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어윤희(魚允姬) 선생님의 고향은 여기 충주, 소태랍니다.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43]

103. 어윤희(魚允姬) 선생님의 고향은 여기 충주, 소태랍니다.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43]

 

1919년 3월 1일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체포ㆍ투옥되었다. 그리고 하나 둘 재판이 열리고 그 결과가 공표되기 시작했다.

 

▲ <어윤희(魚允姬)>1919년 4월 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자료:일제감시대상인물카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1인 평균 9개월의 징역

경성지방법원에서 판결 언도한 건수

 

소요사건에 관하여 4월 21일까지 경성지방법원에서 판결 언도한 것은 건수가 10건이오, 인원이 30인이라. 형기는 한 사람에 평균 아홉 달 쯤 된다 하며, 그 중에 제일 중하게 된 것은 개성의 야소 여전도사 어윤희와 신동란[신관빈] 두 사람의 1년 6개월이며, 그 나머지는 1년 2개월이 두 명, 1년이 4명, 10개월이 5명, 8개월이 11명, 6개월이 한 명, 볼기맞은 사람이 95명이라 하며, 여전도사 어윤희는 경성의 수모자로부터 격문과 선언서를 받아서 그것을 개성 일반에게 돌나주고 그 곳의 망동을 선동한 괴수라더라. (매일신보. 1919. 4. 25. 3면 6단)

 

개성(開城)의 망동(妄動)을 선동(煽動)한 괴수(魁首)! = 어윤희(魚允姬)

개성의 망동은 이러하다.

 

▶ 개성 여학생이 시작

 

야소교 부속 호수돈여학교 생도 35명은 3일 오후 두 시 경부터 삼삼오오로 대를 지어 찬미가와 독립가를 부르고 만세를 불러 시위운동을 시작하였음으로써 개성경찰서로 데리고 가서 설유하는 하는 동안에, 약 천 명의 군중이 몰려옴으로 문전에 멈추고 설유를 하여…(이하 생략)…(매일신보. 1919. 3. 7. 3면 2단)

 

이러한 망동이 시작되기 전인 2월 28일, 3월 1일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기획하는 서울의 오화영(吳華英)으로부터 개성의 남감리교 목사 강조원(姜助遠)에게 독립선언서 100매가 전달됐다. 3월 1일 아침, 강조원은 호수돈여고보 서기 신공량(申公良)과 선언서 배포에 관해 협의한 후, 일단 북부예배당 지하실 석탄창고에 선언서를 두었다. 3월 1일 정오 경, 신공량은 호수돈여고보 부속 유치원 교사 권애라(權愛羅)에게 선언서 도착을 얘기했고, 배포 문제를 상의했다.

 

권애라는 이 문제를 어윤희 여사에게 말했다. 두 말 없이 선언서를 받아든 어윤희 여사는 함께 전도(傳道) 일을 하던 신관빈(申寬彬) 여사와 같이 개성 시내 거리로 나섰다. 개성 북본정(北本町)에서 남대문(南大門)까지 수 십 명에게 조선독립선언서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본 경찰에 잡혔다. 개성에서 서울로 압송됐고, 경성지방법원에서 1919년 4월 11일에 열린 재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갇혔다. 이때 나이 39세다. 3월 3일의 개성만세운동에 의해 잡힌 권애라도, 아우내 장터의 유관순도, 수원 기생 김향화도 같은 감방에 수감됐다. 맏언니로 또는 엄마 같은 그녀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금식기도를 하며 자기 밥을 어린 관순이 몫으로 나눠주기도 하며 성심을 다해 보살폈다. 그러나 끝내 관순이는 죽었다. 그리고 1920년 4월 28일, 차고도 넘쳐 모자라는 감방 때문에 은사(恩賜)라는 미명 아래 그녀를 석방했다.

 

옥살이에 시달려 병든 그녀는 세브란스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 때 원장이 ‘조선에는 두 마리 호랑이가 있다. 한 마리는 백두산에 있고, 다른 한 마리는 나다’라며, 조선은 자신의 제2의 고향이라고 하던,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인 스코필드(Frank William Schofield)였다. 지사적인 풍모에 반한 석호필은 어윤희 여사를 누나라 하며 의남매가 되었고, 개성의 여성 교육 대모였던 김정혜(金貞蕙) 여사를 어머니로 삼았다.

 

개성에 돌아간 어윤희는 1920년에 개성여자교육회 창립을 주도했다. 또한 조선민흥회(朝鮮民興會) 창립(1926), 신간회(新幹會) 개성지회 설립(1927), 근우회(槿友會) 개성지회의 설립(1929)에 적극 참여하며 1920년대 후반의 개성 지역 사회운동의 중심에 서있던 여성으로 활동했다.

 

1931년 5월, 신간회 해소 이후에는 아동복지활동에 헌신하였다. 그 결과 1937년에 개성에서 유린보육원(有隣保育院)을 오기환(吳箕煥), 한철호(韓喆鎬) 두 의사의 후원으로 설립하며 고아를 돌보는 일에 전념했다. 해방 후, 6.25전란 때 부산으로 피난갔다가 서강감리교회의 장로가 되어 10년간 봉직했다. 이후 다시 서울에서 서강유린보육원(西江有隣保育院)을 설립해 운영하다가 1961년 11월 18일에 별세했다. 그의 평생 노력과 민족운동에 헌신한 공로가 인정되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어윤희 여사는 1880년 당시 충주군 소태면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1877년, 1881년 출생 등 몇 가지 출생 연도에 대한 혼선이 있지만, 생전에 본인이 쓴 이력서에는 1880년이라고 적었다고 한다. 그가 태어나 자란 곳이 소태면 덕은리 조기암이라고 한다. 기록에는 그의 부친이 어현중(魚玄仲)이라고 하는데, 함종(咸從) 어씨 족보에는 그러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그에 대해 알아보고자 현장 답사를 다녀온 어경선(魚敬善) 선생의 이야기로, 현재 그녀의 집터는 돼지 사육 농가가 들어섰다고 한다.

 

아무튼 소태에서 나서 자라던 어윤희는 12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16세에 결혼을 했지만, 남편이 동학의 의병으로 나가 전사했다고 한다. 16세에 남편이 의병으로 나갔다고 하면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전제할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녀의 출생 연도는 1877년이 맞을 것도 같다. 그리고 18세에 아버지마저 운명하자 혈혈단신 전전하다가 개성을 중심으로 정착하여 32세 때에 기독교에 입교했다고 한다. 그리고 34세에 개성 미리흠(美理欽)여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에 눈을 떴다고 한다. 당시 개성에는 감리교 선교회에서 설립 운영하던 미리흠여학교는 과부나 기생을 대상으로 문을 열어놓았고, 반면 일반 여성교육을 목적으로 호수돈여학교가 있었다.

 

청상(靑孀)의 몸이 되어 기독교에 입교한 후, 강단(剛斷)있는 결정으로 1919년 3월 1일 개성의 만세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던 그녀는, 아직 고향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 이번 3.1운동 100주년을 기념하여 충청북도 차원에서 충북 출신의 여성독립운동가 7위에 대한 흉상을 제작하여 세운다고 한다. 거기에 한 분으로 세워질 예정이라고 하지만, 청주라는 또 다른 타향에 덩그마니 놓이는 형국이다. 뒤늦었지만 1회성 행사로 끝날 것이 아닌, 체계적이고 지속적이며 종합적인 우리 지역 독립운동가에 대한 연구와 조사가 이어져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것이 100주년을 맞는 이 즈음에 가질 수 있는 여러 생각 중의 하나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뉴스
충주사회단체연합회, 가시박 넝쿨 제초작업
1/12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