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의 만세운동 상황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 중에 충북의 경우 첫 사상자가 발생한 일이 1919년 3월 27일(음, 2. 26) 옥천군 이원면의 이원장날에 사망 1명으로 찾아진다. 그리고 3월 30일(음, 2. 29)의 청주 미원장날 1명 사망, 괴산 청안장에서 7명 사망자가 발생하며 면단위의 만세운동까지 확대되며 점점 격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달을 바꿔 4월 1일(음, 3. 1)이 되면, 여기 신니면의 용원장날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괴산 청천, 괴산 장연, 음성 소이, 음성 대소의 만세운동과 청주 오창ㆍ강외ㆍ부용 3면의 봉화(烽火) 올리기 등 발생 지역이 더욱 확대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이 4월 1일의 음성군 소이면의 한내장(漢川場)은 그 때까지 충북 지역에서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일에 사망 6명, 중상 9명, 경상 2~30명으로 상황보고 되었고, 중상자 중에 남자 5명, 여자 1명이 추가로 사망함으로써 12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이었다.
대부분의 만세운동이 그 지역의 장날 사람이 모였을 때에 계획적 또는 기습적으로 일어났다. 한내장도 마찬가지였다. 한내장은 음력 1ㆍ6일장으로 1919년 4월 1일은 음력 3월 1일로 장날이었다. 이 때의 상황을 충청북도장관 보고와 관계자들의 판결문을 보면 전반적인 내용이 확인된다.
한천장날 정오에 군중 1천여 명이 모였다고 한다. 장날에 나온 사람이 많았다. 이 때는 이미 시장이 폐쇄 조치된 상황이었다. 장날을 기해 만세운동을 계획한 사람이 있었다. 소이면 중동리에 사는 21세 청년 김을경(金乙卿)과 25세의 이중곤(李重坤)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은 사전에 태극기 30개를 만들었고 이것을 장날 나온 주민에게 나누어 주고 독립만세운동을 이끌었다.
모인 군중은 면사무소로 향했다. 소이면장 민동식(閔東植)을 붙잡아 앞마당으로 끌고 나왔다. 그리고 “너도 조선인이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이 마땅하며,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다면 죽는 것이 옳을 것이다”라고 하며 동참시켰다.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주재소 경찰이 출동했고, 김을경과 이중곤을 비롯해 도합 9명을 체포해 주재소에 가뒀다. 이에 권재학(權在學), 추성렬(秋成烈), 이교필(李敎駜) 등이 앞장서서 체포된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항의했다. 오후 8시 경에 체포한 사람을 음성경찰서로 압송하려는 것을 군중이 막아서자, 소이주재소로 되돌아갔다.
계속해서 석방을 요구하며, 드디어 권재학이 주재소 유리 장지문을 발로 차서 부쉈다. 추성렬과 이교필은 군중을 향해 체포된 사람을 풀어줄 때까지 해산하면 안된다고 독려하며 항의를 계속했다. 장지문이 박살나고, 주재소 밖의 군중은 점점 격해져가는 사태를 보며 방위 수단이라는 명목으로 발포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6명이 즉사하고, 9명이 중상, 2~30명이 경상을 입었다. 갑작스런 총성과 함께 사람이 죽어나가는 광경에 사람들은 혼비백산 도망하기 시작했다. 밤 11시경이 되어서야 잠잠해졌다. 그리고 다음날 충주에서 병력(兵力) 4명이 파견되어 경계를 섰고, 분위기는 험악해진 상황에서 전날의 중상자 9명 중에 6명의 추가 사망자가 발생했다.
당초에 만세운동을 계획한 사람은 소이면 중동리에 사는 김을경과 이중곤이었고, 군중의 일원으로 있던 추성렬과 이교필은 충주 사람이다. 추성렬은 당시 읍내리 409-1번지에 사는 32세의 잡화상이었고, 이교필은 교현리에 사는 33세의 농부였다. 정황상 이 두 사람은 한내장에 장사를 하러 갔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중에 벌어진 만세 시위에 동참하였고, 30대의 젊은 혈기에 시위의 중심에 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이날 체포된 이들 중에 주동자급으로 분류된 6명이 공판에 회부되었다.
김을경은 주모자로 1년 6개월의 징역에, 이중곤과 권재학은 각 징역 1년에, 추성렬과 이교필은 징역 6개월에, 이용호(李龍浩, 30세, 음성 소이 중동리)는 태(笞) 90의 선고가 내려졌다. 소이면 중동리 사람들을 주동 집단으로 보고, 충주에서 장사하러 갔던 추성렬과 이교필을 계획 단계와는 관계없는 적극 가담자로 판단해 소요죄를 적용한 결과이다.
한내장은 한천장(漢川場)으로 표기된다. 충주목(忠州牧) 상황에서 읍시(邑市)를 제외한 중요 면 지역의 장으로 목계(牧溪, 2ㆍ7), 신당(新堂, 3ㆍ8), 천포(泉浦, 1ㆍ6), 대소원(大召院, 4ㆍ9), 용원(龍院, 1ㆍ6), 내창(內倉, 3ㆍ8), 한천(漢川, 1ㆍ6) 등 6곳을 꼽았다. 1870년대에 한천장은 폐지되었으나 다시 열려 20세기에는 주요 장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또한 소이면(蘇伊面)은 일제의 행정구역 통폐합 이전에 소파면(蘇坡面)과 사이면(沙伊面)으로 나뉘었으며, 모두 충주목 관내의 면으로 <충주목지도>에 기록돼 왔다.
또한 1909년 기준으로 충주지역의 주요 사립학교 4개 중의 하나로 소흥학교(蘇興學校)가 기록돼 있다. 이 소흥학교는 당시의 소파면(蘇坡面) 설피(雪皮)에 있었으며, 설피는 지금의 소이면 중동리(中洞里)의 중심 마을이다. 한내장은 소이면 내에서도 중동리에 섰던 장이다.
추성렬과 이교필의 한내장날 만세운동 참여는 몇 가지 시사하는 바가 있다. 같은 날 용원장이 있었다. 그럼에도 음성군에 속한 한내장을 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3.1운동의 확산에 따라 취해진 여러 조치 중에 시장폐쇄 조치가 있었다. 충주장 등 군단위의 큰 장은 경계와 감시 속에 위축되어 있던 상황이다. 또한 충주의 경우 1913년~1916년까지 행해진 <충주시구개정>에 의해 읍성을 헐어내고 신작로를 만들며 이주 일본인들 중심의 상설 점포가 밀집하며 중심상권을 뺏긴 상황이었다. 장사를 하려면 결국 5일장을 전전하며 먹고사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그것조차도 여의치 않게 된 상황이었다.
이전부터 충주 인근의 중요 장의 하나였던 한내장을 찾는 장사꾼의 하나로 추성렬은 출입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당시 상황에서 외곽으로 가야만 그나마 장이 서던 분위기도 읽힌다. 생계를 위한 방편이고, 그것이 곧 생활이었다. 하지만 1919년 4월 1일의 한내장은 여느 때와 달리 그 지역 사람들의 사전 계획에 의해 주도된 만세운동의 장이 되었다. 억울한 피해자가 나오게 되고 속에 있던 울분과 의기가 발동되어 추성렬과 이교필은 그 현장을 떠나지 못했다. 동참했다. 선도했다. 갑자기 쏘아대는 총알에 주변 사람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살이까지 하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기억하지 못한다. 판결문과 상황보고 등 당시 서류를 통해 확인한 것이 고작인 나도, 음성 한내장에 등장한 이들의 낯섦에 아직 어찌할 줄 몰라 하고 있다. 이것이 100년 지난 우리의 자화상이라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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