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앞둔 지금, 장날은 그냥 장이 아니다. 대목장이다. 제상(祭床)을 물리고 나면 내내 잔뜩 눈독 들였던 내 먹거리를 챙기 듯, 명절 밑 대목장은 그 제수(祭需)를 장만하는 그런 장이다. 그리고 그 장은 곧 삶이며 먹거리를 공급하는 생명줄이었다. 지난 자료를 보면 일상적인 장 풍경보다는 뭔가 특별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 기사로 남아있다. 오늘은 그 장날 장면들을 쫓아가 보려 한다.
100년전, 그러니까 1919년 3월 11일(음, 2. 10)은 충주 읍내 장날이었다. 동네 얘기에 의하면 3월 10일(음, 2. 9)에 달천리 천도교도들이 그 동네에서 만세를 부르고, 다음날인 충주장날을 기해 대규모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또한 1919년 4월 1일(음, 3. 1)은 용원장날로 이 날을 기해 용원만세운동이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200명 정도가 모였다고 했지만, 판결문에는 50여명 정도로 기록돼 있다.
장날은 생필품이 모여 거래되기도 하지만, 그 주체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장구경은 곧 사람구경이라고 할까? 오랜 만에 만난 친구와 장마당 언저리 대폿집에서 탁배기 한 사발 거하게 나누며 이야기하다 보면, 어느 때는 혼사(婚事)도 이루어져, 엄한 딸내미를 시집보내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1919년 3월의 장날은 세상 돌아가는 소식이 궁금한 뭇사람들의 발걸음을 끌어모으는 곳이었다.
1919년 4월에 장헌식(張憲植) 충청북도지사(당시는 도장관)는 이런 얘길 한다.
“도내 민중은 전도(前途)의 안위(安危)를 심려(深慮)하도록 절절(切切) 예고(豫告)하노니, 방금 춘도(春到)하야 전주(田疇)에 다사(多事)한데, 사업(斯業)을 망(忘)하고 소요(騷擾)에 종사하면 하등의 이익이 유(有)하리오. 본관의 유고(諭告)를 숙독(熟讀)하여 일신일가(一身一家)의 재액(災厄)을 물초(勿招)할지어다” 대정 8년(1919) 4월 5일, 충청북도장관 장헌식(매일신보. 1919. 4. 8. 2면 5단. <충북장관 유고(諭告)> 중에서)
하지만 이 때에 모든 시장은 강제로 폐쇄된 상태였다. 소식을 들을래야 듣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유고(諭告)라고 발표하면 누가 듣겠는가. 하 답답한 사람들은 시장을 다시 열게 해달라고 간곡히 청원한다.
충청북도에서는 소요 사건 이래로 각 시장(市場)에 폐쇄를 명하여 써 군중(群衆)의 모이는 것을 막을 방침을 써왔는데, 요사이 지방 유지자간에 자제단(自制團)을 만들고 소요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계약서를 작성하여 소관 관청에 대하여 개시청원서(開市請願書)를 제출하는 자가 많은즉, 불원에 모든 시장의 개시를 보리라더라.(매일신보. 1919. 4. 20. 3면 5단. <충북의 각 시장, 개시하기를 청원>)
의로운 일의 장(場)이 된 시장(市場)은 결국 생명줄이었고, 그 목숨이 위태위태한 상황에서 오죽했으면 자제단(自制團)을 만들고 다시는 소요(騷擾)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계약서까지 써가면서 시장을 다시 열어달라고까지 했을까?
매번 같지 않겠지만, 일제 강점기에 충주의 시장 상황은 어떠했을까?
충주군의 취인(取引) 기관으로는 9개소의 공공시장(公共市場)을 주로 하고, 기타 충주, 목계(牧溪), 대소원(大召院)의 정착상(定着商)으로, 수이입(輸移入) 화물은 수산물(水産物), 직물(織物) 급 잡화(雜花)를 주로 하고, 경성, 인천 급 대판(大阪) 방면으로부터 수이출(輸移出) 화물은 농산물 급 축류(畜類) 등인데, 주로 경성, 인천 방면에 반출되며, 그리고 일반 취인 방법은 매매이나 한강 상류 연안의 취인은 금상(今尙) 물품교환이 행하여 생산자의 수(受)하는 이익이 근소한 려(慮)가 유(有)하니, 고로 차에 대하여는 생산자의 이익 증진을 도(圖)코자 목하 연구 중이며,…(후략)…(매일신보. 1924. 6. 25. <충주군 권업개황>)
1924년에는 충주 지역내에 9개의 5일장이 열렸다. 또한 충주, 목계, 대소원은 정착상, 즉 상설 점포를 중심으로 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반 생필품을 비롯하여 수산물, 직물, 잡화가 주로 들어왔고, 농산물과 가축류가 타지역으로 나가는 물건들인데, 주로 서울, 인천을 중심으로 나아가 오사카 방면까지 반출되었다. 현금과 물품의 교환이 매매방법의 대종이었지만, 한강 상류 연안에서는 물품교환이 보편적이어서 생산자의 이익이 적은 것을 염려하는 모습도 보인다.
때로는 해괴망측한 일도 벌어졌다. 백의민족의 상징인 백의(白衣)를 버리고 염색옷을 입게 하기 위한 조치로 시장에서 그 단속을 실시했다. 청주에서는 1935년 11월 17일에 전직원을 총동원하여 장날 시장에 나온 사람 중에 흰옷 입은 사람을 일제 조사하며 ‘자빵’이라고 하여 흰옷에 글자를 써서 모욕하는 일을 행하기도 했다.(매일신보. 1935. 11. 21. 3면 11단, <염색의 장려, 청주군에서>) 이러한 예들은 수시로 행해진 1930년대 중반의 장날 풍경이었다. 이보다 더한 사건도 있었다.
【충주】 충주군 이류면에서는 색의 착복(色衣着服), 구력 폐지(舊曆廢止), 시일 개정(市日改正) 등 선전코자 장날 면리원(面吏員)이 총동원하여 흰옷 입은 사람은 무조건 하고 먹물을 칠하는 판인데 마침 방갓 쓴 중년 상주님이 지나갈 때 흰빛만 보이면 용서없이 칠하는 면리원은 용감히도 상주님 옷에다 먹물로 세례를 주었다. 상주님은 단박 “이 놈아. 눈깔도 없느냐” 하고 귀쌈을 후려갈겨 이것이 시비가 되어 노기가 등등한 면리원은 상주님의 방갓까지 부셔버리기까지 일장 격투전이 일어났는데, 통과하던 순사로써 싸움은 더 전개되지는 않았으나 색의 착복은 아직 상주님에게까지는 정도 지나치는 일이라고 일반은 면리원의 횡포적 행동에 비난이 자자하다고 한다.(동아일보. 1937. 12. 24. 조간 7면 1단, <색의 선전에 넌센쓰, 상인(喪人)과 면리원(面吏員)의 난투극>)
상주의 상복 착용도 색안경을 끼고 보면 단속대상이 되었던 모양이다. 대소원 장날에 있었던 일로 여겨지는데, 도를 넘어선 일들도 가끔 장날의 한 풍경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이미 본격적인 중국 침략을 통해 전쟁 상황으로 접어든 일제는 양력으로의 장날 개시일 변경을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충주】 충북 충주읍에서는 구력 폐지 운동의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오는 소화 13년(1938) 1월 1일부터 종래 음력 5, 10, 15, 20, 25, 30일에 개시하던 것을 양력으로 전기 일자에 의하여 개시일을 변경하고자 지난 11월 9일부로 충북도지사에게 변경허가 신청 수속을 진달하였는데 2월 급 12월에는 그 월 말일을 개시일로, 31일이 있는 달은 30일을 개시일로 결정하리라는 바, 휴업일 급 시장의 개폐 시각은 종래와 같다고 한다.(매일신보. 1937. 11. 13. 4면 9단, <충주읍 개시일 양력으로 변경>)
이렇게 변경된 개시일은 이후 줄곧 적용되며 현재에 이르고 있다. 다만, 이번처럼 설 명절 밑에는 4~5일 연속해서 대목장이 선다. 아마도 사람들은 장날이 궁금해서 발걸음을 옮기게 될 것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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