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땅의 기억, 공간의 재해석, 충주 공창가(公娼街)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7:55]

107. 땅의 기억, 공간의 재해석, 충주 공창가(公娼街)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7:55]

 

▲ 성남1길 입구의 24시간 통행금지 표지  

오늘은 좀 아픈 이야기를 꺼내려 한다.

충주에는 아직 24시간 통행금지구역이 있다. 물론 만 19세 미만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다. 그곳이 바로 성남1길로 명명된 성남동의 충주보훈회관 뒷골목이다. 구 충주세무서 뒷골목이기도 하다. 오늘은 그 공간, 그 땅이 간직한 아픈 기억을 들춰보려 한다.

 

<일인(日人) 만행(蠻行)>

 

충주에서 전해오는 말을 들으니,일본인 재무관 삼산성지(森山誠之;모리야마 마사유키)가 충주에 도래한 후로 허다한 민생에 끼친 해는 하나하나 들어 보일 수 없다고 하는데, 제일 가통(可痛) 가악(可惡) 가혹(可醜)한 일은, 어떤 여자를 막론하고 길에서 만나면 반드시 그 뒤를 쫓아 방안에 앉고는 다짜고짜 강제로 욕보이고 범하여 여인이 경황에 낙태한 사람이 많고, 넘어져 다친 사람도 많다고 한다.

 

충주 사령(使令) 우돌손(禹乭孫)의 아내를 필경 강간 후 지화(紙貨) 1원을 땅바닥에 던지고 가자, 그녀는 지전을 불태우고 종일 통곡에 3일을 굶다가 겨우 생명을 보존했으나 지금껏 가슴에 쌓인 원한(寃恨)을 씻을 수 없고, 도한(屠漢)한몽술(韓夢戌)의 아내는 벌건 대낮 길에서 밭으로 끌려들어가 또한 강간당한즉, 그녀도 길바닥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고, 도한(屠漢) 김만용(金萬用)의 시집 안 간 여동생은 이제 열여섯으로 이미 혼처를 정하였으나, 모리야마가 매일 4, 5차씩 그 집에 와서는 강간하겠다고 말하거나 자기와 결혼하면 돈을 주어 생활할 수 있게 하겠다고 위협하거나, 또는 그 오빠 만용(萬用)을 불러 공갈하는 등 그 거조(擧措)가 망측하며, 그 외의 악행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충주 사람들은 모두 어디 멀리 가서 편히 살고 싶다고 하면서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徹天]더라(대한매일신보. 1907. 3. 31. 2면 4단. 원문은 한문투라 풀어썼음)

 

모리야마 마사유키(森山誠之)는 이후 1908년에 원산(元山)으로 전출됐고, 1915년까지 세리(稅吏)로 이 땅에서 근무한 기록이 확인된다. 아무런 제재나 조치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개인의 악취미로 보기엔 과한 이야기다. 이미 1904년 10월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전략)… 본월(1904년 10월) 15일 오시(오전11~오후1시) 경에 일본 수선(修線) 일행이 군(郡)에 이르러, 통역(通譯)인 경성 중부동에 사는 김기용(金基用)이가 점심 먹을 주막을 정하고, 점주 엄덕용(嚴德容)이 바로 청소하지 않는다고 하여 턱을 잡고 눈을 때려 눈알이 빠지고 피가 얼굴에 그득함에, 그의 친속과 이웃들이 통역을 둘러싸며 경무서에 고소하였습니다. 총순(總巡) 이근배(李根培)가 그 참혹함을 보고 통역의 행패를 징벌하고자 곤장 4대를 쳤고, 그것을 본 일본인 1명이 공갈함으로 더 이상 곤장을 치지 못하고 가두었습니다. 그런데 가흥병참소 사무원과 군인이 경무서에 들이닥쳐 마구 부수고 난동을 부림에 총순과 순검이 풍비박산(風飛雹散)하였습니다. 그리고 선화당(宣化堂)에 들어와 본 관찰사에 따지고 겁박하여 총순을 보여달라고 요구함으로, 사람을 시켜 불러오라고 할 때에 (일본)군인 한 사람이 당하(堂下)에서 총순을 가리키며 말하더니 일제히 당에 올라 구석으로 몰아세우더니 결박하여 경성 사령부로 압송한다고 하며 충주 가흥의 일본병참소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총순을 돌려보내라는 내용의 공문을 병참소에 보냈으나 회보가 없고, 재류 일본인과 병참소 군인이 본 군 동헌에 들어왔고, 또한 일본인 몇 명이 엄덕용 집으로 가서 가산집물을 때려부쉈다는데 위협패악에 사람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관리와 백성이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습니다.

 

백성의 분을 억눌러 들끓어 일어나지 못하게는 하였으나, 근심과 부끄러움에 본 바를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주시기 바랍니다.(광무 8년(1904) 10월 15일 충청북도관찰사 이승우(李勝宇)) <자료 : 각사등록(各司謄錄 8, 충청남북도래거안(來去案) 2>(원문을 풀어씀)

 

총과 칼, 힘을 앞세우고 충주에 밀어닥치는 일제의 초기 상황이 어떠했는가를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치면서 1907년 8월 1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이 단행되면서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충주는 당시 일본군의 거점 기지가 되어 대규모 군대가 주둔하여 충북북부, 경북북부, 강원도 지역의 의병 토벌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그때 문화동 충주역 광장이라 불리던 곳은 육군연병장으로 자리했었고, 무자비한 토벌이 끝난 후 1908년 6월 5일에는 도청(관찰부)이 청주로 자고나니 이사가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가 있었다. 1906년 9월에 1개 중대 병력을 충주에 주둔시킨 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1907년 정미의병 상황에서는 1개 연대 병력이 충주에 주둔했다. 의병 토벌전이 끝난 후에는 1개 대대 병력이 있었고, 1912년에는 음성에 파견되었던 분견대를 충주에 병합하며 1개 중대 병력이 남아있었다. 그리고 3.1운동의 여파가 가라앉은 1923년에 충주수비대를 폐했다.

 

▲ 옛 충주진영(忠州鎭營), 구 충주수비대(忠州守備隊), 구 충주세무서(忠州稅務署) 공간은 최근 장례식장이 들어섰고, 그 뒤의 공창가(公娼街)는 아직 허름하게 그 자리에 24시간 통행금지구역으로 남아 있다.

 

초기에는 읍성 내의 관청 건물 여러 곳을 점령하다시피 불법 점거했었다. 하지만 이들은 과거 충주진영(忠州鎭營)을 충주수비대로 활용했다. 1923년 충주수비대가 폐지되며 그 공간을 활용해 충주에 실업학교를 설치해달라는 청원도 있었지만, 해방 후 어느 시기에 충주세무서로 쓰였기에, 한동안 우리는 그 공간을 충주세무서, 또는 구 세무서라고 불렀었다.

 

본론은 지금부터다.

 

일본군이 가는 곳에는 항상 공창(公娼)이라 불리는 매음집단이 뒤따랐다. 아프고 쓰리고 아린 얘기겠지만, 성남1길의 그 공간이 그렇게 시작된 이유도 일본군의 충주 주둔에서 찾아야할 것 같다. 충주수비대가 상주하면서 그들을 따라 돈벌이하러 온 공창가(公娼街)가 형성되며, 시대를 달리하며 그 공간은 계속 그렇게 이어진 것이다. 일본이 주장하는 정신대 개념을 공창(公娼)의 논리로 풀어내는 것은 그들 입장에서는 하등 문제가 없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주장이며 논리일 뿐이다. 다만, 그러한 악습과 악폐가 그들이 주리틀고 앉았던 이곳 충주에 그때부터 지금까지 남아있으며, 24시간 통행금지구역으로 격리돼 있을 뿐이다.

 

몇 년 전부터 이야기되는 여러 사안들 … 구 충주식산은행을 둘러싼 논쟁이라든가, 일부의 주장으로 시비가 되어온 특정 인사에 대한 친일논란 같은 것들은 충분한 자료를 찾고 머리 맞대고 풀면 풀어질 일이다. 또한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묻힌 충주읍성의 흔적도 우리의 의지가 충분하다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재구해낼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못된 악습에 의해 생활고에 시달려 극한에 내몰린 공간과 사람의 문제는 어떻게 풀 것인가?

 

봄이다. 모두가 화사한 꽃처럼 웃어야 하겠지만, 그 중에서도 천년의 시간을 버티며 100년 전에 묻힌 연당의 넉넉한 마음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왔다. 하지만 그것을 광장이니 주차장이니 하며 살짝 흉내만 내고는 덮겠단다. 1~2년 정도 늦췄다가 다시 파낸단다. 100년 만에 맑은 공기 마시며 숨통 틔워 1000년 충주 역사를 말해주겠다는 연당(蓮塘)을 또 우리 손으로 묻는 일은 역사의 심판대에 불필요한 제물을 올리는 일이다.

 

차라리, 100년의 아픈 지층 속에 신음하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공창가(公娼街)의 24시간 통행금지를 풀고, 거기에 주차장을 만드는 것이 여러 모로 우선해야할 일이 아닐까? 모두가 웃을 수는 없지만, 여럿이 웃을 수 있는 24시간 통행금지 해제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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