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환금작물(換金作物) 엽연초,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17]

92. 환금작물(換金作物) 엽연초,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17]

 

대추밤을 돈사야 추석을 차렸다.

이십리길을 걸어 열하루장을 보러 떠나는 새벽

막내딸 이뿐이는 대추를 안준다고 울었다

송편같은 반달이 싸리문위에 돋고

건너편 성황당 사시나무 그림자가 무시무시한 저녁

나귀방울에 지껄이는 소리가

고개를 넘어 가까워지면

이뿐이보다 삽살개가 먼저 마중을 나갔다.

(노천명, <장날>)

 

황금작물(黃金作物)로 잘못 읽히거나 불리는 단어가 환금작물(換金作物)이다. 환금(換金)이라 하면 금으로 바꾼다는 말이지만, 그 ‘금’은 곧 ‘돈’이다. 시(詩)의 첫머리 ‘대추밤을 돈사야’라는 것은 대추와 밤을 팔아 돈으로 바꾸고, 그 돈을 가지고 추석에 필요한 물건을 산다는 의미다. 그것이 곧 환금(換金)이고 그것이 가능하게끔 하는, 돈되는 농산물이 곧 환금작물(換金作物)이다. 20세기 충주에 가장 대표적인 환금작물은 담배, 즉 엽연초(葉煙草)였다.

 

▲ 충주시 단월동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 구내에 있는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 

 

충주시 단월동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정문을 지나 처음 만나는 건물이 ‘충주엽연초생산협동조합(KTGO)’이다. 이 조합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두 개의 비가 서있다. 먼저 보이는 것은 2011년에 세운 ‘황색연초경작 100주년 기념비’이고, 그 옆에 안쪽에 서 있는 것이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이다. 그것을 보고 있노라면 만감이 교차된다. 심지어 아무 생각없이 세워놓은 위정자들의 한심함에 개탄하기도 한다.

 

무슨 얘기인고 허니, 25주년은 시정(始政) 25년을 의미한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탄하고 그들의 식민지로 만든 25주년이 되는 1935년을 기준한다. 전국적으로 천황의 은혜에 힘입어 조선이 이만큼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하기 위한 사업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그런 와중에 충주는 공교롭게도 1912년에 본격적인 재배를 시작한 미국산 황색엽연초가 자리잡아 대충 25주년이 되는 해가 바로 1936년이었다.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이 바로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였다. 그런 내력을 모르면서 무조건 100년이라는 숫자에 2011년에 스스로 세운 것이 100주년 기념비였다.

 

그 시정(始政) 25주년의 의미를 당시 충주군수 전석영(全錫泳)은 충주의 각 읍면장 회의석상에서 이렇게 열변하고 있다.

 

본부[조선총독부]에 있어서는 작년[1935] 10월 1일 시정(始政) 25주년을 영(迎)하여 기념의 식전을 거행하여서 통치사상의 일 획기를 짓는 대취지를 천하에 선(宣)하고 과거 25개년의 사적(事績)을 명(明)케 하는 동시에 기 장래의 이상을 들어 강내(疆內) 아등 관민의 심기일신을 촉(促)하였던 것이다. 근히 4반세기 간에 조선의 산업, 교육, 토목, 운수, 교통, 통신, 위생 등 각반의 제도 문물의 경이적 약진을 수(遂)하여 내외로 하여금 경탄케 하여 계림(鷄林) 전도(全道)에 만장의 광채를 방(放)하였음은 공구무지(恐懼無至)한 바이며 아(我) 황실의 어(御) 인자(仁慈)가 그렇게 한 소이(所以)인 동시에 우(又) 역대 당국자의 고심 경영과 국민의 분투노력에 기인한 바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등 관민은 차(此)를 가지고 만족치 말고 조선 반도의 참된 발전은 영(寧)히 금후의 4반기에 사(俟)치 않으면 아니될 바로서 갱히 일층의 노력을 가지고 반도문화의 진전에 용왕매진(勇往邁進), 길거면려(拮据勉勵)하지 않으면 아니 될 것이다.(매일신보. 1936. 1. 23. 3면 2단. <군 행정의 전선(前線)에서 길거(拮拒) 면려를 요망> 중에서)

 

이런 전제 하에서 1936년 2월에 충주, 제천, 음성, 괴산 등 황색연초를 재배하는 지역 조합원을 중심으로 <황색연초 25주 기념 협찬회>가 조직되고 대대적인 기념식 준비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4월 29일 오후 1시부터 기념비를 세울 장소에서 지진제(地鎭祭)라는 것을 열어, 터를 누르는 행사를 가졌다. 그곳은 역대로 토지신을 모신 사단(社壇)과 곡물신을 모신 직단(稷壇)이 있던 충주의 핵심 공간인 사직산(社稷山)이다. 그러나 을사늑약 이후에 충북의 수부(首府)였던 충주에 일본인이 들어오면서 사단에는 신사(神社)를, 직단에는 러일전쟁 전승 기념비를 세워 핵심공간을 파괴해 갔다. 그런 장소에 다시 천황의 은덕에 의해 새로운 정치가 행해진 일제 강점을 기념한 기념물인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를 세울 터를 누른 것이다.

 

협찬회 구성에 있어 단위 부서를 보면, 회장, 부회장, 상담역, 행사취체계, 여관방문계, 갹금모집계, 점두장식(店頭裝飾) 심사원, 가장(假裝) 심사원, 연예계, 연화계(煙火係), 무대계, 토산품 준비위원, 참고관계, 전화계, 생화계 등 당시의 충주시내 전체를 화려한 축제의 장으로 준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충주상업조합에서는 10월 12일부터 5일간을 경품 대매출 기간으로 정하고 분위기 진작에 들어갔다. 그 당시의 행사 일정은 다음과 같다.

 

10월 15일 각희대회, 연화

10월 16일 기념식, 제막식, 예제, 전야제, 생화회(生花會), 분재회(盆栽會), 가장행렬, 각 구 출연 여흥, 예계 기생 수무용(手舞踊), 농악

10월 17일 예제, 준어여봉납(樽御輿奉納) 각희, 가장행렬 상품수여, 점두장식 상품 수여

10월 18일 개인가장, 연예(演藝)

 

그리고 드디어 1936년 10월 16일 오전 11시부터 충주신사 경내에 6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이 진행되었다. 특히 그 자리에는 충주 황색연초 시험재배와 보급에 힘썼고 초대 전매충주출장소 소장을 역임한 오카다(岡田虎輔)도 참석해 그 의미를 더했다. 신사에서의 기념식을 마치고 드디어 <황색연초경작 25주년 기념비> 제막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시각이 오후 2시 10분이었다. 식이 끝나고 그들은 노송고송(老松古松)이 울창한 사직산에 마련된 별석에서 화려한 축하연을 가지기도 했다.

 

그렇게 사직산에 섰던 25주년 기념비는 뒤에 용산동으로 다시 노루목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단월동에 옮겨져 100주년 기념비와 나란히 서 있다. 환금작물임에는 틀림없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의 역사상에서 어떻게 읽혀야 할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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