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1930년 대소원공보교 만세운동과 박철동과 그들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11]

112. 1930년 대소원공보교 만세운동과 박철동과 그들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11]

 

오늘 글의 재료가 역대 이래로 적다. 계기가 된 묘비문을 먼저 옮기는 것에서 시작하자.

 

▲ <박철동의 묘 및 묘비>중국 하북성 찬황현(贊皇縣) 황북평촌(黃北坪村)  

박철동(朴喆東) 선열(先烈)

1915년 대한민국 충청북도에서 출생, 충주에서 항일학생운동에 참여

1931년 2월 중국으로 망명

1934년 1월초 낙양군관학교(洛陽軍官學校) 제2기생으로 입학, 1935년 졸업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朝鮮民族革命黨)에 가입, 동년 화남(華南)지구로 파견되어 가던 중 복건성(福建省) 천주(泉州)에서 일본군에 피체, 일본 구주(九州)형무소에서 3년 옥고를 당함

1938년 가을 출옥 후 중국 운역(運域)으로 망명

1939년 낙양에 주둔한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에 입대

1941년 12월 12일 하북성(河北省) 원씨현(元氏縣) 호가장(胡家莊) 지구 대일전투에서 26세의 젊은 나이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장렬히 전사 순국

 

대한민국정부에서 선열의 공훈을 기리어 1993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국장 추서

 

2002년 12월 26일

 

“충주에서 항일학생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중국으로 망명하여 호가장 전투에서 순국한 박철동 선생이라고 있다는데 혹시 아니?” 라는 것이 작년 12월에 받은 질문이었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 가도록 두었던 그 질문을 다시 받고 자료를 찾아보았다.

 

▶ 일제의 기록 : 남화한인청년연맹 회원

 

그의 이름이 적힌 문서는 1939년 7월 8일자의 <사상에 관한 정보철 4, 경고특비(京高特秘 제808호의 3,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 관계자 검거에 관한 건>에 박제채(朴濟彩) 가족의 검거와 관련하여 남화한인청년연맹 회원 이름을 열거하는 중에 박철동(朴喆東)이 보인다. 이 문서에는 제천의 이용준(李容俊)과 충주의 류흥식(柳興湜) 등 우리 지역 인물의 이름도 같이 열거되어 있다. 앞서 1935년에 체포되어 큐슈(九州)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고 했는데, 이에 대한 판결문 자료는 확인하지 못했다.

 

▶ 추도식과 1주년 기념대회

 

그리고 1942년 2월 28일의 추도식 기사와 12월 12일의 순국 1주년 기념대회 기사가 확인된다.

 

어제 4열사 추도식 거행

 

[본보 소식] 전시수도인 중경(重慶)에서 활동하고 있는 중국ㆍ일본ㆍ한국ㆍ대만 및 국제문화협회 등 16개 단체는 어제 오후 신생활운동 구락부에서 형태(邢台) 전투에서 사망한 조선의용대 제3지대원 손일봉(孫一峯)ㆍ왕현순(王現淳)ㆍ최철호(崔鐵鎬)ㆍ박철동(朴喆東) 등 4열사에 대한 추도식을 거행하였다. 어제 모임에는 한국임시정부의 각 부ㆍ회 수장을 비롯하여 약 2백여 명이 참석하였다. 추도식에 참석한 각국 대표들은 이구동성으로 네 열사는 인류의 자유와 문명을 위한 반침략 전쟁에서 장렬하게 희생되었다고 그들의 공적을 높이 평가하였다.

 

추도식 첫머리에 김약산(金若山;김원봉)이 네 열사의 사적(事蹟)을 보고하였다. 이어 대만 대표 이우방(李友邦), 중국 대표 왕봉생(王芃生) 씨 등이 조선 민족의 반침략 정신을 높이 평가하는 내용의 연설을 행하였다.(중경 『대공보(大公報)』, 1942년 2월 28일)

 

[中央社 소식] 한국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는 화북(華北)의 적후에서 적들과 4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작년 12월 12일 벌어진 형태(邢台) 전투는 특히 격렬하였다. 이 전투에서 손일봉ㆍ왕현순ㆍ최철호ㆍ박철동 등 광복군 제1지대 제3구대원 4명이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김세광(金世光)ㆍ조열광(趙熱光)ㆍ황통삼(黃通三) 등 대원은 중상을 입었다. 그러나 광복군은 중대장 이하 적군 백여 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광복군 제1지대원들은 먼저 간 동지들을 애도하기 위해 12일 오전 12시 반 남안(南岸)에 위치한 지대본부에서 4열사 순국 1주년 기념대회를 열기로 하였다.(『신화일보(新華日報)』, 1942년 12월 12일)

 

박철동의 활동과 존재에 대해서는 충분히 확인된다. 그러나 충주(忠州)에서 그와 관련된 부분은 현재 찾아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묘비명의 이력에서 보이듯 이곳에서 나서 자라 출발했던 것이 분명하다면, 그 출발을 ‘충주에서 항일학생운동에 참여’에서 찾아야 한다. 1915년 생인 박철동에 대한 가정은 1930년에 있었던 대소원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 대소원공립보통학교 학생만세운동(1930년 2월 7일)

 

즉, 1929년 11월 3일에 본격적으로 전개된 광주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한 광주 학생들의 대일항쟁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된다. 1930년 2월 7일 대소원 장날(음력 1월 9일)을 맞아 대소원공립보통학교 학생 30여 명이 기를 두르고 만세를 불렀다. 이에 충주경찰서에서는 서장 이하 수 명의 경관이 급행하여, ‘5학년 황준길(黃俊吉, 17), 6학년 성낙일(成樂一, 19), 5학년 조태국(趙泰國, 16), 6학년 임병학(林炳學, 21), 6학년 김병수(金秉壽, 18), 5학년 오준학(吳俊學, 19), 5학년 정만형(鄭萬亨, 17), 5학년 도선봉(都先鳳, 17), 3학년 박운양(朴雲陽, 14), 5학년 박기현(朴基鉉, 14)’ 등 10명을 검속하여 취조를 시작했다.(동아일보. 1930. 2. 13.) 4명을 구류하고, 추가로 2명의 동리 청년을 인치하여 취조하였다. 여기에 다시 3월에 ‘류신덕(柳信德) 29일간, 박의양(朴義陽) 29일간, 이상열(李相烈) 25일간, 한백곤(韓百坤) 10일간, 임용근(林龍根) 29일간’ 5명의 청년을 구류 조치하였다. 총 15명을 검거 조사하여 구류조치하거나, 관련 학생들을 퇴학조치하는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 관련자의 한 사람으로 박철동을 분류하는 것이 여러 정황상 맞을 것이다. 왜냐하면 1930년 당시에 충주에서 학생운동은 대소원공립보통학교 만세운동 밖에 없기 때문이다.

 

15명의 이름이 보이지만 박철동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한백곤(韓百坤)의 경우는 인근 중앙탑면 창동 출신으로 박철동과 동갑이었던 것이 확인된다. 대소원공립보통학교의 학군 내에 거주했던 재학생 및 청년들이 관계된 사건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정리는 아직 미흡하다.

 

▶ 박철동과 그들에 대한 자리매김을 위하여

 

우선 관계 인명에 대한 사실 확인부터가 쉽지 않다. 대소원공립보통학교의 졸업생명단은 국가기록원에 문서이관이 되었다고 한다. 그것의 열람 등은 개인정보보호법에 의해 원활하지 못하다. 또한 동 법에 의해 대소원면사무소에서 확인가능한 각 개인의 제적부 열람도 첫 단계부터 막혀있다.

 

이역만리 타국 타향에 묻힌 세월이 벌써 78년이다. 26세 청년의 죽음이 그의 선택아닌 선택이었던 상황이 못내 안타깝다. 그리고 지금 여기가 고향임에 틀림없으나 그것을 증명할 길이 막힌 것 역시 안타까운 현실이다. 위에 열거된 15명의 대소원 또는 인근의 당시 청년들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나 집안 후손들이 있다면 알려주었으면 하는 바람과 함께 박철동과 그들의 삶을 재구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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