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지(虎巖池) 물이 어떻게 채워졌을까? 한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어릴 적 학교 소풍 장소로 가장 많이 갔던 곳이 탄금대(彈琴臺)와 호암지였다. 그냥 그렇게 있었기 때문에 일상의 하나였고, 그래서 그렇겠거니 했다.
한때 그런 생각도 했다. 초등 5학년생이었던 나에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당신의 작은 책꽂이에서 고르고 골라 읽으라고 주셨던 큰아버지는 낚시를 즐기셨다. 아침에 낚싯대를 챙겨 자전거를 타고 나가며 ‘오늘은 호암지로~’라고 툭 내뱉은 한 마디에 큰어머니는 점심을 준비해 호암지까지, 또는 목행까지 광주리에 이고 가셔서 점심공양을 하셨다고도 했다. 특히 많이 등장하는 곳이 호암지였고, 1950년대 신문기사를 정리하며 낚시대회에서 2등을 했던 큰아버지 이름도 확인했었다. 그리고 20대 중반에 당신 생전에 혼자 보시며 고민했었을 족보를 열어보았다. 이래저래 여기저기 메모해놓은 흔적들은 큰아버지의 고민이었다. 1800년대 중반에 족보 한 질만 가지고 충주로 왔다는 집안 내력의 선을 연결하기 위한 당신의 뿌리찾기였다. 거기에 그 족보를 가지고 충주로 이주해 온 고조부에 대한 기록이 있다. 그의 장지(葬地)가 호암지쪽이었다.
지금의 ‘충주국민체육센터’라 불리는 그곳에 시설을 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했었다. 그 결과 그곳은 과거에 공동묘지였다. 그것이 앞 길 건너 호암지까지도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생각하기를 호암지 물속 어딘가에 있을 고조부를 그리며 무심한 낚싯대를 던져 홀로 고민하지 않았을까 생각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예전에 그 묘는 파묘했고 화장해서 뿌렸다는 얘기를 최근에야 아버지께 여쭤서 알게 되었다.
그 묏자리가 수몰된 이유는 호암지 확장공사 때문이었다. 대제(大堤)와 소제(소제)로 불리던 충주의 대표적인 두 저수지 중에 소제가 바로 지금의 호암지이다. 1913년부터 1916년까지 단행된 <충주시구개정> 후에 토목공사의 방향은 농업생산량 증가로 돌아섰다. 도시가 일본인들이 살기 편한 구조로 개편된 후에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전환된 것이다.
1931년에 발행된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에 그 이야기가 기록돼 있다.
본 조합 구역은 모사평(毛沙坪)이라 부르는데 고대로부터 관개시설을 행하여 왔으며, 대제(大堤) 및 지금의 호암제(虎巖堤)를 소제(小堤)라 불렀다. 이 두 저수지 가운데 대제는 한지(韓池)라 불렀고, 1830년(道光 10년) 지금으로부터 수백 년 전 한(韓) 씨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소제는 옛날부터 연지(蓮池)라 불렀는데, 대제보다 뒤에 만들어진 것이다. …(중략)… 1917년 3월 28일부터 공사에 착수하여 용산보(龍山湺), 봉계보(鳳溪湺)를 축조하고, 다음으로 동년 6월에 소제의 제당(堤塘)을 개축하여 무넘이(溢流)로 하거나 통관(桶管)을 묻어 저수지 안의 면적은 5정(町) 3반(反)으로 확대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1918년 3월 상순경에 소제를 기공하여 제당을 축조하였다.(오쿠도 이텐가이(奧土居天外), 『충주관찰지』, 「忠州水利組合經營方法及成績」 행정학회인쇄소, 1931(소화 6년), pp.105~112. 참고)
함지와 호암지로 불리는 두 저수지의 내력이 당시 상황에서 간략히 언급되고 있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목한 것이 용산보와 봉계보라는 두 장소였다. 이것은 현재도 활용되고 있는 시설이다. 특히 용산보는 호암지로 물을 끌어대는 첫 점으로 고등학교 다닐 때에 학교 앞 길 건너에 흐르던 수로가 바로 그 물줄기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용산보(龍山湺)는 남산초등학교 뒤쪽 개울로 보통 ‘사천개’라 불리는 곳에 있다. 호암지에서 예성여중고를 지나는 외곽도로(호암대로)에서 범바우에서 흘러내려오는 개울을 따라 아래에 있는 첫 보(湺)인데, 거기에 여닫이 수문이 하나 있다. 이것이 1917년에 만들었다고 하는 용산보이다. 거기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지현동 신촌을 가로질러 충주고 앞까지 완만히 흐르다가, 충주고를 지나 내리막길에서 곧바로 지금의 베이스호텔 앞쪽까지 흘러가게끔 설계되어 만들어졌다.
봉계보(鳳溪湺) 역시 현재 남아 있다. 충주국원고등학교에서 충주천을 따라 내려가며 있는 첫 다리인 봉현교 바로 위에 보가 하나 있다. 그곳에서 봉방동쪽으로 수문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1917년에 만들었다는 봉계보이다.
두 개의 보는 모시래들을 시작으로 달천과의 사이에 있는 너른 평야지대를 관개농업(灌漑農業)을 통해 더 많은 쌀을 만들기 위한 분명한 목적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로 인해 천수답의 하늘바라기 농사에서 일정 부분 사람의 계획과 통제에서 규모있는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조건이 만들어졌다. 그것을 관리하기 위한 기구로 충주수리조합(忠州水利組合)이 생겨나면서 일제강점기의 민간단체의 하나로, 또는 이권집단으로 성장해오며 해방 이후에도 계속된 농업사회에서 그 위치와 위세를 떨쳤었다.
아픈 기억이고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밥을 먹을 수 있게 해 준 시설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유래나 의미를 채 읽어내기도 전에 포장되고 확장되어 덮어버렸다. 요즘같은 무더위에 어디 한 곳 시원하게 발 담그고 부채질하며 수박 한덩이 쪼개놓고 이웃과 소곤소곤 한담을 나눌 공간이 그립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지현동의 신촌을 가로지르며 충고 앞으로 흐르고 있는 수로를 되살려 내는 것은 어떨까 생각해 본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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