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 충주 씨름 얘기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20]

93. 충주 씨름 얘기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20]

 

지난 주 목요일, 그러니까 11월 1일에 읍성 답사팀을 안내했다. 그 와중에 충인동 현대상가 즈음에 갔을 때에 졸라서 스스로 말씀하시게끔 한 일이 있다. 1960년대 장이 열리고, 특히나 백중(伯仲)에 열렸던 씨름에 관한 직접 참가자의 얘기였다. 보통 씨름을 애씨름(또는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으로 나눠 부른다. 올라갈수록 어른들의 경기로 거기에는 황소가 한 마리 부상으로 걸렸었다.

 

애기씨름에 참가했던 이의 말에 의하면, 1960년대에 백중 잔치가 연사흘 열렸었고, 거기에 초등학생인 자신도 친구들과 사전 모의를 통해 참가했었다고 한다. 연 세 판을 겨뤄서 이기면 공책, 연필 등 학용품을 부상으로 주었단다. 그 과정에 모종의 작전이 존재했었나 보다. 본격적인 어른들 씨름판이 열리기 전에 오프닝 경기 쯤으로 열렸던 것이 애기씨름이다. 꼬맹이들의 귀엽고 얄팡진 그 앙증맞은 씨름이 웃음을 주며, 씨름판이 곧 벌어질 거라는 예고탄 격으로 재미를 부추기며 열렸다. 세 판을 겨뤄서 이기는 사람에게 상품을 주었단다. 그러니, 아이들도 꾀가 나서 서로 짜고 미리 오늘은 니가 이겨, 오늘은 내가 이길게 등등 짜여진 작전에 의해 친구들 모두가 그 학용품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옛 문헌을 보면 씨름의 고급진 한자 말이 각희(脚戱)이다. 씨름대회의 으뜸은 ‘호멩이도 뒷짐 짓고 쉰다’는 백중 씨름이다. 세칭 머슴날이라고 하는 그 때는 축제였다. 그 축제의 우듬지가 바로 씨름이었다.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으로 이어지는 그 쟁탈전의 쟁탈 품목은 당연 황소였다. 그런 씨름판의 모습이 여러 장면 일제 강점기 신문 기사에 등장한다.

 

첫 기사로 등장하는 것이 1925년 9월 1일부터 5일간 열렸던 각희대회(脚戱大會)이다. 충주읍 미시장(米市場), 즉 싸전에서 열렸던 씨름대회에는 답승(踏繩), 즉 줄타기 놀이와 구파극(舊派劇), 신파극도 아닌 구파극이니 어쩌면 소리판이나 광대놀음이 열렸던 것 같다. 이때의 상품은 1등에 35원 이상되는 소 한 마리, 2등은 20원 이상되는 소 한 마리, 3등는 고의(袴衣), 즉 옷 한 벌과 양말, 조끼 각 1벌씩, 등외 상품으로 연필 잡기장 등이라고 소개하고 있다.(시대일보. 1925. 9. 2. 3면 9단 <운동계 = 충주에 각희(脚戱)>

 

이 외에도 잡업 품평회나 연초 품평회 등 지금으로 얘기하면 농산물 품평회가 열릴 때에도 빠짐없이 등장하는 흥행 종목이 각희대회였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씨름을 잘 해서 출세하는 사람도 생겼다. 1935년에 등장하는 청주 각희대회 얘기에는 평양 숭실중학교를 4년 다닌 유상석(劉相奭, 23)이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그는 무슨 연유에서인지 청주에 와서 인근에서 열리는 각종 씨름대회에 출전하여 1등을 독점하였다고 한다. 그 무명(武名)이 출중하니 여기에 눈독을 들인 곳이 바로 충청북도 경찰부였고, 들어보니 이는 유도도 상당히 잘하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결과 그는 1935년 8월 20일에 경찰로 특채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찾아보니 충주에도 대단한 씨름꾼이 있었다.

 

【충주】 충북 충주읍에서는 각 상업가 주최로 지난 음 7월 14일부터 3일간 각희대회를 열었는데 상씨름 최후 결승의 주인공은 충주 금정(錦町) 41번지 안성출(安聖出)이라는 25세의 청년으로 36원 가치의 농우 한 마리를 수상하였는데, 동안 군은 금년 추기 이후로 부근 각지에서 열린 각희대회에서 얻어온 상품만 벌써 농우 일곱 마리나 된다 하며, 또 자전거도 한 대를 받게 되었는데, 18세부터 씨름꾼으로 다녀서 금년까지 8년 동안에 받은 상이 농우가 100여 마리 광당목 수십여 필에 달하여 백전백승의 씨름꾼이라 한다.(동아일보. 1930. 9. 14. 3면, <씨름 이겨 탄 소가 8년간 100여필, 그 외 광당목도 수십필, 25세의 씨름 장군>)

 

8년간 우승 상품으로 받은 소가 100여 필이면, 연평균 12마리를 탔다는 얘기다. 달리 말하면 충주를 중심으로 인근 면지역까지 열린 씨름판이 엄청나게 많았다는 얘기다. 가는 곳마다 우승을 하니 그에 대한 별명이 ‘씨름장군’이라 불릴 정도였다. 당시에는 연령대로 나뉘어 씨름판을 벌였으니 지금과 같은 체급별 경쟁이 아니었다. 그 기술이 얼마만큼 이었는지는 상상해보아도 대단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이와 남매가 될 만한 이름이 하나 등장한다.

 

시내 계동 2번지 46호 정상희(鄭商熙)의 처 안갑출(安甲出)(26)은 지난 29일 밤에 한강에 나아가 투신자살한 바, 동 시체가 4일 한강 하류 지도면(知道面) 행주리(幸州里) 강변에 표착한 것을 발견하고 소관 서대문서로부터 본가에 인도하였는데 자살 원인은 갓 낳은 아들의 죽음을 비관하고 그리한 것이라더라.(동아일보. 1929. 7. 7. 3면, <인처자살(人妻自殺)>

 

기사의 주인공은 안갑출(安甲出)이라는 여인이다. 그의 남편은 정상희(鄭商熙)이다. 신세계 이마트의 창업주이고, 노은이 고향이며, 노은초 1회 졸업생으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해 권태하와 함께 손기정과 남승룡의 마라톤 우승과 3위에 역할했던 인물이다. 지금은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해 안성출의 제적부를 떼어 볼 수 없다. 과거 10여년 전만해도 정상희의 제적부를 떼어볼 수 있어서 위의 기사와 관련된 사항이 그의 제적부에 기록돼 있었던 것을 기억한다. 안성출(安聖出)과 안갑출(安甲出), 이들의 이름자에서 남매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곁가지로 나간 얘기지만, 무엇 하나 소홀히 보지 않고 눈여겨 보면 충주의 지난 일들에서 사람과 사람이 얽히고 설킨 사연이 너무나 애달프다.

 

좌우간, 씨름은 단오에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백중(伯仲) 씨름이 그야말로 백미였다. 각종 행사의 단골 이벤트로 자리했던 씨름이 충주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충주도 그 못잖게 씨름이 성행했었던 것은 확인된다. 다만, 1936년 이후, 즉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키며 2차 세계대전의 소용돌이 속으로 편입되면서 조선에서 행해지던 모든 것들, 심지어 한글 교육까지 폐지한 상황이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우리가 열고 싶어도 열지 못했던 것 중의 하나가 씨름대회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특히나 소를 상품으로 걸던 그것은 단지 일확천금을 노린 것이 아니고, 농사를 주업으로 하던 시절에 소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던가 하는 점을 상기시켜주기도 한다. 애기씨름, 중씨름, 상씨름으로 이어진 그 상황을 지금의 여느 행사에서도 차용해 본다면 보다 재미진 일이 되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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