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참 많이 더웠다. 그 더위에 선풍기 하나로 맞서며 잔망스런 생각이 많았다. 그 중에 하나가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를 번역하자는 것이었다. 1869년 3월부터 12월까지 새로 고쳐지은 충주읍성과 그 안의 여러 건물들. 더구나 동헌(東軒)으로 사용된 청녕헌(淸寧軒)은 이듬해 불이 났다. 그것을 수리하기 위해 남산 뒷골짝의 창룡사(倉龍寺) 법당을 헐어 기와며 기둥이며를 가져다 썼다. 그리고 1871년,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따른 일련의 조치들이 있은 후에 전국 군현(郡縣)의 지도를 그려 올리게 했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것이 충주목지도다.
서울대규장각에 충청도지도첩의 하나로 존재하는 충주목지도는 1990년대 중반에 사진을 찍어와 크게 인쇄하여 각 기관 단체에 액자로 만들어 걸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지금은 색이 바래고 하여 잘 보이지 않는다. 더구나 그냥 보기에 조선시대 수묵화처럼 예쁜 그림이긴 하지만, 막상 그것을 읽고자 할 때는 순한자로 씌어있고 화질이 좋지 않아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 지도를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부분부분 찾아보다가 지난 여름 더위에 작정하고 번역해 보기로 했다.
군사적 목적에 의해 만들어진 지도이기 때문에 주요 산과 길, 물길, 각 면의 인구, 호수, 역(驛), 참(站), 점(店), 사창(社倉), 나루[津], 봉대(烽臺) 등이 기본적으로 표시되어 있다. 당시의 충주 관할 38개 면(面)이 표시되어 있고, 읍치 즉 충주읍성 북문으로부터의 거리와 호수, 남녀 인구수를 공통적으로 기록해 두었다. 아직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황이므로 충주의 범위가 가장 큰 시기의 기록이기도 하다. 또한 일제에 의해 변형된 각 면의 이름의 원형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총 호구는 18,124호(戶)이고 남자 25,099명, 여자 19,813명, 합계 44,903명이 조사되어 있다. 이 기록은 1870년에 쓰인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충주 부분과 일치한다. 인구의 기준은 당시에 보통 80,000명 이상을 이야기하던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지, 그 기준에 대해서는 다시 조사해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러한 기록 외에 읍성을 중심으로 한 관아(官衙)와 공해(公廨) 등의 건물과 이름이 자세히 기록돼 있다. 물론 새로 고쳐지은 충주읍성에 관한 사항도 ‘동치(同治) 8년 기사(己巳: 1869, 고종 6) 2월에 신축하여 11월에 끝맺었다. 성의 둘레는 3,950척, 높이는 20척, 두께[軆厚]는 25척, 여첩(女牒)은 415칸이다.’ 라고 하여 간략히 기록해 두었다. 이것은 관아공원 안에 있는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와도 일치한다.
또한 주요한 제사시설로 객사(客舍), 사직단(社稷壇), 여제단(厲祭壇), 성황제단(城隍祭壇), 양진명소제단(楊津溟所祭壇)과 향교(鄕校), 단월의 충열사(忠烈祠) 등이 표시되어 있다. 이 중에 성한 것은 충열사와 향교 뿐인데, 향교의 정문을 ‘풍화루(風化樓)’라고 2층의 누문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변형된 것인지 모르지만, 풍화루는 흔적도 없고, 또한 현재 충주향교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의 기본적인 학습 공간이 상실된 반쪽 건물로 자리하고 있다.
교현천이라 부르는 것은 염해천(鹽海川)으로 안림동 일대를 ‘염바다’라 부르던 것에서 하천 이름이 지어졌고, 지현천 또는 충주천이라고 하는 것은 ‘사천(泗川)’이라 하여 ‘사천개’에 연유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지도을 어떻게 보고 읽어내는가에 따라 그 맛이 다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지도는 이야기가 있는 지도라고 하고 싶다. 율지면(栗枝面) 공간을 보면 포모대(泡母臺)를 기록하고 그 전설을 지도에 적어놓았다. ‘주(州) 남쪽 40리, 풍류산(風流山) 위에 있다. 옛날에 장미(薔薇)라는 이름의 선녀가 있었는데, 스스로를 포모(泡母)라 부르며 항상 그 위에서 놀았는데, 향기가 온 골짜기에 가득하였다. 당나라 명황(明皇, 현종)이 그것을 듣고 도사를 보내 맞아들여 정완부인(貞完夫人)이라고 했다는 얘기가 전해오고 있다.’라고 했는데, 포모대와 관한 것은 따로 살펴볼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남산성이라 부르는 곳은 한미산성(漢美山城)이라고 표기했는데, 이것은 ‘할미산성’의 음차(音借) 표기로, 그 할미는 곧 마고할미를 가리킨다. 마고할미 설화가 보편적으로 퍼져있었고 그것이 구체적으로 지명에 반영된 경우이다. 또한 충주교(忠州橋)로 아직도 연세 있으신 분들은 ‘대수정다리’라고 하면 아는 그곳은 ‘독갑교(獨甲橋)’로 표기됐는데, 그것이 곧 ‘도깨비다리’를 음차한 것이다. 비슷한 예로 탄금대 합수머리 부근의 나루를 ‘금곶진(金串津)’이라고 한 것은 우리말로 풀어 부르면 ‘쇠꼬지나루’가 된다. 살미의 ‘노루목’ 같은 경우는 뜻을 따라 ‘장항(獐項)’이라고 해놓았다. 목계나루는 당시에 목계(牧溪)가 산계(山溪)로 불리던 상황을 반영해 ‘산계진(山溪津)’이라 했다. 하나하나 그 의미를 다시 풀어보면 상당히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올 그런 자료이기도 하다.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읍성과 그 내외의 관공서 건물에 대한 표시다. 새로 고친 상황에서의 충주읍성에 관한 가장 자세한 시각자료인데, 이것은 1896년 을미의병 충주성 공략을 시작으로 일제에 의한 <충주시구개정>에 따라 읍성 자체가 파괴되기 이전 상황을 담고 있다. 이 지도를 바탕으로 광무양안(光武量案)과 일제에 의해 작성된 <충주시구개정도> 및 <지적도> 등 1915년 이전 자료들을 비교 분석하면 최소한 1869년에 수축된 충주읍성의 정확한 모습을 재구할 수 있다.
200여 항목을 번역하는데 꼬박 1주일 정도 걸렸다. 그리고 그 번역 원고를 한림디자인고등학교와 예성문화연구회가 협업으로 한글번역본 충주목지도를 새로 그렸다. 44명의 고등학생이 11개 작품을 만든 이번 일은 아이들의 시각에서 150년 전의 충주를 바라보고 읽어낸 결과물이다. 새로운 움직임에 희망을 가져본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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