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설점포를 통한 시장 구조와 개념의 변화는 1906년에 관찰사 윤철규의 감정 섞인 행정조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조선통감부에서 재무관으로 파견한 사토 도스케와 같은 인물이 존재하며, 일본인들의 이주 정착에 맞는 방향으로의 변화를 시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이 1908년 도청의 청주 이전에 따라 다소 위축되는 면도 보였지만, 1910년이 지나면서 도시구조 변화와 함께 시장구조 또한 급변했다.
특히 급격하면서도 인위적인 변화를 초래한 것이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이다. 1912년 말에 계획을 세워 도면을 완성했고, 그에 따라 1913년 9월에 시작하여 1916년 9월에 완성을 보았다는 시구개정은 충주읍성의 성벽을 허물어 치우고 정방형의 직선도로로 시가지 구조를 완전히 바꿔놓은 사건이었다. 이것은 단순히 공간의 구조변화에 머물지 않는다. 읍내를 중심으로 거주하던 조선인이 1913년 조사에서 2,582명, 1914년 조사에서 2,555명이던 것이, 읍성 철거가 마무리된 시점에서 갑자기 1,000명으로 줄었다. 새로 구획된 도심에서 본래 살던 1,555명의 충주사람이 외곽으로 쫓겨난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인들이 충주에 이주해 오면서 읍성이라는 공간구조와 그들의 강력한 군대에 의해 보호되던 성 안에 상점이 들어서고 주거공간을 확보해 나갔다. 그러나 충주시구개정으로 성벽이 없어지며 신작로가 만들어지면서 그들의 주거공간 자체를 읍내 중심부 전체로 확대했다. 이것은 성벽과 차단되어 있던 공간에 새로운 상점이 들어서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즉 남ㆍ서ㆍ북벽이 없어진 자리에 길을 중심으로 다수의 상점이 문을 열었다. 상대적으로 공간이 좁은 동벽축에는 상권형성이 되지 않았으나, 나머지 공간은 일본인 중심의 상점이 들어서면서 그들의 주거공간 겸 상업공간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성벽 철거 후 쫓겨난 본래 충주사람에게는 일종의 진입장벽이 형성되었던 것 같다. 도심 전체가 일본인 중심 공간으로 변하고 그들 중심의 식민도시로 재편되는 과정에서 상업의 급격한 성장이 있었지만, 일반 충주 사람이 그 공간에 상점을 열어 진입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충주인사(忠州人士)여. 충주는 조선에 유수한 대읍(大邑)이오 도시(都市)이다. 이같은 도시에 우리의 소유가 얼마나 있는가. 전부 일청(日淸) 상인의 손에 돌아가고 우리의 소유는 겨우 11호 밖에 아니 된다. 각 방면으로 낙오된 충주시는 더욱이 경제파멸로 사선상에 방황하면서도 생을 찾는 활동 있기는 고사하고 아직도 오수(午睡)가 몽롱할 뿐이니. 충주인사여. 충주시에 백의인(白衣人)의 생활이 여사히 원래로 희박하였는가. 아니라. 충주성(忠州城)은 전일에 벽와주란(碧瓦朱欄)에 금벽(錦壁) 찬란하던 대읍이며 국원성(國原城) 중원성(中原城) 소경(小京) 예성(蘂城) 감영으로 찬란한 역사를 가지고 부귀번화하던 웅도(雄都)이다. 우리의 선조가 고심으로 전해준 충주의 역사는 우리의 손으로 더럽히며 우리의 선조가 혈흔을 적시어 준 충주의 성시(城市)는 우리의 발로 차버리지 아니하였나.(閔興, <충주시 인사에게>, 동아일보. 1925년 6월 7일자 <자유종>)
이 기록을 보면 1925년 상황에서 읍내에 개설된 100개가 넘는 상점 중에 조선인이 운영하는 것은 겨우 11호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만큼 내쫓기고 빼앗긴 도심으로의 재진입이 쉽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193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 약간 양상이 바뀌기는 하지만, 애초부터 상업 주도권도 빼앗긴 상황에서의 출발이었기 때문에 일제강점기 내내 그 양상은 뒤바뀌지 않았다.
<충주시구개정>을 겪으면서 5일장을 중심으로 발달해온 변화상을 1915년에 발행된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와 1916년에 발행된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합병[1910] 이래, 충주읍에 집단으로 이주하는 내지인[일본인]이 많아져서 혹은 상업에 혹은 농업에 각기 뜻에 따라 부지런히 생활하며 그 세력을 펼치고 있어 군(郡) 당국에서는 시가지의 구획을 다시 바꾸는 등 그 번성을 원조하고 있다. 거주민들은 이곳에 상설점포를 개설하고 차차 그 상권의 확대에 노력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구한국의 전통관습으로 매월 6회의 장날이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의 시장을 늘 돌아들며 장사를 하는 행상인이 있어 고정적으로 설치해 놓은 임시건물에 그 상품을 벌여 놓거나 또는 노점을 펴고 있다.(장기덕 역, <최근의 충주>, 충주MBC, 1992. p. 45.(상업) / 저본, 村上友次郞, <最近之忠州>, 최근지충주편찬소, 1915.)
충주시장은 옛날의 읍성을 꿈꾸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세력은 멀리 제천, 단양, 괴산, 문경의 각 군에 걸쳐 있었고, 1개월에 6회, 5ㆍ10일을 정례개시일로 하고 있다. 거래상품으로 중요한 것은 농산물, 해산물, 직물, 연초, 축류(畜類), 기타 일용잡화 등으로 1회 시장 거래액 20,000원 이상에 달하고 있다. 시장은 대수정 부근에 개설되어 있었으나 시구개정이 시작되었을 때 도로관리상 지장이 막심하여 천정(泉町)으로 이전하였다. 상업세력의 중심은 물론 일본 상인들이었고 연차적으로 발전을 거듭하였다.(정삼철 역, <충주발전지>, 충북발전연구원, 2012. p.35.(상업) / 저본, 金谷雅城, <忠州發展誌>, 금곡상회, 1916.)
이 기록을 보면, <시구개정>이 이주 일본인을 위한 정책적인 조치였고 상설점포 중심의 상설시장으로 변해가는 것도 확인된다. 또한 충주가 충북북부권 및 문경에 이르기까지 광역 상권을 형성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그리고 1906년에 이전 조치한 읍시가 대수정 부근에 개설되었다고 했으니 현재 제1로터리를 중심으로 부민약국으로 통하는 길을 중심으로 열렸었고, 이것이 다시 시구개정에 의해 도로관리상 지장을 초래한다는 이유로 천정으로 이전했다고 했다. 천정은 소위 자유시장통으로 불리는 지역으로 1910년대 초기에 이면도로를 중심으로 열리던 것이 충인ㆍ충의동 지역의 상설점포가 늘며 시가지가 확장되면서 교현천을 중심으로 5일장이 계속해서 밀려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시장의 이전과 관련하여 1912년에 충주에서 약종상을 하던 김종집에 대한 기사도 확인된다.
충청북도 충주읍 신장대(新場垈) 보화당(普和堂) 주인 김종집(金鍾集)씨는 의약(醫藥)에 종사하는 바 … (후략)…(매일신보. 1912년 12월 20일자 2면 7단. <민지 계발에 열혈적 남아>)
‘신장대(新場垈)’는 곧 ‘새 장터’로 해석되는데, 이것은 1906년 이후 옮겨진 시장을 이르는 것으로 시구개정 직전 상황을 반영하는 단서가 된다.
또한 <최근의 충주>에는 1915년 당시의 시장 현황을 적어놓고 있는데, 읍내시(5.10), 대소원시(4.9), 용원시(1.6), 천포시(1.6), 내창시(3.8), 목계시(2.7), 신당시(1.6)로 7개 시장을 기록하고 있다. 물론 장날은 모두 음력을 기준으로 한다. 이러한 시장이 집단적으로 폐쇄된 것이 1919년 3.1운동 상황이다. 즉,
충청북도에서는 소요 사건이래로 각 시장에 폐쇄를 명하여 써 군중이 모이는 것을 막을 방침을 써왔는데 요사이 지방 유지자간에 자제단을 만들고 소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소관 관청에 대하여 개시청원서(開市請願書)를 제출하는 자가 많은즉, 불원에 모든 시장의 개시를 보리라더라.(매일신보. 1919년 4월 20일 3면 5단. <충북의 각 시장, 개시하기를 청원>)
5일장이 생활의 중요한 방편임과 동시에 대규모 사람이 모임으로써 각종 소식 소통의 장소였으며 특별한 사건의 발생장소로서 작용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직접적으로 1919년 용원만세운동의 경우 용원장인 4월 1일(음 3.1)에 있었고, 충주 읍내시의 경우 달천리 천도교도들이 충주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했다고 하는데, 그것이 사실이라면 3월 11일(음, 2.10)이 된다.
이 외에도 신문기사를 통해 몇몇 시장이 추가로 개설되어 열렸던 것을 알 수 있다.
소태면의 덕은리(德隱里)의 덕은리시장은 1925년 2월경에 박무덕(朴戊德, 59) 여사의 시장부지 희사에 힘입어 인가를 얻어 개설했다고 한다.(매일신보. 1927년 2월 11일자 3면 7단. <활기띄운 덕은시장, 박여사의 공로>)
살미면 세성시장(洗星市場)은 1925년 12월에 개시되었다고 한다.(매일신보. 1932년 3월 24일자 3면 5단. <충주 세성시장 허가를 열망>) 충주시장, 황강시장(黃江市場), 수안보시장(水安堡市場)과의 점이지대로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자연 개설된 시장이었는데, 1932년에 가서 허가를 신청한 상황이다.
중앙탑면 가흥리(可興里)의 경우 1927년 음력 2월 12일부터 3일간 가흥시장 확장을 목적으로 별신(別辰)과 각희대회를 열었다고 한다.(매일신보. 1927년 3월 15일자 3면 3단. <충주 가흥시장 확장 각희회>) 수운(水運)의 영향으로 이전부터 장이 열렸던 것인데, 이 시기에 확장을 위한 대규모 행사를 기획했던 것이다.
수안보면 수안보시장(水安堡市場)은 1927년 8월에 1.6일장으로 신설하여, 2개월간 개장기념 행사를 진행하며 열렸다.(매일신보. 1927년 8월 10일자 4면 2단. <수안보시장, 8월부터 신설>) 또한 1936년 2월 1일에는 산척면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여기에는 도수장(屠獸場)까지 신설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용포시장(龍浦市場, 앙성), 신양리시장(新陽里市場, 주덕) 등의 이름이 기사에서 확인된다.
이 외에 특수시장으로 1936년 6월 20일부터 충주읍 금정 일각에 야채시장(野菜市場)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은 상설시장으로 매일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곳으로 도시의 규모 확장에 따라 시장의 세분화를 암시해주고 있다.(매일신보. 1936년 6월 13일 4면 10단. <충주읍 금정에 야채시장 설치>)
이상의 기록을 보면 일제강점기의 시작과 함께 단행된 <시구개정>에 의해 도심을 중심으로 상가를 중심으로 상설시장이 형성되었다. 또한 재래의 5일장은 이전 시기의 명맥을 이어가는 동시에 면 소재지를 중심으로 점진적으로 독립된 장이 형성되었다. 그리고 취급 품목에 따라 싸전(米市場), 우시장(牛市場), 야채시장(野菜市場) 등 특수시장이 형성되며 변화한 것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본 홈피에 게재돼 있는 모든 이미지를 무단도용, 사용이 발각되는 즉시 민형사상 책임을 받게 됩니다. ※ 외부 기고는 충주신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기고문은 원작자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기 위해 가급적 원문 그대로 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
관련기사목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