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탄금대 충혼탑(忠魂塔)과 팔천고혼위령탑(八千孤魂慰靈塔) 단상(斷想)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51]

106. 탄금대 충혼탑(忠魂塔)과 팔천고혼위령탑(八千孤魂慰靈塔) 단상(斷想)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51]

 

60년을 넘어서 세월을 짊어지며 늙어가는 탑이 하나 있다. 충주 탄금대(彈琴臺)에 올라가 산책로를 따라 걸으며 숲 사이로 처음 만나는 탑이다. 이 탑이 세워질 때 이렇게 보도했다.

 

<충주시 탄금대(彈琴臺)에 충혼탑(忠魂塔) 건립, 제막식 거행코 명복 기원>

▲ 탄금대 충혼탑(忠魂塔) 

【충주에서 신현무 본사 특파기자 발】 조국의 위기를 구출하여 국가의 운명을 살리고자 자기의 생명을 초개와도 같이 바쳐가며 멸공전선에서 용전분투하다 국토통일을 원한으로 남겨놓고 호국의 신으로 화한 전우들의 충혼을 길이 영접천혼(迎接遷魂)하고저 충주 참전전우회원과 상이용사회원들의 눈물로써 푼푼이 모인 돈으로 작년 10월 10일부터 착공한 충혼탑은 순 화강석으로 높이 45척의 장대한 공사가 드디어 9개월 만에 준공되어 9월 1일 오전 11시부터 유서깊은 탄금대 용미봉(龍眉峯)에서 제막식이 거행된 것인데 600여명의 유가족들은 자기의 아들 혹은 남편 등의 영혼을 마음속 깊이 불러보고자 숨가뿐 발걸음을 재촉하며 산마루턱에 도착하자 충혼탑을 바라보며 목이 메여 대성통곡하는 사람 혹은 고인의 이름을 부르며 걸음을 멈추는 사람 모두가 측은하고 가슴 아파 하였으며 1,500여를 넘는 관중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것이었다.

 

맑게 개인 가을 공기를 헤치고 그리웁던 가족을 찾아오는 듯 구곡단장의 주악소리와 함께 제막식이 되자 충주 출신 군경민 600여 주(柱) 영혼을 영접한 성탑은 이 대통령의 명력친필(銘力親筆)이 도타운 가을 햇빛을 담뿍 받아 유난히도 광채를 띄우고 있었다. (충북신보. 제872호. 1956. 9. 5. 2면 5단)

 

탑만큼이나 오래 묵은 신문을 펼쳐 기사를 읽을 때, 현장의 그림이 병풍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이 바로 이 탑이 세워진 자리의 이름이었다.

 

용미봉(龍尾峯)! 용의 눈썹이다. 대문산(大門山)이니 견문산(犬門山)이니 하는 탄금대(彈琴臺)의 다른 이름들은 알고 있었지만, 탑이 선 자리를 ‘용의 눈썹(龍眉)’라 했으니, 전체적인 형국은 용(龍)이 아니었나 싶다.

 

더구나 열두대로 불리는 그 곳의 한 부분 이름이 용추(龍湫)다. 절벽 끝에 물마르지 않는 슬픔처럼 항상 시퍼렇던 그 곳 이름이 용추였다. 그곳의 다른 이름은 양진명소(楊津溟沼)로 어둡게 고인 그 자리에 걸맞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 탄금대 팔천고혼위령탑  

어쩌면 황해(黃海)에서 한강(漢江)을 거슬러 발원지(發源地)인 태백의 검룡소(儉龍沼)를 찾아가던 용이 용추에서 솟아올라 탄금대 전체에 웅크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웅크리고 둘러보기 가장 적당한 높은 곳이 용미봉이었다면, 전체적으로 말 된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를 상실한 이곳에 ‘용미봉’과 ‘용추’라는 이름은 그래서 더 반가웠다. 야트막하더라도 봉우리였다면 얼마나 높았을까? 탄금대 토성을 오르는 정문(正門, 남문)을 앞에 두고 읍내를, 그리고 멀리 대림산(大林山)을 바라보던 자리. 길 오른편으로 개천과의 사이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왜병과 대적하며 진을 펼쳤던 곳이기도 하다. 높이를 모를 그 봉우리 정점에는 탑이 우뚝 솟았다. 그 탑 꼭대기에는 6.25 때 가장 많이 사용했던 M1소총의 총알을 형상한 조형물이 하늘을 향해 곧게 세워져 있다. 어찌 보면 미사일 같기도 한 그 탑은 이미 70년을 바라보는 6.25 때 희생된 충주시ㆍ중원군 출신 600여 명의 전몰군경 및 군속들을 위령(慰靈)하기 위한 탑이다.

 

그래서 그랬는가? 당시 최고 국가권력자였던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의 친필 휘호로 탑명(塔銘)이 사용되었고, 탑 아래를 자세히 보면 ‘대통령 이승만’이라는 자필 서명도 보인다.

 

비슷한 시기에 씌어진 <예성춘추(蘂城春秋)>(김상현 저, 1959)에는 1957년 7월 말일까지 봉안(奉安)된 영령의 명단을 수록해 놓았다. 이 책의 자료 모집 시점이기도 하지만, 얼마나 많은 희생자가 있었는가를 알려주는 자료이기도 하다.

 

기준 시점까지 수록된 사람이 모두 1,014명(당시 충주시 132명, 중원군 882명, 또한 당시 상모면(현 수안보면)은 괴산군에 속했던 시기이므로 명단에서 제외됨)이다. 그리고 전사 일자를 보면 1950년 6월 25일 전사자가 64명이다. 물론 그 이전 전사자도 있고 휴전협정이 조인된 이후의 전사자도 있다. 전체 명단 중에 전사 장소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이 415명이다. 전사 장소가 기록된 599명 중에 가장 많은 전사자가 난 곳은 강원도 김화(金化)로 무려 162명이 그곳에서 전사했다. 대부분이 군인이지만, 경찰과 군속도 있다, 군번없는 병사도 보인다. 명단을 두고 여러모로 살펴보면 더 많은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또한 해야 할 일의 최소한이 무언가 알 수 있다.

 

60년이 넘은 그 때의 아픔을 그렇게 용미봉에 간직하며 지나왔다. 2004년 5월에 충주시에서 위패 안치실을 만들고, 그 위에 탑을 그대로 원형 복원했다고 한다. 현재 그곳에 모셔진 위패가 몇 위(位)인지 확인하지 못했다. 다만 비슷한 시기에 작업한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2,838위가 모셔져 있다고 했다. 세월이 지난만큼 그 수도 많이 늘었을 것이다.

 

반어적(反語的)이지만, 그나마 이들은 행복한 축에 속한다. 그 옆에 세워진 ‘팔천고혼위령탑’에는 이름없이 스러져간 1592년의 충주 사람이 있다. 최근 연구에 의하면 8천 병력의 희생이 아닌, 그 수의 대다수가 충주 사람이라는 결과가 나오고 있다. 전쟁이란 것이 가져온 무서운 결과이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기 때문에 그 참상은 시간이 지나면 잊고, 잊혀져 기억조차 하지 못한다.

 

그래서였던가. 충혼탑이 세워지기 전에 일제는 러일전쟁 후에 군대를 본격적으로 주둔시키며 충주의 사직산 공간의 직단(稷壇)에 <정로기념충혼탑(征露紀念忠魂塔)>이란 이름의 일본군 추모공간을 만들었다. 또한 일제강점 내내 총독(總督), 정무총감(政務摠監), 도장관(道長官), 도지사(道知事), 군사령관, 사단장 등이 충주를 방문하면 고전장(古戰場)이라고 하며 탄금대 일대를 방문했고, 그 사실의 일부가 신문에 보도되어 기록되기도 했다.

 

보훈행정(報勳行政)이라고 하는 것이, 그 당사자나 후손에 대한 예우(禮遇)에만 그칠 일이 아닌 것 같다. 특히 어렵고 힘든 시기에 행정체계도 제대로 서지 않은 상황에서 고향이 여기고, 국가가 여기인 희생자들에 대한 죽음의 기록을 찾아 밝히며 정리하는 것도 꼭 필요한 일이 아닐까 싶다. 그것도 제대로 정리하지 못한 상황에서 하물며 민간인 희생자는 물어 무엇할까?

 

용미봉(龍眉峯)이란 이름을 만났던 반가움도 잠시 잠깐이었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넘어 세월이 된 지금 휑뎅그렁하게 역사의 저편에 방치된 것 같은 저들의 삶은 누가 기억하고 기록해 줄 것인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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