 만들었을까?)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6:34]

82. 탄금대로, 충주에 개설된 첫 신작로 ②(왜 만들었을까?)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6:34]

 

1910년대의 충주로 이어지는 교통로와 차량 운행 노선의 개설 등 외부적인 상황을 뒤로 하고, 외떨어진 탄금대까지의 신작로 이야기를 하자.

 

이 길의 확장ㆍ개설 이유를 1912년 매일신보 기사에서는 ‘금회에 사세국(司稅局) 엽연초(葉煙草) 경작지(耕作地)가 건설된 결과 그 수송 도로로 탄금대(彈琴臺)까지 3칸 폭 도로를 개착(開鑿)하기로 된 동시에’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 <충주시구개정>이라는 도시계획 사업이 포개져 있다.

 

기사에서 언급한 엽연초 경작지는 시험재배에 성공한 후 대규모 경작을 시작한 황색엽연초(黃色葉煙草)를 의미한다. 이것은 달리 얘기하면, 내륙의 교통 오지인 충주에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본이 이용할 가치가 생겼다는 얘기다. 즉, 그것은 일본이 메이치유신(明治維新)을 통해 경험했던 통치자금 마련을 연초세(煙草稅) 신설로 해결했던 방식에서 비롯된다.

 

러일전쟁 후에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구체화했다. 그 결과 ‘을사보호조약’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또한 보통경찰권을 빼앗아 그들이 대리하는 것으로 하였다. 군대가 아닌 경찰을 내세워 조선을 식민지화하려는 노골적인 행동에 나섰다. 그러나 그 경찰조직을 유지하기 위한 비용 해결을 고민하던 일본은 그 답을 그들 내부적인 경험에서 찾았다. 그것이 곧 경찰 운용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연초세, 염세 등을 통해 신설해 마련했던 메이치유신 후의 일본 내에서의 방식을 원용한 것이다. 그것이 곧 전매청(專賣廳)을 두어 존속시켰던 담배, 소금, 그 후에 인삼에 대한 국가 독점적인 통제 속에서 수익을 국가재정으로 환원하여 통치자금으로 활용했던 병폐의 원조였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 첫머리의 고민에 대한 해결책으로 가장 선호하는 연초 품종의 시험재배 성공과 그 후의 대량 재배와 생산, 원료 공급기지로 선택된 곳이 바로 충주였다.

 

시험재배를 성공(1911)하고 실질적인 수확 첫 해였던 1912년에 그 수송도로로 탄금대까지 신작로를 만들 것을 결정한 사실은 놀랍다. 뒤에 ‘충주 황색연초’라는 독립된 명칭까지 얻게 된 그 시작에서 소위 ‘대박’날 것을 예상했던 점이 그렇고, 또한 그만큼 철저한 조사와 분석을 통해 결정한 사실이 또한 놀랍고 무섭다. 이미 1910년의 과수(果樹) 신재배지를 조사한 결과에서 충주는 능금, 감, 포도 재배에 적합한 곳으로 파악(매일신보. 1910. 9. 29. 5면 2단. <과수 신재배지> 참고)되었으나, 그 시기에 또한 엽연초 시험재배가 동시에 진행되었던 점 역시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그 재배 결과에 후속하는 수송체계에 있어서는 당시에 가장 선호되었던 철도 부설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다. 1913년에 경부ㆍ경의선을 중심한 남북축의 구축 후에 추진되던 간선철도 계획에서 경부선 복선화 계획으로 서울에서 충주를 경유하여 대구 부근에서 경부선과 합하는 선로의 신설을 논의했었다.(이것은 지금 추진되고 있는 중부내륙선 철도 노선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매일신보. 1913. 11. 30. 2면 4단. <조선철도의 제3기 계획, 대옥(大屋) 철도국장 담> 참고) 이에 앞서 경편철도(즉, 협궤열차) 부설 계획으로 성환-장호원-충주를 연결하는 노선도 이미 계획에 있었다. 그러나 막대한 건설비용 등의 문제로 이것은 후순위로 밀렸다. 그나마 1928년에 가서야 청안(증평)에서 충주까지의 충북선 연장이 겨우 이루어졌을 뿐이다.

 

그 기간 중에 충주에서 쏟아지는 황금이었던 황색연초의 수송책으로 충주읍내에서 탄금대까지 트럭으로 운반하고, 그 후 서울 용산연초제조창까지 운반할 수단으로 역사적으로 이용해온 수운(水運)이 이용되었던 것이다. 뱃길로 갈 수 있는 출발지까지의 안정적인 수송책으로 마련된 것이 바로 1912년 <충주시구개정> 계획에 부속된 탄금대까지의 신작로 건설이었다.

 

이 구간을 연결하기 위해서는 3~40 미터에 이르는 교량 3개와 탄금대 직전의 작은 다리 하나 등 4개의 다리를 놓아야 한다. 첫 시작인 소위 대수정다리는 이 때 새로 놓여 충주로 들어오고 나가는 길목 역할을 했다. 그 다리의 직전 이름은 1872년에 그려진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에 ‘독갑교(獨甲橋)’로 기록돼 있다. 독갑교는 도깨비다리의 한자식 표기이다. 수량에 따라 물이 불어나면 사라지고 그렇지 않을 때는 온전한 다리로 존재했을 그것이 도깨비 같았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것이 <충주시구개정>에서 동서를 관통하는 주통로였던 대수정(大手町)(현, 문화회관에서 자유시장 입구까지)이었기에 대수정다리로 지칭되어온 것이 근 100년이 넘었다.(이 다리에는 현재 표석이 보이지 않는다. 다리 난간 양쪽에 상가가 있기 때문에 일반 도로로 착각하기 쉽다. 하지만, 다리 어딘가에 표석을 놓아 현재 이름과 규모 등을 밝히는 것도 필요할 것으로 본다.)

 

이 길은 누가 만들었을까? 1916년의 <충주발전사(忠州發展史)>에 기록된 <충주시구개정>에 관한 요약을 보면 ‘토공(土工)은 각 면민들로부터 부역(賦役)을 동원하여서 연인원 62,804명의 인부가 사역하였다’라고 하였다. 그들은 모두가 충주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공사가 어느 정도 진행된 1915년의 충주읍 인구통계를 보면, 1914년 조사에서 총 2,555명이었던 읍내 주민이 1,000명으로 급감했다. 1,555명이 새로 바뀐 충주에서 쫓겨난 것이다. 일본인에 의한 일본식 도시로 변모한 충주읍내에 일본인들 중심의 사회ㆍ경제시스템이 구축되고 원래 거주했던 충주 사람의 2/3는 쫓겨나 식민지로 변한 세상을 맨몸으로 다시 맞아야했던 상황이다.

 

그 상징적인 변화 중의 하나인 신작로(新作路)에 얽힌 충주 이야기는 충주의 지금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만한 잊힌 얘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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