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충주농업기술학교(忠州農業技術學校)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6:44]

86. 충주농업기술학교(忠州農業技術學校)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6:44]

 

6.25가 끝나고 전후 복구 재건 등의 구호와 함께 삶을 위한 몸부림이 치열하게 시작되었다. 그런 중에 충주에는 ‘충주농업기술학교(忠州農業技術學校)’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이 학교의 앞뒤를 따라가 보면 당시의 특수한 사회ㆍ교육적 현상과 충주지역의 학교 설립 이면사의 한 장면이 포착된다.

 

이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벌써 15년 전이다. 당시 지나간 충주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셨던 권태성(權泰成) 선생에게서 당신이 5년간 충주농업기술학교를 운영했었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을 수 있었다. 학교라고는 하지만 사립이었고, 개인의 의지에서 출발한 곳이었다. 그는 1930년대 중반에 일본 동경농업대학을 졸업했다. 농업 및 원예에 대한 관심은 그 후의 그의 생에서 차지하는 중요한 요소이며 덕목이었다. 그런 의지에서 6.25 후의 피폐한 농촌 현실을 바라보며 시작한 것이 충주농업기술학교였다고 한다. 3년 수학의 중학교 과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195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학부형들의 인문계 중심의 중학교로의 전환 요구에 부딪혀 갈등했다고 하고, 본인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이 신문에 기사 하나로 등장한다.

 

<충주농업기교(忠州農業技校) 개교 추진, 동창회 석상서 임원 결정>

 

【충주】 충주농업기술학교 동창회에서는 2일 하오 2시 제일생명보험주식회사 사무실에서 긴급 동창회를 열고 이 고장에 유일한 특수학교로서 눈물어린 고난을 겪어오며 유지해 오던 모교는 몰지각한 경영주의 운영방침과 성의 부족한 경영관으로 휴교된 지 지금까지 하등의 대책도 세워주지 않으므로 등교하는 회원들의 가슴쓰린 개교 추진을 위한 임원 등이 선출된 것인데 이날 동 회의석상에서 가장 문제의 초점이 되었으며 앞으로 해결하는 문제 중에서 중요한 안은 1. 동 교장 권태성(權泰成) 교장이 동 교 재산으로 되어 있는 과수원을 매각 처분한 거액을 반환시킬 것, 2. 만약 반환치 않을 시는 법정투쟁을 하여서라도 94년(1961) 3월부터는 개교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동창회에서 조직된 임원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 동창회장 김약수, 부회장 이용배, 안봉우, 이사 장형대, 윤병환

◀ 모교 개교 추진위원장 나정봉, 조사위원 이용배, 장형대, 윤병환, 윤봉환, 김교원, 권태상 (충청일보. 1960. 12. 7. 2면 6단)

 

설립자의 이야기와 기사 내용의 이야기는 서로 갈등하는 양상이 있다. ‘경영주의 운영방침’이 농업 전문 학교에 있었던 것과 달리 당시에 충주에서 가장 오래된 중등교육기관인 충주농업고등학교도 모집정원 미달사태가 벌어졌고, 전국의 농업계 고등학교에서 보편적으로 나타난 현상이었다. 학부형측의 인문계 전환 요구를 뒷받침해주는 사회적인 현상으로 읽힌다. 이러한 갈등속에 끌어오던 상황은 그 운영 문제를 제3자에게 인계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들어선다.

 

<충주농기교(忠州農技校), 금춘부터 재개>

 

【충주】 이 고장 유일한 충주농업기술학교는 그간 장기 휴교로 명칭조차 없어질 지경이었는데 동 교의 재단 이사장 임(林炳球, 임병구) 씨가 동 교의 재개교를 꾀하여 이사회를 구성하는 한편 충주시 연수동에 2,000평 부지를 희사하고 3개 교실과 부속건물 등도 3월 28일부터 착공하여 금춘부터 신입생을 모집할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한다. (충청일보. 1961. 3. 31. 2면 2단)

 

초대 충주시의회 의장을 역임했고, 충주공설시장조합장, 합자회사 본정양조장 사장, 충주의용소방대장 등 지역의 유력인사였던 임병구 씨에게 인계되면서 회생의 길로 들어서는 듯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사회변화상을 눈여겨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1960년 3.15부정선거에 따른 제1공화국의 몰락, 이어 4.19의거에 따른 제2공화국의 성립 후의 새로운 분위기에서 권태성과 임병구 두 사람은 친자유당계 인사로 몰려 큰 곤욕에 처했던 상황이었다. 반면 충주 지역은 충주비료공장의 본격적인 가동에 힘입어 공업도시를 자처하던 상황으로 공업(工業)에 대한 피상적인 인식이 다른 지역보다 구체적인 상황이었다. 그런 1961년 상황에서 다시 5.16에 의한 제3공화국의 전개라는 급변에 급변을 가속화하던 시기였다.

 

1년을 지나온 충주농업기술학교 재개교 문제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가 터졌다. 즉,

 

<충주공고 인가>

 

육영사업가 임병구(林炳球) 씨 독지로, 금년엔 건축과만 모집키로

 

【충주】 육영사업의 독지가인 당지 성내동 거주 임병구(林炳球) 씨가 운영하고 있는 한림학원(韓林學園)이 재단법인체의 인가를 받고 충주공업고등학교(忠州工業高等學校) 인가 문제를 문교당국에 상신중에 있던 것인데 지난 16일 문교부에서 정식 인가됨으로 이 지방 신흥공업도시 발전에 크나큰 기대가 되고 있는데 학교 당국에서 탐문한 바에 의하면 동 교에 거축과를 두어 금년도 학생 모집에 있어 우선 100명을 모집하게 된다고 하며 금년중으로 실습공장 설립을 완료할 것이라고 하며 3개 교실 증축도 신입학생을 수용하기에 지장이 없도록 공사가 진행될 것이며 실습용 제도기구 일체와 모형 등이 준비되었다고 하며 3월 20일부터 4월 5일까지 15일간에 걸쳐 학생모집을 할 것이라고 하는데 이 지방 공학도들은 물론 지역적으로 건축과를 둔 공업고등학교는 인근 도에도 없는 것으로 많은 지원자가 쇄도할 것이 예상된다. (충청일보. 1962. 3. 21. 1면 2단)

 

실제로 충주공업고등학교가 개교되었고, 여기에 한림중학교(韓林中學校)가 1962년 5월 5일자로 개교(충주시 통계연보, 1963)하여 중고등학교가 한 세트로 설립되었다.

 

이 즈음에 진행된 것이 1946년에 개교된 충주사범학교의 폐지와 그를 대체하는 개념의 충주공업초급대학의 인가와 설립이 1962년에 동시에 진행되었다. 용산동에 위치했던 충주사범학교 건물과 시설을 그대로 충주공업초급대학의 것으로 삼았다. 이것이 다시 1966년에는 공고 3년 + 전문대 2년 과정으로 통합되면서, 당초 충주공업고등학교는 충주여자상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했고, 한림중학교 역시 충주북여자중학교로 변경하게 되었다.

 

충주농업기술학교는 당시의 특이한 학제중에 고등공민학교(高等公民學校)라는 영역에 속한 학교였다. 이것은 1910년 전후의 수많은 사립학교가 인가를 받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할 시점에 초등교육에 대한 목마름이 존재했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1면 1보통학교라는 학교시설이 확충되었고 해방 후에 쏟아지는 초등 졸업생들의 중학교 수효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동안 존재했다가 사라진 것이 고등공민학교로 1910년대의 사립학교와 같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확인되는 곳이 앙성중학교, 신명중학교, 충주농업기술학교 정도인데, 그 선후관계나 내력이 연혁에 편입된 곳은 신명중학교 밖에 없다. 존재했던 하나의 학교였지만, 그 선후 영향관계를 살펴보며, 그 시기별 학교의 변화과정은 볼수록 낯설기만 하다. 하지만 낯설 수 있는 것만도 다행이란 생각도 든다. 그리고 지역 사회의 교육기관 존폐 현황을 공기관인 교육지원청 정도에서는 제대로 정리해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뉴스
충주사회단체연합회, 가시박 넝쿨 제초작업
1/12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