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다가오면서 동네에는 두 학교의 운명에 대한 의견이 분분한 것 같다. 일방에서는 이미 결정한 것이고, 일방에서는 주민의 의견을 제대로 듣지 않고 누구 맘대로 학교를 옮기느냐 하는 문제이다. 대상이 되는 곳은 남한강초등학교와 예성초등학교이다.
이러한 현상을 보면서, 충주지역의 학교 설립 과정의 험난했던 옛 모습을 돌이켜보지 않을 수 없다. 먼저 충주에는 근대 교육의 첫 점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인 충주교현초등학교가 있다. 1895년 <소학교령>에 의해 지방 주요 도시, 특히 충주부 관찰부가 있었던 충주는 그 시범학교 설립 대상지였다. 그래서 생겨난 것이 <충주공립소학교>였고, 이것을 증명한 것이 1896년 1월 29일자로 발령해 부임한 첫 선생 황한동(黃漢東)에게서 찾아졌다. 이를 근거로 충주교현초등학교가 100주년을 맞은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학교의 연혁은 이전까지 1905년에 기점을 두고 있었다. 조선을 식민지화한 일제에 의해 조작된 연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모든 것을 그들의 공(功)으로 돌려 시작하려했던 꼼수가 우리도 모르게 지나간 시간 속에서 잊힌 결과 그렇게 상식화되었었다.
이후 1910년을 전후해 이름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진 무수한 사립학교가 존재했었다. 그 중에 유일하게 연혁을 되짚어 그 존재를 복구해 놓은 곳이 엄정초등학교이다. 1945년 이전에 설립된 충주의 초등학교는 교현초(1896) → 엄정초(1908) → 대소원(1919) → 노은(1920) → 용원(1921) → 수안보(1921) → 금가(1923) → 앙성(1926) → 살미(1929) → 소태(1930) → 동량(1931) → 산척(1932) → 가금(1933) → 주덕(1934) → 강천(1934) → 매현(1935) → 세성(1936) → 하천(1936) → 야동(1937) → 남산(1937) → 가흥(1939) → 추평(1940) → 원월(1940) 등 21개였다. 1면 1개 보통학교 설치라는 일제의 교육정책에 의해 1934년까지 완료되었고, 강천, 매현, 세성, 하천, 야동은 각각 해당 면소재지의 보통학교의 부설 형태의 간이학교로 시작하여 독립 초등학교가 된 경우이다. 그리고 남산초등학교는 읍내지역의 인구 팽창에 따라 학교가 부족한 이유로 제2공립보통학교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곳이기도 하다.
이 중에는 벌써 폐교된 곳도 몇 있다. 살미, 하천이 그렇고, 야동이 소태초 야동분교로 존치되다가 올해 초에 폐교되었다.
교현초를 제외한 나머지 학교는 모두 같은 아픔을 가지고 있다. 인가를 내고자 해도 일제는 학교 설립 인가를 해주지 않았다. 그 선행 조건이 학교 부지를 제공해야 하고, 일정 경비를 부담해야 했다. 그것이 가능한 학교부터 인가된 경우로, 그것이 마치 하나의 공식처럼 자리했다. 그러나 각 면 단위에 학교를 세우고자 했던 지역민들의 염원은 단순하면서도 일제의 그것과는 달랐다. 식민치하이지만 세상이 변했다. 변한 세상에서는 배우지 않으면 사람구실을 못한다. 그러니 돈이 많던 적던 상관없이 누구나 다 자기 자식을 교육시키려는 열망 하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좀 넉넉한 집안에서는 학교 부지를 희사하거나 건립 기금을 내놓으며 지역의 2세들을 교육시키고자 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은 학교 건축과 운동장 조성에 몸으로 나서 제 몫을 해가며 학교를 만들어냈다. 그것이 식민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한, 자식을 살리기 위한 부모의 마음이었다.
중학교를 만들 때도 마찬가지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국원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꾸며 인문계로 전환된 충주농고. 이 학교의 설립을 위한 지역에서의 청원은 1919년부터라고 한다. 구체적인 자료가 1923년 12월에 도의회에서 설립청원에 관한 취지설명부터 보이기 시작한다. 1930년에 개교했으니 꼬박 10년이 걸린 일이었다.
충북 충주군에서는 충북의 중심지 되는 충주에 실업학교(實業學校)가 없는 것을 크게 유감으로 생각하고 당지 유지 모모씨의 발기로 연래 의론이 비등하여 오던 바, 유지비(維持費)에 대하여는 본도 도평의원 원구(原口) 씨로부터 작년도에 본도 기야(磯野) 내부부장에 의뢰하여 동 학교 유지비의 3분의 1은 지방비에서 보조하기로 확실 승낙을 듣고 유지비 3분의 2를 충주군 일원에서 판비하기로 하였더니. 지금 와서 기야 내무부장 의사가 돌변되어 유지비 3분의 1까지는 지방비에서 줄 수 없다 함으로 전기 원구 평의원은 내무부장의 무성의함을 분개하여 도평의원까지 사임하였다 하며, 동 충주군에서는 여론이 자자하다더라.【청주】(동아일보. 1927. 10. 23. 5면 1단. <내무부장 태도 표변>)
일본인까지도 도의 행정 태도에 분개할 정도로 학교설립 비용에 대한 집요한 요구는 일관된 것이었다. 결국 설립에 필요한 학교부지와 유지비를 민간에서 마련하여 제공했다. 그 뒤 1940년에 개교한 충주중학교도 마찬가지였다. 끈질긴 설립 요구에 만반의 조건을 갖추었을 때에 일제의 필요에 의해 겨우 인가 내주는 척하며 그렇게 학교를 인가해 주었다. 다만, 충주여중의 경우는 1940년에 일제에 의해 먼저 설립계획이 세워졌고, 1942년에 개교되었다. 하지만 설립 자금에 관한 경우는 지역에서 모금하여 내놓아야 했던 것은 똑같다.
그렇게 한 결과 모든 학교 연혁의 시작이 일제에 의한 설립인가 일자부터 시작됐던 것이다.
해방 후에 제일 먼저 새로 지어진 학교가 삼원초등학교였다. 이 학교를 모태로 도시가 팽창하며 주거공간이 넓혀지며 배태되어 분가한 학교가 남한강초등학교였다. 당시의 역전동 봉방동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던 학군이 1960년대에 시청이 옮겨가고 일대가 개발되면서 사직산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학군이 형성되며 만들어진 학교였다. 그것이 지금은 이름을 그대로 가지고 호암택지 지구로 옮긴다는 얘기다.
예성초의 경우는 경우가 조금 다르다. 이미 1911년부터 설립되어 운영되던 충주공립심상소학교라는 일본인 학교가 있었다. 그것의 위치는 예성공원 자리다. 해방 후에 그 학교는 자연 폐교되었지만, 학교 공간은 새로 활용되었다. 해방 후에 한글 교육을 비롯한 초등교육에 대한 급박함에서 충주사범학교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그 부설초등학교로 예전 심상소학교 공간이 활용되었다. 충주사범학교가 1960년대 들어서 폐지되고 부설초등학교는 예성초등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당시에 가장 고급한 학교였던 그곳이 평준화되면서 교현초와 같은 학군내에 존재하게 되었다. 그래서 야현으로 옮겨가 새로 학교를 짓고 그 일대를 학군으로 하며 성장해 왔다.
두 학교를 보면 설립 당시 여건이 1970년대를 앞둔 개발시대였다. 공교롭게도 당시에 교현아파트, 호암아파트 등 인구 밀집형 주거시설이 인근에 들어서면서 취학인구가 급속도로 늘었었다. 당연한 경우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 반대 현상에 부딪혔다. 외곽으로 신규 아파트 단지가 늘어가면서 그들 주변에 초등학교 중학교가 하나씩 늘어갔다. 어지간한 아파트 하나 끼지 않고는 취학연령의 아이가 태부족이 된 상황이다. 그러한 문제가 지금 이 두 학교에 국한된 것은 아닐 것이다.
복합적인 그러면서 필요에 의해 순차적으로 팽창해가던 도시가 어느 시기부터 계획에 의해 신규 단지가 개발되고, 계획에 의해 관공서가 집단 이주하고, 계획에 의해 도매시장이 외곽으로 나앉게 되었다. 그리고 구도심은 공동화되어 주변의 거주 인구조차 적어져 취학인구 감소에 따른 학교 존폐 문제까지 야기되었다.
인구정책의 문제만은 아닐 것이다. 학교정책의 문제도 아닐 것이다. 인간 생활의 기본 공간이 특정한 집의 형태에만 머무는 것이 아닌 이상, 도시의 전체적인 설계 내지 계획의 허점이 이제 서서히 큰 문제로 나타나고 있다. 공간의 크기로만 보아서는 절대로 학교가 하나 존재해야할 그런 곳에서 취학 인구의 감소, 즉 사람이 사는 아파트가 적어서 학교 갈 아이들이 부족한 현상은 도시만의 문제는 아니다. 이미 부설학교로 분교로 시작되었다가 다시 독립학교로, 제2, 제3의 분교가 있었던 면지역은 그나마 아직 면 단위로 한 개의 초등학교는 유지하고 있다. 합치기에는 지역적 공간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최소 1개는 남겨두어야 할 상황이다.
답이 있는가? 그렇다고 지금 이 현상이 바람직한가? 아니면 대세가 그러니 그렇게 따라야 하는 문제인가? 만약에 교현초등학교 인근의 학군에서 취학 인구가 절대 부족하여 문을 닫아야만 하는 지경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지난 100년 사이에 변해온 학교의 설립과 확장, 폐교와 이전 등에 관한 구체적인 그림을 들여다보면, 문제의 원인과 대안이 조금은 보일 것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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