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에 대한 철거 주장이 다시 일고 있다. 아직은 일부의 주장이라고 하지만, 그도 또한 여론이니 귀 기울여 들어볼 이유가 있다. 그것과 관련하여 일제강점기 충주의 금융기관에 대한 얘기를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건물의 변화(성내동 243번지)
먼저 요즘 다시 이야기되는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에 대한 얘기다. 지난 2017년 5월 29일자로 등록문화재 제683호로 지정되었다. 지정 전후에 충주시립미술관 건립과 관련한 공간으로 운위되었으나 모든 것이 멈춘 상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그 사이 건물 안팎의 청소와 별관 지붕의 덮개 씌움 등이 이루어졌고, 주변에 철망 울타리를 쳐놓았다. 벽체는 당시보다 더 헐어지고 있으며, 현재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은 채 방치되는 느낌이다.
▶ 충주농공은행의 설립(1906)(성내동 428번지)
이 건물의 시작은 충주에 서구식 금융 제도인 은행의 시작점부터 이해해야한다. 즉 1906년 3월 21일자 칙령(勅令) 제13호의 농공은행조례(農工銀行條例)가 반포됨과 동시에 시행되었다. 이에 근거하여 서울을 비롯한 각 관찰부 소재지에 농공은행 설립이 추진되었다. 충주의 경우 1906년 6월 20일자로 직전 서리(署理) 충청북도관찰사였던 민영은(閔泳殷)이 충주농공은행 설립위원 중의 하나로 임명된 사실이 있다. 그후 1906년 9월에 충주에 본점을 둔 충주농공은행으로 설립하여 영업을 시작했다.
▶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1907) → 충주출장소(1908)
이것이 채 1년도 못된 1907년 6월에 한성(漢城)농공은행을 중심으로 공주(公州)와 충주(忠州) 양 농공은행과 합병하여 한호농공은행(漢湖農工銀行)을 만들었고,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이 되었다. 다시 1908년 관찰부의 청주 이전에 따라 9월에 한호농공은행 충주출장소로 격하되었다. 1910년 병탄 이후에 일본인들의 이주 증가와 함께 자금수요가 증가하면서 1912년 8월부터 영업소 신축에 착수하여 11월에 현 성내동 428번지(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건너편 안경나라)에 완공되었다.
▶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1918)
일제는 1917년 12월에 전국의 6개 농공은행(한호, 평안, 전주, 광주, 경상, 함경)을 합병하고, 식민지 산업금융기관으로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신설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 계획에 따라 일본 내각에서는 1918년 상반기 중에 조선식산은행법안을 심사하였고, 그 결과 6월 7일자 조선총독부령으로 조선식산은행령이 시행되었다. 따라서 한호농공은행 충주지점은 다시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 현 위치의 건물 신축(1933) 이후
이것이 다시 1933년 8월초에 건물 신축을 시작하였다. 만 4개월 만인 1933년 12월 14일에 총공사비 22,000원, 본관 63편ㆍ부속건물 34평의 낙성식을 가지며 현 위치에 자리했다. 그리고 1933년 12월 26일부터 업무를 시작해 이후 일제강점기 중의 충주의 중추 금융기관으로 식민 수탈의 전위기관 역할을 해왔다.
▶ 해방 후의 변화와 현재
해방 후인 1946년 4월 1일자로 조선상호은행(朝鮮相互銀行) 충주지점으로, 1951년 1월 1일자로 한국상공은행(韓國商工銀行) 충주지점으로 개칭, 1954년 10월 1일자로 한국흥업은행(韓國興業銀行) 충주지점으로 개칭하였고, 1960년에는 한국흥업은행이 한일은행(韓一銀行)으로 상호를 변경하여 한일은행 충주지점으로, 신생 시중은행과 경쟁하며 충주에서 유일하게 국고취급 은행으로 그 지위를 유지하며 은행업을 이어왔다. 1980년대에 충북은행에 매각되어 충북은행 충주지점으로 기능하다가, 충북은행이 조흥은행에 합병되면서 건물을 일반에 매각했다. 이후 한동안 가구점으로 임대되어 사용되다가 2010년 이후 상권 침체에 따라 방치되어 왔다. 그것을 2016년에 충주시에서 매입하였고, 2017년에 등록문화재 지정신청을 하여 5월 29일에 등록문화재 제683호로 지정된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
● 충주금융조합의 변화(NH농협은행 충주지점, 성내동 305번지)
▶ 충주금융조합(忠州金融組合)의 설립(1909~1916)
1907년 6월 5일, 탁지부령(度支部令) 제16호 지방금융조합 설립에 관한 건이 공포되었다. 그리고 1909년 5월 14일자로 설립된 충주금융조합은 7월 21일자로 허가되어 9월 18일에 충주와 청풍 2개 군을 구역으로 업무를 개시하였다. 1년이 지나고 병탄된 후 일제강점기에 들어선 충주에는 각종 조합이라는 명목의 전위기구가 성립되었다. 1915년에 씌어진 <최근의 충주>에는 ① 충주학교조합 ② 충주자위조합 ③ 충주지방금융조합 ④ 충주군황색연초경작조합 ⑤ 내지인농사개량조합 ⑥ 충주군지주조합 ⑦ 충주상업조합 ⑧ 읍내면가주리잠업조합 등이 기록되어 초기 식민지 이주 상황에서의 신생 전위기구 성립 상황을 기록해 놓고 있다. 이렇게 시작된 조합 중에 현재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며 농업협동조합으로 변신해 이어진 것이 바로 충주금융조합이다.
▶ 금융조합의 분할과 성장(1917~1945)
1917년 3월에 청풍(淸風)금융조합이 설립되며 분리됐고, 1919년 8월에는 목계(牧溪)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엄정, 산척, 소태, 가금의 4개 면을 조합구역으로, 1921년 3월에는 대소원(大召院)금융조합이 설립되어 이류, 신니, 주덕의 3개 면을 조합구역으로 분할하게 되었다.
그런 중 1926년 5월에 본래 사용해오던 건물을 철거하고 건평 36평에 건축비 9,700원으로 신축공사에 들어가 9월 10일에 준공하였다. 그리고 1935년 8월에 청사 일부가 부후(腐朽)하여 개축을 결정하고 경비 2,859원으로 9월말까지 완료를 목표로 공사에 들어갔다. 이 기간 중에 임시 집무공간은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청사, 즉 성내동 428번지 공간 건물을 사용했었다. 이후 현재 위치에서 금융조합 업무를 이어오며 해방에 이르렀다.
▶ 해방 후의 변화와 현재
충주금융조합은 해방 공간, 미 군정기에도 충주금융조합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이어 1948년 정부수립 후에 금융조합과 농회(農會)의 농업은행(農業銀行)으로의 통합 논의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원만한 결정에 이르지 못하고 6.25가 지난 1956년 4월 30일에 가서야 농업은행이 발족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충주금융조합은 1956년 5월 1일자로 (주)농업은행 충주지점으로 업무를 이양하며 명칭을 변경했다. 이때 목계(牧溪), 주덕(周德), 노은(老隱)의 3개 출장소를 두었다.
(주)농업은행 충주지점은 1959년 9월 15일에 공사비 31,505,000환으로 본건물 72평, 부속건물 26평을 12월 20일에 준공하고, 12월 24일 낙성식을 가지며 충주의 2대 금융기관으로 재도약하게 되었다. 그리고 1961년 8월 15일에 중원군농업협동조합이 발족, 창립기념식을 가지며 구 농업은행 지점과 구 농협을 통합해 우리에게 익숙한 농협(農協)으로 이어온 것이다. 그간 여러 차례 농협법의 개정에 따른 조직 개편과 구조조정 등을 겪어왔지만, NH농협은행 충일지점은 1909년 5월에 설립된 충주금융조합을 모태로 110년간 그 자리에서 충주의 주요 금융기관으로 있어 왔다.
● 무엇을, 어떻게 …?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 건물 철거 주장의 핵심이 무엇일까? 일제 잔재의 청산이라는 1차적인 명분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서 있어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충주의 대표적인 금융기관의 변모 과정을 들여다보면,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기억하고 되뇌일 것인가 하는 문제와 만나게 된다.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라고 했다. 실체없는 내용을 설명하는 것은 일방적인 지식 전달일 수 있다. 이 땅이 아파했던 지난 20세기의 슬픔을 무조건 철거해야 한다고 주장만 한다면, 그 뒤의 일은 누가 어떻게 할 것인가?
▶ 1592년 임진왜란 시 탄금대 전투 희생자의 경우
다른 예이지만, 1592년 임진왜란의 탄금대 전투에서 희생된 8천 고혼(孤魂)을 신립(申砬)이 이끌었던 8천 군사(軍司)로 이해하는 것이 보통이다. 우리의 사서(史書)에도 구체적인 사실을 밝혀놓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탄금대 전투를 이끌었던 왜장(倭將) 소서행장(小西行長)의 일지와 기타 기록들을 통해 보면 군사의 희생은 3,500여 명이고 민간인, 즉 충주 사람의 죽음이 최소 5천에서 6천이다. 여기에 충주에서 징발된 군사를 최소 2천으로 잡는다면, 8천 고혼의 대부분은 충주 사람이라는 사실과 맞닥뜨리게 된다. 이 땅, 곧 현장에 보이는 것 하나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가지고 설명하며 이해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 땅과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이 감내해야 했던 아픔에 대한 기억법(記憶法)을 찾는 것과 같은 숙제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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