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병로(趙秉老) 충주목사 주도로 충주읍성이 수ㆍ개축된 지도 벌써 150년이다. 1869년 음력 2월부터 11월까지 10개월간 진행된 공사였으니 시간적으로 꼭 그렇게 되었다. 혹자는 이것을 행정상 기능 강화를 목적으로 한 것이라 풀이하기도 한다. 그런데 수ㆍ개축 당시의 상황 여건과 조정의 지시사항, 그리고 공사를 통해 수행된 사업 내용을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공사 전반에 관한 사실관계는 공사를 마친 이듬해인 1870년 10월 상순에 조병로 목사가 쓴 축성기(築城記)에 잘 나타나 있다. 축성기를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적 여건에 견주어 충주읍성의 수ㆍ개축 이유와 결과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충주읍성 수ㆍ개축의 원인이 된 사건은 병인양요(丙寅洋擾, 1886)이다.
성상(聖上) 즉위 3년은, 동치(同治) 5년 병인년(1866, 고종 3)이다.
이 해 10월에 강화도의 양요(洋擾)가 평정되니, 주(州)와 군(郡)에 조서를 내려 성지(城池)를 보수하고, 기계를 수선하고, 대오를 점검하며, 군량의 저축을 확대하고, 포수(砲手)를 설치하여 비상시기에 대비케 하니 8도가 그 직분을 다하여 차례로 혁신되었다.(조병로, <축성기>, 1870)
병인양요의 충격으로 양이(洋夷)에 대한 대비책이 강구되었다. 제일 먼저 해안의 주요 읍성과 주군(州郡)의 읍성에 대한 보수 개축작업이었다. 성벽에 대한 보강 뿐 아니라 연못(池)을 손볼 것을 함께 지시한다. 곧 서양의 주요 무기가 선박을 증기기관의 군함을 이용해 화포와 총으로 이루이지는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각종 화재에 대비한 방화수의 마련도 병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충주읍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새로 만든 연못이 방지(方池)이다. 객사와 동헌 중간에 연당에 인접한 위치해 새로 판 것이 곧 뒤에 하방지(下方池)라고도 하는 그것이었다.
병장기의 보수는 물론이고 군대의 대오를 점검하는 등의 군사훈련에 대한 대비책도 강화되었다. 이에 따라 읍성내에 군기고(軍器庫)가 정비되었다, 군사 훈련을 위해 훈련청(訓練廳)이 17칸으로 정비되어 서문 밖 빙현 근처에 위치했고, 군사훈련을 위해 과거 무학당(武學堂)을 고쳐 6칸 건물을 정비하여 힐융대(詰戎臺)라 하였다.
군량의 비축을 위해 사창(社倉)이 읍성 내에 신설하였다. 그리고 각 면마다 사수(社首) 1인을 정하고 책임을 맡겼는데, 그에 따라 설치된 토교(土窖)라는 군량미 저장고가 15곳 신설되었다.
또한 양이와의 총격전에 대비하기 위해 북문 안쪽, 객사 옆에 12칸의 포수청(砲手廳)을 신설하였고 포수 200명을 모집하여 윤번으로 근무케 하였다.
이와같이 충주읍성 수ㆍ개축 공사는 성벽을 튼튼히 새로 고쳐쌓음과 동시에 화력전에 대비한 방화수 시설로 방지를 새로 팠다. 그리고 군사 훈련 시설로 훈련청을 보강하고, 과거 무학당을 고쳐 힐융대라 하여 강화시켰고, 군기고를 통한 무기의 점검과 보수, 그리고 군량미 저장을 위한 사창의 신설 및 각 면에 토교 설치를 병행하였다. 한편 총포전에 대비해 포수를 모집하여 총잡이부대를 만들고 포수청까지 신설하여 군사적 방비태세를 갖추게 되었다. 그에 따른 읍성 내외의 각 관아(官衙) 공해(公廨)에 대한 시설 보수도 병행함으로써 행정 기능 역시 강화되었다.
이렇게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있기 직전 상황에 대해 조병로 목사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병인년(1866) 12월에 내가 부춘(富春;전남 화순)으로부터 충주목사로 벼슬을 옮겨 받았는데, 충주의 땅은 넓은데 백성은 파리하고 군사와 농정이 모두 병들어 오랜 기간 피폐하고 피폐한 가운데 군 장비와 병기며 군사 대열의 일이 비록 갖추어지고 새로우나 고을은 울타리를 철거한 집을 지키는 사람이 없음과 같았다. …(중략)… 만력(萬曆) 임진년(선조 25, 1592)에 왜병이 강을 건너 남쪽 조령을 넘어오니, 총병(總兵)인 충장공 신립이 날쌘 군사로 들에서 싸웠는데 오랑캐의 탄환이 빗발 같으므로 탄금대(彈琴臺) 아래에서 패하였다. 이 때에 또한 만약 성이 있어서 막아 지켰으면 어찌 도적 떼로 하여금 계속 몰려오기를 바람이 쓸어가듯 하였겠는가. 이것으로 본다면 고을이 있으면 성이 없지 못할 것이니, 이 고을에 성이 없는 것이 몇 백 년간의 일인지 알 수 없다. 또한 어찌 그 옛날에 성이 있었음을 안다고 하겠는가. 황량하게 남은 터가 더러는 비슷하지만 옛날 성의 둘레와 높이를 읍지에 베껴 전한 것이 그 옛 자취의 대략이라 볼 것이다.(조병로, <축성기>, 1870)
1866년 충주로 부임해 올 당시에, 피폐할대로 피폐해 있던 충주! 읍성 역시 성으로서의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상황이었고, 다만 읍지에 베껴 전한 수치만이 옛 자취의 대략을 보이고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이것이 임진왜란의 후유증인지, 아니면 그 이전부터 쇄락한 상태에서 임진왜란 이후에는 극복할 수 없을 정도로 방치돼온 것인지 알 수 없으나, 최악의 상태에 놓여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성벽 높이를 옛날 높이에 12척을 더해 20척으로 쌓았고, 성벽 두께 25척, 둘레 3,950척으로 300척을 늘였다고 한다. 그 결과를 반영한 것이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 1872)인데, 역대 이래로 가장 완전체의 성을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과의 동인은 결국 서양 오랑캐의 침범에 대비한 쇄국정책에 연동된 전쟁준비 태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공사에 투입된 비용은 지금식의 예산 구성으로 보면 국고보조 16,600냥, 시비가 10,000냥, 민간 모금액이 55,090냥이었다고 한다. 전체 비용의 67.4%를 민간에서 부담했다는 결론이다.
이처럼 막대한 공사 후의 정비된 군대 유지비용 역시 민간에 가중되는 세부담으로 작용한다. 여기에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탐관오리, 부재지주의 착취 등은 속으로 골병들게 되는 원인이기도 했다. 반면, 이렇게나마 정비해 놓은 읍성의 위용과 전쟁에 대비하여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위상 제고는 결국 1893년에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할 때에 충주부(忠州府)로의 독립과 그에 따른 관찰부의 회복, 다시 1894년의 남북도 개편 시에 충청북도의 수부(首府)로서 충청북도관찰부(忠淸北道觀察府)로 존속된 계기이기도 하였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는 새롭게 생각해 볼 여지가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과정을 거쳐 복원해 놓은 충주읍성은 1896년 을미의병 호좌의진의 충주성 점령과 일본군과의 공방전에 1차 타격을 입었다. 다시 손볼 여력도 없었고, 1908년의 충청북도관찰부의 청주 이전, 그리고 1912년에 계획된 <충주시구개정>에 의해 추진된 사업으로 인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불과 45년만에 벌어진 일련의 변화는 한 장의 그림으로 남아 많은 숙제를 던져주고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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