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충주, 시장(市場)의 변화(1) <5일장과 약령시>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6:47]

88. 충주, 시장(市場)의 변화(1) <5일장과 약령시>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6:47]

 

사람이 살면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할 수는 없다. 그래서 어느 시기부터 필요에 의해 그 규모가 커지며 자연스레 생겨난 것이 시장(市場)이다. 충주에 언제부터 정기시장이 열리게 되었는지 기록을 통해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구체적인 시장의 이름이 보이는, 현재 확인되는 첫 자료가 1872년에 그려진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이다.

 

지도에는 신당장(新堂場)ㆍ한천장(漢川場, 廢)ㆍ용안장(龍安場)ㆍ무극장(無極場)ㆍ내창장(內倉場) 등 5개 정기 시장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신당장은 감물면(甘勿面), 한천장(漢川場)은 소파면(蘇坡面), 용안장은 신석면(新石面), 무극장은 금목면(金目面), 내창장은 엄정면(嚴政面)에서 각각 열리던 장이다. 이 중에 한천장이 섰었다는 소파면은 현재 음성군 소이면 지역이고, 또한 무극장이 선다는 금목면은 현재 음성군 금왕읍 지역이다. 현재의 충주시 지역에 해당되는 것은 신석면(현, 신니면)의 용안장과 엄정면의 내창장, 감물면이라고는 했지만 신당장은 지금의 살미에 속하므로 세 곳이 해당되며, 목(牧)의 중심인 읍내에 읍시(邑市)가 열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현재의 충주시 지역을 기준으로 1870년 경에 최소한 4개의 정기시장이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이후에 충주에서 열렸던 시장의 상황을 가늠할 수 있게 하는 기사가 하나 올라온다.

 

▲ 1906년 충주 관내 7개 시장을 혁파에 대한 기사(자료:대한매일신보. 1906. 8. 4)  

충주관찰사 윤철규씨의 탐도지정(貪饕之政)은 각보(各報)에 누게(屢揭)하였거니와 봉뢰어부민(捧賂於府民)하고 충주 경내 7처 시장(市場)을 혁파하고 이설어부내(移設於府內)에 하니 7처 장시 민상(民商)이 거개탕산환산(擧皆蕩産渙散)하여 원성재로(怨聲載路)하고 상민 등이 장위(將爲) 호원(呼寃) 농부(農部)한다더라.(대한매일신보. 1906년 8월 4일자 2면 2단 <충상환산(忠商渙散)>

 

이 기사의 배경이 된 사건은 1906년 3월 25일에 개교한 사립 돈명학교(敦明學校)와 관련이 있다. 즉 충주관찰사 윤철규는 돈명학교 설립과 관련해 15만냥을 지원했고, 다시 이 학교의 대운동회에도 21만냥을 지원했다고 한다. 또한 돈명학교의 부교장에 아들 윤방현(尹邦鉉)을 앉혔다. 윤 관찰사는 도합 36만냥의 비용을 민간에서 추렴해 내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충주군수를 포함한 충주 지역 38개 면장들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시장 폐쇄라는 강경한 조치를 내리게 된 것이다. 상황이 점점 악화되자 결국 윤철규는 충주관찰사에서 해임됐다. 그의 뒤를 이어서 이 일을 지속 추진한 자가 당시에 충청북도 재무관으로 충주에 있던 사토 도스케(佐藤藤佐)였다.

 

지난번에 전 재무관 좌등(佐藤) 씨는 충주의 시장을 북문 밖 음성가도로 옮기고 읍민들을 권유하여 점포를 짓게 하고 또한 부근의 작은 시장을 금지하도록 하여 모두를 이곳으로 집중시키려고 한 일이 있었다. 이 계획은 반 정도 실행되어 광활한 시장에 수십 채의 점포가 건축되었어도 시황은 생각처럼 성대하게 이루어지지는 못하였으며, 점포를 신축한 사람은 좌등(佐藤) 재무관의 달콤한 말에 속아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되어 죽창을 들고 덤벼들려고 하는 소동까지 일어날 뻔한 일이 있었다.

 

지금 이러한 점포들은 평일에는 반은 폐점 상태로서 모처럼의 좋은 계획도 반신불수의 결과를 초래하는 모양이 되었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충주의 영락은 작은 계획, 작은 경영으로도 결국은 구제하기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청주연혁지(1923), pp.32~33)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점포를 지어 상설시장으로의 전환을 꾀했던 점이다. 이에 앞서 읍시(邑市)가 서문 밖에 개설되었다는 기록도 있지만, 그 장소가 북문 밖으로 옮겨진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 농업이 주업이고 전통적인 5일장에 익숙해 있었던 상황에서 상설시장에 대한 일반의 이용은 낯설기만 했다.

 

윤철규와 사토에 의해 폐쇄된 시장을 가늠할 수 있는 자료가 1909년에 발간된 <한국충청북도일람>이다. 여기에는 ① 읍시(邑市, 5ㆍ10) ② 목계(牧溪, 2ㆍ7) ③ 신당(新唐, 3ㆍ8) ④ 천포(泉浦, 1ㆍ6) ⑤ 대소원(大召院, 4ㆍ9) ⑥ 용원(龍院, 1ㆍ6) ⑦ 내창(內倉, 3ㆍ8) ⑧ 한천(汗川, 1ㆍ6)의 8개로 읍시를 제외한 7처 시장을 혁파해 읍시로 통합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앞서 <충주목지도>에 기록된 신당, 용원, 내창, 한천장이 1909년 상황에서도 보인다. 이외에도 입장장(立場場 : 노은면)에 의병 200여명이 돌입하여 군수전(郡收錢) 출금을 요구하며 시장 사람들을 위협했다는 기록도 있다.(황성신문. 1908년 2월 29일자)

 

이중에 읍시를 기준으로 장날 운집 인원은 500명이고 거래금액은 500원으로 파악해 놓고 있다. 청주읍시의 8,500명에 10,000원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적은 규모이지만, 당시(1908년)의 활발한 의병활동에 의한 불안했던 사회적 여건과 기타 여러 요인들을 고려해 면밀히 살펴보아야 할 부분이다.

 

각 시장의 주요 매매물품으로 파악된 것을 보면, 읍시는 쌀ㆍ보리ㆍ소ㆍ건어물, 목계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신당장은 쌀과 남초(南草)였다고 하는데, 이 때의 담배는 우리에게 익숙한 황색엽연초가 아닌 재래종으로 충주산 담배는 개천초(開天草)라는 이름으로 불렸었다. 천포장의 경우 쌀ㆍ보리ㆍ어물, 대소원장은 쌀ㆍ소ㆍ건어물, 용원장도 마찬가지이다. 내창장은 쌀ㆍ콩류, 염장 어류ㆍ건어물ㆍ소였고, 한천장의 물목도 같다. 거래물목을 보면 읍시ㆍ목계장ㆍ대소원장ㆍ용원장ㆍ내창장ㆍ한천장 등 6개 시장 한켠에 작게나마 우시장이 섰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 외에 특수시장으로 약령시(藥令市)가 있었다. 충주 약령시는 충청북도 관찰부의 존재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1903년부터 신설해 이어오던 충주 약령시는 봄ㆍ가을로 5년간 지속되며 안착됐다. 그러나 1908년에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해 가면서 청주 약령시를 개최하고자 함에 따라 충돌이 생겼다. 5년을 이어오며 또 하나의 특수를 누릴 수 있던 기회를 빼앗기지 않으려고 충주 상인들은 문제를 제기했고, 이에 충북관찰도는 훈령으로 충주 약령시의 존속을 선언했다.

 

관하 충주군 약령을 원래 정한 날짜인 춘령(春令)은 음력 4월 20일(5월 19일), 추령(秋令)은 음력 10월 20일(11월 13일)로 의례 정기 설행하기로 이에 훈령하노니 즉시 일반상민에게 지위(指委)하여 각자 최선을 다해 가까운 기일에 모이게 하여 편리하게 함이 의당한 일이다. 충주군 상민 유응오(劉應五) 등 알림(황성신문. 1908년 11월 6일자 4면 4단 <충주약령광고>)

 

내륙의 중심도시로 육운과 수운이 교차되는 지점에 있던 충주는 땅길과 물길을 따라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중심으로 정기적인 5일장이 여러 곳에 열렸었다. 그러나 이것이 1906년 관찰사의 개인적인 감정이 개입되며 구조적인 변화의 서막이 열렸다. 또한 1908년 관찰부의 청주 이전에 따라 특수시장인 약령시 역시 위협을 받았다. 보부상과 장꾼들을 통해 공급되던 물품들도 철도가 닿는 지역을 중심으로 시장 구조가 재편되면서 충주는 전통적인 명맥은 이어갔으나 그 세는 위축되었다. 또한 다카무라 징이치(高村甚一)처럼 1902년에 충주에 들어와 미곡상을 시작으로 대규모 농업과 상업을 전개해 나가던 일본인들과의 경쟁 역시 시작되었다. 이후 충주의 시장 구조는 이주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그들 개념의 상가가 형성되며 상설시장 중심의 구조로 바뀌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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