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도촌(島村)과 회도(回島)ㆍ회도리(回島里)ㆍ도리숲 그리고 숲거리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35]

99. 도촌(島村)과 회도(回島)ㆍ회도리(回島里)ㆍ도리숲 그리고 숲거리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35]

 

제목이 어수선하다.

 

어느 특정한 곳을 이르는 말인데, 대충은 알겠지만 정확히는 모르는 어느 곳이다. 물론 충주 시내에 있는 어느 곳이다.

 

<교현동의 도촌>

 

도촌(島村)이란 것은 우리말로 ‘섬말’이라고 한다. 충주말로는 ‘슴말’. 섬을 슴이라 발음했던 동네말의 흔적이다. 우선 많이 알려진 곳은 관아공원 동편의 동촌(東村)의 다른 표기가 도촌이고 슴말이다. 동촌인 이유는 읍성(邑城) 동문 밖에 있는 마을이기 때문에 생긴 이름일 것이다. 그 마을에 가면 중심을 가르는 골목이 있다. 변화된 도로망으로 인해 남북을 연결하는 중심축은 모두 포장되어 차가 다닐 수 있게 곧게 펴졌다. 하지만 동서로 이어지는 옛길은 그 마을을 감싸는 뚝방길과 반대편의 너른 포장길을 제외하면 모두가 옛길 그대로 모양이 남아있고, 그 중에도 중심을 둘로 가르듯 지나가는 옛길은 골목으로 그대로 있다. 들어가 보면 참 재미있는 곳이다.

 

이곳은 예전에 농사짓던 상황에서 마치 섬처럼 마을이 만들어진 얘기를 이름에 담고 있다. 지금은 교현천(校峴川)이라고 하지만, 1872년 <충주목지도>에 염해천(鹽海川)으로 표기된 그곳을 북쪽의 한 축으로 한다. 동쪽은 소위 안림동으로, 그 사이에는 지금은 덮고 포장한 개울이 하나 있었다. 남쪽은 성남초등학교 방향인데, 거기에는 논이 있었다. 그 논과 동쪽들이 ‘염바다’로 곧 ‘염해(鹽海)’였다. 염해에서 내려오는 물줄기였기 때문에 염해천(鹽海川)이었다. 그러면 서쪽은? 거기도 마찬가지로 충주공고 북쪽 끝 모서리 광부처거리를 지나며 내려오던 물이, 성남초를 지나 내려오던 도랑을 만나 합쳐 내리뻗던 개울이 있었다. 그 개울도 지금은 덮고 포장해 갱고개로 향하는 그 길이 되었다.

 

그렇게 교현동의 도촌ㆍ슴말은 동서북쪽을 개울이 둘렀고, 남쪽은 논바닥이 자리했던 물 가운데 자리잡은 마을이었다. 읍성을 기준으로 동문 밖 개울건너에 있었던 마을이었기에 ‘동촌’이라 불리기도 했다.

 

이 ‘도촌’은 지형으로나 위치로 보았을 때 마을 이름이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그나마 명확히 알 수 있는 곳이다. 하지만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또 다른 ‘도촌’은 봉방동에 있는 도촌이다.

 

<봉방동의 도촌>

 

봉방동의 도촌(島村)은 두 가지 흔적이 남아 있다. 하나는 현 국원고 정문쪽에 있는 봉계교(鳳溪橋) 아래 100여미터에 있는 ‘도촌교(島村橋)’이고, 다른 하나는 ‘도촌경로당’이다. 땅이름을 살아있던 무언가의 흔적을 간직한 기억이라고 한다면, 봉방동의 도촌은 도로명 주소상의 봉방1길과 봉방2길 사이가 된다. 이 마을에 대한 지난 세기의 기록 하나가 찾아진다.

 

【충주】 충주읍에서는 명년도부터 지도할 지도부락을 선정하기에 여러 가지 고심을 거듭하여 오던 중 지난 12월 13일에 충주읍 봉방리 도촌(島村)을 지도부락으로 결정하였다는데, 동 촌은 37호를 옹(擁)한 한적한 농촌으로 금후의 갱생이 오직 기대되고 있다.(매일신보. 1934. 12. 16. 4면 6단. <충주읍 봉방리를 지도촌으로 지정>)

 

이에 후속된 일련의 사업 상황에서 하나 더 확인되는 것은,

 

【충주】 충주읍 지정 갱생부락인 충주읍 도촌 부락 유지 일동은 목하 집회장이 없음을 심히 유감으로 생각하고 각기 160원을 갹출하여 신축안을 수립중이라는데 듣는 바에 의하면 읍 당국에서도 그들의 열성에 크게 감동되어 총공비의 일부를 보조하리라고 한다.(매일신보. 1935. 4. 26. 5면 6단. <도촌(島村) 집회소 신축>)

 

봉방동의 중심마을로 성장하는 과정에 대한 흔적으로 보이는데, 당시 37호가 옹기종기 모여있는 마을 풍경은 너른 들 가운데 섬처럼 마을이 하나 들어있던 것으로 그려진다. 여기에 하나 더 연관성을 가진 지명으로 연상되는 것이 <회도(回島)> 또는 <회도리(回島里)>라는 1870년대의 기록이다.

 

▲ 1872년 <충주목지도>의 회도리 ; 무학당과 탄금대 중간 도로상에 원형 숲으로 표시해 놓았다. 

<회도ㆍ회도리ㆍ도리숲ㆍ도리실ㆍ숲거리>

‘회도(回島)’는 1871년에 편찬된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충주목’에 대한 지도에 표기된 지명이다. 읍성과 탄금대 중간쯤에 표시된 곳으로 지도상에서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 쉽지 않다.

 

‘회도리(回島里)’는 1872년에 그려진 <충주목지도>에 원형의 숲으로 표시된 지역이다. <호서읍지>의 충주목 지도보다 조금더 구체적으로 ‘무학당(武學堂)’과 ‘탄금대(彈琴臺)’ 사이에 위치해 있는데, 무학당 쪽에 조금 더 가깝게 표시되어 있다.

 

이 두 자료에서 보이는 기록이 주목되는 이유는, 관(官)에서 직접 관계된 직할공간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자연스럽게 유추할 수 있는 것이 지금 부르고 있는 ‘숲거리’라는 지명이다. 숲거리는 ‘무학당’과 중첩되어 부르기도 하지만, 1959년에 편찬된 <예성춘추>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藪巨里(숩거리)> 현 충주교(忠州橋)로부터 탄금대로 행하는 도로 좌우를 ‘숩거리’라고 하는데, 고래로 가도(街道) 좌우에 연포(連抱)되는 류수(柳樹;버드나무)와 기타 잡목 등이 밀립(密立)하고 또 수령 방백의 선정비 등이 다수히 서 있었다. 그러나 자래로 살인(殺人) 급 강도범인 등의 사형선고를 받아야 할 중죄수(重罪囚)는 반드시 차처(此處)에서 교살(絞殺) 등의 사형을 집행하였으므로 일몰 후에는 래인거객(來人去客)이 두절되었으니 단기 4261년(1928) 무진(戊辰)에 충북선 철도가 개통되어 연포지수(連抱之樹)수 거개 작벌(斫伐)되고 비석 등도 파훼(破毁)하여 일신하게 개척한 후, 탄금대로 통하는 3등도로가 되고 또 기타 관공서의 창고와 인민의 주택 등이 신설되어 ‘무학당(武學堂)’이니 ‘역전동(驛前洞)’이니 하는 2대 부락이 되어 옛날의 모습을 볼 수 없다.(예성춘추, p.51)

 

이 기사에서도 회도 또는 회도리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다. 탄금대로 향하는 길 좌우에 늘어섰던 나무가 곧 숲을 이룬 거리여서 ‘숲거리’라는 단서는 보인다. 그렇다면 ‘회도’ 또는 ‘회도리’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며 어디에서 찾아야하는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관에서 인식을 넘어서 관리 공간이었으므로 지도에 표시했다고 보고, <예성춘추>의 기록에서 보듯 사형을 집행하던 곳이기도 했단 점에서 볼 때, 사형 집행장소를 특별히 <회도> 또는 <회도리>라 특정해서 불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그 이름에서 파생된 ‘도리숲’, ‘도리실’, ‘도로습’ 등이 지명 흔적에 남아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도리숲’에 대한 위치는 한전지점 건너편, 즉 작년에 이전한 충주시농업기술센터 부근으로 이야기하는 층도 있고, 국원고 정문 맞은편 지역으로 이야기하는 층도 있다. 확정할 수 없으나, 그 의미의 언저리는 추정할 수 있는 <회도(回島)>와 <회도리(回島里)>, 여기에서 파생된 또다른 이름의 ‘도리숲’, ‘도로습’, 나아가 마을이름으로 불리는 ‘도리실’, 인근에 있던 ‘도촌(島村)’, 그리고 사형장으로 통칭되는 ‘숲거리’의 상호관계는 결국 죽음의 공간이었고, 잊힌 공간이다.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를 찾아 밝히며 그 의미를 바로 읽어내는 것은 충주읍성과 관련한 일련의 작업에서 또 다른 화점(花點) 하나가 아닐까도 싶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뉴스
충주사회단체연합회, 가시박 넝쿨 제초작업
1/12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