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運動場) : 체육을 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큰 마당.
사전에는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얼마 전 충주공설운동장 활용에 관한 공청회가 있었다. 그 결과는 어떻게든 매듭짓겠지만, 그러고 보니 충주에 운동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얘기를 꺼내고 싶다.
운동장은 군대에서는 연병장(練兵場)이라고 한다. 충주에 가장 너른 공간의 운동장 개념은 군사적 목적에서 닦아놓은 터에서 시작된다. 물론 무학당(武學堂)을 중심으로 예부터 있었던 공간이 있었겠으나 그 위치나 규모는 알지 못한다. 군사적 목적에 의한 첫 연병장은 문화동 옛 충주역 광장이 이에 해당된다.
1905년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일본군, 당시의 조선주차군(朝鮮駐箚軍)의 주둔지로 도청이 있던 충주는 중요했다. 읍성 내의 각 관공서 건물이 그들의 숙소로 뒤바뀌어 정상적인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대규모 작전이 벌어질 때에 지역의 거점으로 활용되며 그들이 임시로 텐트를 치거나 하며 머물 수 있는 공간을 만들었는데, 그곳이 바로 옛 충주역 광장이다.
이 곳을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몇 가지 있다.
우선 1907년 6월 15일에 열린 사립 돈명학교(敦明學校)와 충주공립보통학교 간의 춘기 연합 대운동회 장소가 ‘읍저(邑底) 망현(望峴)’이라고 했다. 대략의 위치를 설명한 것으로 일본군이 닦아놓은 연병장을 의미한다. 그리고 1916년 10월 8일에 충주신사 추계 제전 후속행사로 ‘연병장에서 아동의 운동회와 유술(柔術), 격검(擊劍), 각력(角力) 등의 여흥’이 있었다고 한다. 1920년 8월 1일에는 충주의 삼우구락부(三友俱樂部) 주최 축구대회가 충주수비대 연병장에서 열렸다. 또한 1924년 4월 20일에는 매일신보 충북지국이 주최한 충북 방문 비행에서 비행기 착륙장으로 ‘전일 육군연병장’이 확정되어 비행기가 처음 내려앉은 곳이기도 하다. 1935년 10월 20일에는 충주읍의 일반 유지들의 발기로 시민대운동회를 ‘충주역 동측 광장’에서 개최했고, 10월 27일에는 제1회 충주군 연합청년단 발회식이 같은 공간에서 열리며 분열행진, 연합체조, 단가합창 등이 이루어졌다.
이처럼 많은 사람이 한 곳에 모여 대규모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충주의 첫 운동장은 일본군의 조선침략과 그에 따른 지방 도시의 점령상황에서 만들어진 연병장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1907년 후반기에 시작해 1908년 2월에 완공된 충주공립보통학교 교사 신축공사에 연당(蓮塘)과 방지(方池)를 메우고, 방지 자리에는 6칸 교실과, 직원실 2칸을 만들었고, 연당 자리는 학교 운동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학교와 관련한 운동장이 처음 생긴 것이다. 그리고 1910년대 들어서며 일본인학교였던 심상소학교가 예성공원 자리에 들어서면서 규모는 작지만 나름의 운동장이 하나 더 만들어졌다. 이후 1932년 9월 1일에 현재의 교현초등학교 자리로 보통학교가 새로 지어 옮김으로써 너른 학교 운동장을 갖게 되었다. 이 운동장은 다목적으로 활용되었다. 학교 운영에 따른 학생들의 체육활동 공간은 기본이요, 지역의 크고 작은 행사가 치러지는 그야말로 공설운동장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나아가 충주비료공장 입지가 결정되기까지 현장 조사를 나오거나 시찰을 오는 중앙 관료들이 헬기를 타고 올 때에 헬기 착륙장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또한 각종 선거 등의 정치행사가 있을 때에 합동연설회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 곧 교현초 운동장이기도 했다.
충주에 처음 공설운동장 개념이 등장하는 때가 1940년이다.
【충주】 누보 = 충주중학교는 제반 준비가 책책 진행중인 바 저간 교사만 건축되면 그 완성을 볼 터인데 기지 물색이 최종의 난관으로 각 방면의 주목을 모고 있는 중인데 금월 17일엔 유만겸(兪萬兼) 지사가 약사사(藥師寺, 야쿠시지) 학무과장과 토목기사 등을 대동하고 충주에 출장하여 지방 물론과 형편을 관찰하매 지리상 경제상 교육상 지방발전상 면목상 여러 가지를 참작하야 최적합지를 물색 중인데 후보지로 지목되는 남산소학교 부근, 본정 소학교 뒤, 도립의원 뒤 산록, 칠금리 4개소인데 충주 관민으로 결정권을 유지사에게 일임하였는데 유지사의 복안이 과시 어디로 정할는지가 주목처이다.(동아일보. 1940. 2. 21. 조간 3면, <유지사, 학무과장을 대동 충주중학 기지 물색>)
남산소학교 부근은 현재의 충주중학교 자리이고, 본정소학교 뒤는 현재의 충주여자중학교 자리이다. 도립의원 뒤 산록은 현재의 남한강초등학교 자리로 충중이 개교한 이후에 세 곳은 학교가 세워지며 운동장이 자리했다. 다만 칠금리는 능바우 부근을 얘기한 것인데, 그곳만 학교가 들어서지 못했다. 그런데 남한강초등학교 자리는,
【충주】 충북 충주는 금춘 이래로 중학 기성을 비롯하여 가지가지 공공사업에 열성이 있다함은 누보한 바어니와 금번에는 지난 9일 충주읍 용산리 549 이천유(李天裕, 25) 씨는 충주중학기성회에 3,000원을 희사하였다는데 동 씨는 그다지 넉넉지도 않은 재산을 그와같이 희사하였다고 일반은 칭찬하며, 동 읍 대수정 46 염전정개(鹽田禎介, 65) 씨는 15,000원으로 현안 중이던 충주공설운동장을 신설하기로 하고 충주신사 앞에 부지까지 매수하여 늦어도 금년 추기까지는 완성할 예정이라 한다.(동아일보. 1939. 4. 13. 조간 3면. <충주중학에 3,000원, 염전 씨는 운동장 설비>)
일본인들이 충주에 이주해 오며 우선적으로 사직산을 그들의 신사로 삼았고, 각종 시설과 정신적 중심 공간으로 삼았었다. 그리고 1939년에 가서는 신사 앞에 그들의 또 다른 공간으로 공설운동장을 만들 계획을 세웠었다. 그곳이 지금의 남한강초등학교 자리이다. 하지만 이 계획은 2차대전의 확산에 따른 전쟁 상황에서 여의치 못하고 미뤄지다가 해방이 되었고, 1965년에 남한강초등학교가 개교하며 학교 및 운동장으로 활용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대중행사 장소로 교현초 운동장이 주로 이용되다가 해방 후에 충주사범학교가 만들어지면서 용산동의 충주공고 자리에 대형 운동장이 조성되었다. 따라서 접근성이 좋은 사범학교 운동장 역시 많이 이용되던 곳이다.
그러다가 1968년에 현재의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졌다. 이것이 1979년에 전국소년체전을 준비하며 스탠드를 높이는 등 대규모 시설 보수가 이루어졌다. 그리고 2003년에 또한번 대대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운동장의 공간 활용과 변천 과정을 보면 대중성, 접근성 등의 요소가 우선 고려되었다. 물론 공익성이라는 부분도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현재의 공설운동장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는 모르겠으나 지난 100년간의 공간 활용과 변화도 참고해볼만한 일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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