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충주와 기자(記者)와 기록(記錄)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6:46]

87. 충주와 기자(記者)와 기록(記錄)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6:46]

 

기자(記者)는 존재했지만, 그 기자의 이름이 기사와 함께 올라온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3년 동안 누가 쓴 기사인지도 모르며 충주와 관련한 지난 신문 자료를 정리해 오고 있다. 충주를 검색어로 찾아지는 자료의 첫 기사는 ‘청주ㆍ충주 등 33개 읍의 육군을 한데 모아 점열(點閱)한 후 제방으로 나아가 힘써 제방을 쌓게 하였고’이다. 한성순보(漢城旬報) 1883년 11월 30일자 기사에 충주가 처음 등장한 것이다. 그리고 등장하는 첫 인물은 같은 신문 1884년 2월 27일자에 ‘충주목사 민응식(閔應植)의 상소로’ 시작하는 기사로 실명(實名)의 사람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누가 썼을까? 한성순보나 한성주보는 기관지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각종 공문을 기초해서 기사가 채택됐을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1896년부터 1899년까지 한글 신문으로 등장했던 <독립신문>을 검색해 찾아지는 기사에서도 마찬가지다. ‘몇 월 몇 일 충주의 누가 ○○에 보고하기를’로 시작하는 기사가 대부분이다. 즉 지방에서 중앙정부에 공문으로 보고한 사항들이 모아지고 걸러져서 신문의 기사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또한 1899년부터 검색되는 <황성신문(皇城新聞)> 역시 많은 부분이 관보(官報)에서 선택되어 기사화되고 있다. 1904년부터 검색되는 <대한매일신보>의 경우도 주요 기사 원천이 관보에 의존하지만, 잡보외방통신(雜報外方通信)의 빈도가 훨씬 높아졌다. 그리고 ‘自忠州郡으로 來人의 傳說을 聞한즉(충주군에서 온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들어보니)’라는 식의 기사도 종종 등장해 민간의 소식이 게재되는 빈도가 커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때까지 충주에서 활동하는 기자가 있었는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자료를 찾아 정리하다 보니 신문의 태동기라 할 수 있는 시기에 제국신문(帝國新聞, 1896년 창간), 대동일보(大同日報, ?), 매일신보(每日新報, 1904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등의 주필을 했다는 변일(卞一, 또는 卞榮憲)이 1873년 충주군에서 출생한 인물로 찾아진다. 어쩌면 이 사람이 충주 출신의 첫 기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접어들며 확인되는 충주의 첫 기자는 일본인 금곡아성(金谷雅城)이다. 이는 1916년에 발행된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의 저자이다. 당시에 그는 경성일보(京城日報) 충주지국장 또는 주임 또는 신문기자로 소개되며 내외도서ㆍ신문ㆍ잡지 및 문방구, 그림엽서, 액자 등을 판매하던 상점을 운영했던 인물로 확인된다. 바뀐 세상의 새 주인인 양 충주에서 자리잡는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와 비슷한 역할을 했던 충주로 이주해온 일본인이 하나 더 있다. 1931년에 발간된 <충주관찰지(忠州觀察誌)>의 저자인 오토거천외(奧土居天外)가 그다. 책을 발간할 당시 그의 직업은 오토거고금당(奧土居古今堂)이라는 골동상을 운영했으며, 부산일보사 충주지국을 맡아 운영하고 있었다. 현재 확인되는 충주 관련 신문기사 자료를 보면 <부산일보(釜山日報)>라는 일본인이 발행한 신문에 많은 기사가 보이는데, 이것은 결국 오토거가 충주에 살며 지국을 운영하는 동시에 충주와 관련한 기사를 보냈기 때문에 기록된 것으로 여겨진다.

 

유사한 계통의 책자로 1933년에 발간된 <충주발전사(忠州發展史)>가 있다. 저자는 이영(李英)인데, 이는 당시에 매일신보 충주지국 기자로 활동했다. 이의 본명은 이봉근(李奉根)으로 1920년에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 제12회)를 졸업하고, 1925년에 청주공립사범학교를 마친 후 단양공보, 옥천의 청산공보 교사로 재직하다가 그만두고 기자가 되어 고향인 충주에 돌아와 활동한 인물이다. 자료를 정리해 보니 이영이 매일신보 충주주재 기자로 활동하던 시기에 충주 관련 신문기사가 가장 많다. 이가 기자로 활동할 때에 매일신보 충주지국장을 맡은 이는 이춘웅(李春雄)으로 1930년대부터 충주에서 현금 동원력이 가장 큰 부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오토거나 이영이 충주에서 기자로 활동하며 충주에 대한 단행본을 기록으로 남기던 시기에 외부에서 활동했던 충주 출신으로 여겨지는 기자가 한 사람 있다. 저기 백두산 자락인 함경북도 혜산에서 활동한 동아일보 기자로 양일천(梁一泉)이라는 사람이 찾아진다. 그는 천도교도이며 서울 사람으로 정의되고 있지만, 그가 쓴 신문기사를 면밀히 분석해 보면 충주 달천 사람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의 간도이주민, 백두산 화전민, 백두산 뗏목 벌부 등 일제강점에 의해 땅을 잃고 고향을 떠나 헤매던 사람들의 실태를 현장에서 발로 뛰며 기록한 사람이다. 그리고 이는 1937년 6월에 소위 <보천보 사건>으로 불리며 김일성(金日成)을 역사의 전면으로 끌어낸 기사를 작성한 사람이기도 하다.

 

이 외에 충주에서 활동했던 기자 이름이 조금 더 확인된다. 1925년에 창립된 호서기자단(湖西記者團)이 있다. 이 단체는 매년 순번제로 각 지역을 순회하며 정기총회를 열었는데 1929년 3월에는 충주에서 총회가 개최됐다. 이때 집행위원의 한 사람으로 서상경(徐相庚)이 언급된다. 이는 1900년 생으로 1908년부터 1917년까지 충주군수를 지낸 서회보(徐晦輔)의 장손이다. 1919년 3월 청주농고 재학 시에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일제강점기 내내 험난한 삶을 살았던 인물이다. 1929년 호서기자단 정기총회를 계기로 비밀리에 결사(結社)했던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의 주역인 서천순(徐千淳, 서회보의 차남, 서상경의 삼촌)ㆍ서정기(徐廷夔)와 함께했다. 그리고 그는 1937년 4월 ~ 1938년 8월까지 동아일보 충주지사 기자로 활동하다가 동아일보 본사 식자부로 이직했다.

 

지금의 충주시 출입기자단과 마찬가지로 일제강점기에도 기자단이 있었다.

 

【충주】 충북 충주읍 조고계(操觚界)에서는 일간신문 기자의 상호간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야 지난 10일 오후 8시부터 본보 충주통신부 사무실에서 구도(久島) 조신(朝新), 정(鄭) 조일(朝日), 김(金) 중선(中鮮), 오토거(奧土居) 조민(朝民), 궁보(宮步) 조매(朝每), 중도(中島) 경일(京日), 이(李) 매신(每申) 관계자 일동이 집합하야 재충 신문기자단 발회식을 거행하였는데 위선 단(團) 사무소는 본보 충주통신부에 두기로 하고 단칙(團則) 기초위원으로 조일(朝日) 정진복(鄭鎭福), 중선(中鮮) 김성회(金成會), 조신(朝新) 구도차남(久島次男), 매신(每申) 이영(李英) 씨 등을 선정하고 오후 11시 경에 폐회하였는데 앞으로의 활동이 크게 기대된다. (매일신보. 1935. 5. 14. 3면 11단, <충주 통신부 지난 10일 발회>)

 

기사에 등장하는 각 신문사는 조신(朝新)=조선신보(朝鮮新報), 조일(朝日)=조선일보(朝鮮日報), 중선(中鮮)=중선일보(中鮮日報, 대전에서 발행), 조민(朝民)=조선민보(朝鮮民報, 1934년 11월 창간, 월 2회 조선어 신문 발행), 조매(朝每)=조선매일신보(朝鮮每日申報, 1920년 대구에서) 경일(京日)=경성일보(京城日報), 매신(每申)=매일신보(每日申報)) 등으로 당시에 7개의 신문지사 또는 지국이 충주에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러한 흐름은 이후 지속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1961년 5.16 이후에 해체되었다가 1963년에 다시 조직된 것이 확인된다.

 

【충주】 혁명 후 이때까지 개편을 보지 못하고 있던 충주 신문기자단이 지난 31일 충주시청 회의실에서 신문인총회를 열고 규약을 제정하는 한편 임원을 개선함으로서 발단을 보게 되었다. 혁명 후 해체되었던 관계로 사실상 창단의 형식을 취한 이날 회의에서는 오는 4월 7일 신문의 날을 맞아 발단식을 거행하고 다채로운 행사로 이날을 보낸 것이라는데 각 기관장 유지 다수가 참석해 줄 것을 바라고 있다. 이날 선출된 임원은 다음과 같다.

 

◀ 단장 이원영(조선) ◀ 부단장 류장성(충청), 권인섭(동아) ◀ 간사장 이종호(대한) ◀ 총무간사 장형대(충청) ◀ 취재간사 임대호(서울) ◀ 섭외간사 박봉열(경향) ◀ 감사 정순택(대전), 이용배(매일) (충청일보. 1963. 4. 4. 2면 11단, <충주기자단 발단, 단장에 이원영(李源永) 씨 선출>)

 

신문이 때로는 제4의 권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만큼 신문과 기자에 대한 신망과 믿음은 중요하며, 그 역할 또한 적지 않다. 그것이 시간이 지나며 기록된 모든 것이 역사의 한 장면 장면을 구성하는 실질적인 소재가 되기도 한다. 누가 썼는지도 모르는 신문기사가 이제는 기자 이름을 밝히게 되어 있다. 그만큼 책임감이 막중한데, 과연 지금의 기록은 어떤 상황인가 생각해 볼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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