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100회를 맞아, 올해 100주년을 맞는 1919년 3.1운동과 관련된 재판기록에 보이는 충주사람을 사건 발생 시기 순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충주에서 일어난 일도 있지만, 충주 출신으로 다른 지역에 나가 활동하며 본적지가 충주인 사람을 찾아보면 다양한 활동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된다.
① 3.1운동과 관련하여 가장 앞선 일자에 등장하는 인물은 정태영(鄭泰榮, 1888~1959)이다. 1919년 8월 30일자 경성지방법원 예심종결 결정서와 11월 6일의 경성지방법원 판결이 그 자료이다. 당시 정태영은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으로 근무했다. 그리고 본적지는 충청북도 충주군 가금면 가흥리 250번지였고, 서울에서 머물던 곳은 경성부 냉동(冷洞) 170번지 이병철(李秉澈) 방에 거주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는 1919년 3월 1일에 파고다공원을 시작으로 서울 시내 집회 현장에 있었고, 3월 2일 밤에는 보신각 종을 타종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재판결과 그는 징역 7월에 처해졌다. 또한 재판기록에는 없지만, 대한민국청년외교단(大韓民國靑年外交團) 사건과 관련해 초기 검거인물 중의 하나로 기록되는데, 그것은 그의 거주지가 그 주모자로 지목되는 앙성 출신의 이병철 집에 거주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② 두 번째 등장 인물은, 같은날 경기도 개성에 있던 어윤희(魚允姬, 1881~1961)이다. 위의 정태영 관련 공판 기록과 함께 1919년 4월 11일 경성지방법원 판결문이 그 자료이다. 이는 소태면 덕은리가 고향으로 3.1운동 당시에는 개성에 살았고, 기독교 남감리파(미국) 야소교 전도인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기록에 근거하면, 2월 28일 서울에서 강조원(姜助遠, 개성 출신의 목사)이 독립선언서를 받아, 다음날 아침 개성의 신공량(申公良, 호수돈여고보 서기)에게 도착됐다. 이는 다시 호수돈여고보 유치원 교사 권애라(權愛羅)에게 일반에 배포하기 위해 전달되었다. 이에 대해 어윤희는 예심조서에서,
“권애라는 신공량으로부터 듣기에 예배당에 위 선언서가 와 있다고 함에, 권으로부터 신공량에게 이야기하게 하고, 그 선언서 약 70~80장을 가지고 오게 하여, 이를 3월 1일 개성 북본정(北本町)부터 남대문까지 사이에 통행하는 사람에게 배포했다.”
고 한다. 재판 결과 징역 1년 6월에 처해졌다.
③ 세 번째 등장 인물은 서상경(徐相庚, 1900~1962)과 신태동(申泰東, 1902~1961)이다. 1919년 4월 9일자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판결이 그 자료이다. 당시 서상경과 신태동은 청주농업학교 학생이었다. 당시 서상경은 충주군 충주읍 읍내리가 주소였고, 신태동은 노은면 보련리 또는 연하리였다. 이들은 당시 청주 출신으로 서울 중앙학교 학생이었던 신횡호(申鑅浩)와 함께 청주농업학교 재학생이던 오석영(吳錫永), 이수천(李壽千), 이요습(李要習), 양재성(楊在成), 임창수(林昌洙), 이철우(李喆雨), 박승하(朴勝夏) 등과 함께 3월 9일 아침에 기숙사에 모여 만세운동을 계획했고, 이를 위해 신횡호가 가지고 왔다는 ‘우리 2천만 동포에게 경고한다’는 경고문을 인쇄ㆍ배포하기 위해 그것을 원고로 300여매를 인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되었다. 그 결과 서상경은 징역 5월, 신태동은 징역 3월에 처해졌다.
③-1. 하지만 이후에 서상경은 1925년의 <흑기연맹(黑旗聯盟)> 사건에 서천순(徐千淳, 1901~1964), 서정기(徐廷夔, 1898~1950)와 함께, 다시 1929년의 <충주문예운동사(忠州文藝運動社)> 사건에 서천순, 서정기, 김현국(金顯國, 1905~1946) 등 충주 사람이 직접 관계된 아나키즘 운동 관련 사건의 주역으로 계속 등장한다.
④ 네 번째 등장 인물은 류자명(柳子明, 1894~1985)이다. 이는 1919년 5월 12일자로 공지지방법원 청주지청 형사사건부 기록의 기소중지문이다. 류흥식(柳興湜)이란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보안법 위반 혐의였다. 이것은 그의 <회억록(回憶錄)>과 다른 자료들에서 확인되는 1919년 3월 10일 당시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야유회를 호암리로 다녀온 저녁에 그의 숙소로 오언영(吳彦泳), 장천석(張千石), 유석보(劉錫寶), 정모(鄭某) 등 4명의 학생이 찾아와 충주에서 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를 것을 의논하였다는 내용과 관련된다. 이날의 모의가 밀고에 의해 사전 발각되면서 류자명은 서울로 피신하게 되었다. 그것을 인지한 경찰과 검찰에서는 그 주모인 선생 류흥식을 체포하기 위해 지명수배를 내렸지만, 그의 행방을 찾을 수 없어서 결국 기소중지 결정을 내린 것이다. 하지만 그는 서울에 피신하여 이병철 등 충주 사람과 만나고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참가하며 상해 임시정부로 파견되면서 길고 지난한 독립운동의 길에 투신하게 되었다.
⑤ 이 시기에 2차 사료인 <3.1운동비사>에 등장하는 인물이 홍종한(洪鍾漢)과 김흥배(金興培)이다. 이들은 달천리 천도교도로 ‘3월 11일 충주면 달천리에서 천도교인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에게 제지를 당하고 해산하였’고, 이에 위 두 사람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지역에서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충주장날을 기해 달천리 천도교도들이 중심이 되어 대규모 만세운동이 있었고, 그 전날 달천리에서 천도교도들이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음력 5ㆍ10일장이 열리던 충주장날을 기준하면, 1919년 3월 10일(음, 2. 9)에 달천리에서 천도교도들이 만세를 불렀고, 3월 11일(음, 2.10) 충주장날에 다시 대규모 만세를 불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 대한 판결문 등이 확인되지 않는 아쉬움과 함께 자료 탐색이 추가로 요청된다.
⑥ 다음은 김종부(金鍾富, 안동 사람으로 당시 충주에서 활동), 장량헌(張良憲, 현 충주감리교회 소속), 오언영(吳彦泳,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반), 최명희(崔明熺, 감리교회 신자) 관련 1919년 5월 31일자 청주지청 판결 및 관련 7월 26일자 경성복심법원 판결, 그리고 9월 25일자 고등법원 상고기각 판결이 자료이다. 이것은 4월 8일경 칠금리 권태은(權泰殷)의 집에서 충주공립보통학교 여교원 김연순(金連順)에게 권유해 충주장날 군중이 모이는 것을 기회로 만세운동을 계획했다. 이를 위해 김종부가 왼손가락을 찔러 그 피로 태극기의 태극 문양을 만들고, 장량헌이 김종부의 구술에 따라 문구를 써넣었다. 그리고 기타 경고문, 독립가 각 1통 및 태극기 여러 개를 만들어 김연순에게 주며, 학생들의 동참을 권유하라고 오언영에게 건넸고, 오언영은 보통학교에 다니던 여동생(오필순(吳必順)으로 추정됨)을 통해 김연순 선생을 만나 계획을 설명ㆍ설득하여 동의를 구했다. 그러나 계획은 실행에 옮기기 전에 탄로되어 체포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금가면 도촌리에 거주하는 최명희(崔明熺)는 3월 27일 엄용복(嚴龍福)에게서 충주장날을 기해 만세를 부를 계획에 동참를 구했고, 다시 3월 28일에는 목계의 김종태(金鍾台)를 찾아가 같은 이야기를 하여 만세운동을 선동한 이유로 체포되었다. 이들, 즉 김종부, 장량헌, 최명희, 김종태는 기독교 계통(현, 충주감리교회)의 연장선으로, 또한 앞선 류자명의 계획에 김종부, 장량헌이 등장하고, 류자명의 충주간이농업학교 제자였던 오언영이 함께 등장함에 있어, 1919년 3월의 전개상황에서 천도교인들의 움직임과 별개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한 종합적인 계획이 진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김종부는 징역 1년 6개월, 장량헌, 오언영은 징역 1년, 최명희는 징역 8개월에 처해졌다.
⑦ 다음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용원만세운동(龍院萬歲運動)과 관련한 1919년 4월 1일의 일이다. 이것은 1919년 5월 13일의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 판결과 6월 13일자 경성복심법원 상고기각 판결, 8월 16일자 고등법원 형사부 상고기각 판결이 그 자료이다. 단경옥(段慶玉, 1894~1943, 당시 잡화상), 이희갑(李喜甲, 1897~1953, 농업), 이강렴(李康濂, 1902~1927, 생도), 손승억(孫承億, 1893~1934, 농업), 윤주영(尹周榮, 1897~1938, 농업), 윤무영(尹務榮, 1890~1962, 농업), 이강호(李康滈, 1895~1973, 농업), 김은배(金殷倍, 1891~1971, 농업) 등 8명이 용원장날(음, 1ㆍ6일장)을 맞아 만세를 부를 것을 3월 31일에 결의하고, 선언서 등사, 태극기 9개를 제작하여 4월 1일(음, 3. 1) 용원시장에서 약 50명의 군중과 함께 만세를 부른 일이다. 이에 따라 단경옥은 징역 1년, 이희갑, 이강렴, 손승억은 징역 8개월, 윤주영, 윤무영, 이강호, 김은배는 징역 6개월에 처해졌다. 이것이 충주지역에서 있었던 구체적인 기록으로 현재 매년 4월 1일을 기해 기념행사를 이어오고 있다.
⑧ 다음은 권태은(權泰殷), 최봉기(崔琫基), 박찬병(朴燦秉) 관련 판결로, 1920년 1월 21일 대구지방법원 예심판결 결정문 및 2월 27일 대구지방법원 판결문이 해당 자료이다. 앞의 김종부 관련에서 1919년 4월 초순의 태극기 제작 장소로 권태은이 언급되지만, 이와는 별개 건으로 1919년 10월 초순 자금 모집건으로 권태은 주도로 자금모집을 계획하며 살미면 설운리의 최봉기와 박찬병이 동조하여 경북 문경에 가서 활동하다가 체포된 건이다. 이 건으로 권태은과 최봉기는 징역 6월에 집행유예 3년, 박찬병은 면소, 방면 처분을 받았다.
⑨ 다음은 1919년 4월 이후 서울에서 진행된 <대한민국청년외교단> 결성과 자매단체 <대한민국애국부인회>와 관련한 이병철(李秉澈) 관련 건이다.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 판결,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 판결이 해당자료이다. 이 두 판결문에는 다수의 충주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병철(李秉澈, 1899~1944), 정낙윤(鄭樂倫, 1885~?)이 직접 피고로 재판을 받고, 그 기록에 류흥식(柳興湜, 류자명), 류흥환(柳興煥), 정석희(鄭錫熙, 이는 정태희(鄭泰熙)의 오기), 그리고 이후의 연구 자료에서 청년외교단 충주 지부장에 윤우영(尹宇榮)까지 6명의 충주 사람이 등장한다. <청년외교단> 사건은 이병철을 중심인물로 하여 재판이 진행되는데, 1919년 5월경 송세호(宋世浩)가 조용주(趙鏞周), 연병호(延秉昊)의 주창에 의해 정낙윤, 류흥식, 김홍식(金弘植), 이경하(李敬夏) 등이 서울에서 조직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이병철은 이 단체의 조직에 있어 기본 운영 자금을 지원한 인물로 파악된다. 그리고 류자명은 1919년 3월 12일에 충주를 떠날 때, 행길에서 만난 친구 권석희(權石熙)에게서 서울에 가면 정낙윤의 집을 찾아가라는 얘기를 들었다. 사흘 걸려 도착한 서울, 1919년 3월 14일 저녁 5시에 인력거를 타고 정낙윤의 집을 찾아가서 만났다고 하고, 3월 15일에는 이병철을 찾아가 만났다고 했다. 이병철은 이미 류자명이 충주에서 정운익(鄭雲益)의 집에 기숙할 때 친하게 지냈던 인물로, 정운익은 류자명의 외사촌 자형이 되고, 이병철은 정운익의 매제가 된다. 그렇게 자연스레 만나게 되었고, 정낙윤에 의해 음력 6월 중순경에 이호승(李鎬承), 김태규(金泰珪, 괴산 소수), 이강하(李康夏), 나창헌(羅昌憲), 정석희(鄭錫熙, 정태희), 류흥환(柳興煥)을 가맹시켰다고 한다. 이렇게 충주사람들이 서울에서 조직된 단체의 한 축을 이루며 역할한 것이 확인된다.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이후 다양한 면에서 독립운동 중에 등장한다. 추가적인 연구가 다양한 시각에서 필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⑩ 그 밖에 소수 인원으로 1919년 4월 1일(음, 3. 1) 음성군 소이면 한천장날 있었던 만세운동에 추성열(秋成烈, 1887~1970)과 이교필(李敎駜, 1886~?)의 참여가 있다.(1919년 5월 22일자 공지지방법원 청주지청 판결 및 10월 2일 고등법원 형사부 상고기간 판결) 또한 이백하(李栢夏, 1899~1985)의 경우 <충주의 독립운동가>(예성문화연구회, 2011)에서 1919년 당시 주소지가 충주시 지현동으로 천안의 아우내장터 만세운동에 참여한 주도 인원의 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판결문에 기초한 1919년 상황에서 3.1운동과 관련한 인물군을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정태희(鄭泰熙), 1919년 3월 1일 서울 파고다공원 만세 현장, ② 어윤희(魚允姬), 1919년 3월 1일 개성 만세 운동, ③ 서상경(徐相庚)과 신태동(申泰東), 1919년 3월 9일 청주농업학교 학생의 만세운동 계획 관련, ④ 류자명(柳子明, 柳興湜), 1919년 3월 10일 충주간이농업학교 졸업 야유회 후의 충주장날 만세운동 계획, ⑤ 홍종한(洪鍾漢)과 김흥배(金興培)의 1919년 3월 10일 및 11일의 달천리 천도교도의 만세운동, ⑥ 김종부(金鍾富), 장량헌(張良憲), 오언영(吳彦泳), 최명희(崔明熺)의 1919년 3월 17일 및 4월 8일 만세운동 계획, ⑦ 용원만세운동(단경옥, 이희갑, 이강렴, 손승억, 윤주영, 윤무영, 이강호, 김은배)으로 1919년 3월 31일 계획과 용원 장날인 4월 1일(음, 3. 1)의 만세운동, ⑧ 권태은(權泰殷), 최봉기(崔琫基), 박찬병(朴燦秉)의 4월 초순(위의 김종부 관련) 및 10월 독립운동 자금 모집 관련, ⑨ 이병철(李秉澈), 정낙윤(鄭樂倫), 류흥식(柳興湜, 류자명), 류흥환(柳興煥), 정태영(鄭泰榮), 윤우영(尹宇榮) 관련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의 1919년 5월 조직과 이후 활동 및 발각에 관한 건 등으로 정리된다.
이를 보면, 지역 내외에서 충주사람이 1919년 3월 상황 및 그 후의 움직임의 최소한이 보인다. 과연 이것을 100년이 지난 지금 어떻게 정리하고 있고, 또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문제는 이제부터의 숙제가 아닐까 싶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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