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 일제강점기의 충주 운수ㆍ운송업 전개 과정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20]

115. 일제강점기의 충주 운수ㆍ운송업 전개 과정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20]

 

2016년 5월 19일. 충주의 대표적인 물류운송기업인 중앙운수㈜의 창립 60주년 기념행사가 있었다. 1956년에 창립해 현재까지 이어오는 지역의 장수기업이다. 당시에 이 회사의 설립과 관련된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이를 통해 6.25 이후의 충주 지역 운수ㆍ운송사업의 재시동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 조선시대 물류ㆍ운송의 단면

 

충주는 역사 이래 남북 교통의 요지였다. 그러한 사실을 이중환의 택리지(擇里志)에서 금천(金遷)과 가흥(嘉興)에 대한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금천(金遷)과 가흥(嘉興)이 가장 번성하다. 금천은 두 강이 마을 앞에서 합친 다음, 마을을 둘러 북편으로 흘러나가므로, 동남쪽으로 영남의 물화(物貨)를 받아들이고 서북쪽으로는 한양과 생선 및 소금을 통하여 민가(民家)가 빗살처럼 촘촘하여, 한양의 여러 강마을과 흡사하다. 배의 고물[舳]과 이물[艫]이 맞닿아서 하나의 큰 도회로 되었다.

 

가흥은 금천 서편 10여 리 지점에 있다. 강이 동남쪽에서 서북편으로 흘러가고 마을은 남쪽 언덕에 있다. 부용산 한 가지가 강을 거슬러 우뚝하게 솟아서 장미산(薔薇山)이 되었는데, 이것이 가흥의 주산(主山)이다. 국가에서 여기에 창(倉)을 두어, 영 남쪽의 경상도 일곱 고을과 영 북편의 충청도 일곱 고을의 세곡[田賦]을 거두어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시켜, 뱃길로 서울에 실어 나른다. 주민은 객주업(客主業)으로써 미곡(米穀)을 출납(出納)할 때에 간여하여 이문을 노리며, 가끔 횡재하는 수도 있다. 두 마을에는 과거에 올라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의 집도 많다.” (이중환의 택리지 중 <충주> 부분)

 

이것이 조선시대 조세 운송 체계에서 한강 수운(水運)을 이용한 현상을 정리한 것이라면, 현대 운송의 주류인 자동차와 기차 등을 이용한 상황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 하는 점도 정리할 필요가 있다.

 

▶ 1908년 청주까지 관찰부 금고 수송 10일(牛車)

 

1900년 이후 운송 체계의 변화를 특정할 시기를 정해야 한다. 1908년 6월 5일 충청북도 관찰부가 청주로 이전된 후에, 관찰부의 금고를 옮기는데 열흘이 걸렸다고 한다. 운반 방법은 충주에서 청주까지 가는 길의 마을과 마을에 부역으로 우마차에 금고를 전달하여 이어가는 방법이었다고 한다. 자동차의 이용이 보편화되지 못한 상황을 알 수 있다.

 

▶ 서울 - 충주간 승합자동차 영업 시작(1913)

 

충주에 자동차를 이용한 여객 운수업이 처음 시작된 것은 1913년이다. 즉, 게이오의숙(慶應義塾)을 졸업하고 돌아온 민대식(閔大植)이 황금정 1정목(을지로 1가)에 사무실을 두고 경성-충주간에 승합자동차 영업을 개업한 것이 시작이다. 그리고 1916년 3월 10일에는 경남자동차상회(京南自動車商會)에서 경성 - 충주간 직통 자동차 운행 허가를 받아 본격적인 영업을 시작했다. 이 때에는 매일 오전 8시 30분에 서울과 충주에서 각각 출발하였고, 약 8시간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서울 충주간의 노선을 1925년에 김동진(金東進)이 쓴 <영월행(寧越行)>에서 읽을 수 있다. 종로(鐘路;8시 30분) → 을지로(당시 황금정) → 왕십리 → 광나루(1시간) → (도선;10분) → 중간에 점심 → 이천(利川;11시 25분) → 곤지암 → 장호원 → 충주(오후 3시 40분) 종점으로 20여년 전까지 국도 3호선을 중심으로 운행되던 완행버스 노선을 떠올리면 이해될 것이다.

 

▶ 육운(陸運)과 수운(水運)의 교차

 

1915년에 발간된 <최근의 충주(最近之忠州)>에는 직업별(職業別) 분류가 있다. 여기에는 ① 충주마차조합(忠州馬車組合;대수정) ② 이헌곡시송(二軒谷市松;니켄야시마츠, 용산(龍山) 서촌(西村)대리점, 본정) ③ 내국통운충주출장소(內國通運忠州出張所, 대수정) 등 3곳이 나타난다. 마차조합은 충주 내에서 이용하는 주요 교통수단이었다. 반면 서촌상회(西村商會)나 내국통운 충주출장소는 수상(水上)과 육상운송(陸上運送)을 겸한다고 했는데, 육상운송은 충주 시내에서 탄금대까지, 그리고 탄금대에서 서울(용산)까지 수운을 이용해 물건을 실어내는 일을 주로했다. 물론 이 배편에는 화물 뿐만 아니라 여객 운송을 겸했다.

 

▶ 청주 - 충주 노선의 시작(1914)

 

또한 교통ㆍ운수 상황에서 ‘최근에 와서 충주 - 청주간에 자동차 운전이 개시되어 하루 건너마다 발착하므로…’라고 하여 충주-청주간 정기 운송 노선이 생긴 것을 알 수 있다. 이 충주-청주간의 운송노선은 1914년에 마련되었다. 서울에서 자동차운송 사업을 하던 직거가일(織居嘉一;오리이 요시카즈)이 조치원 - 청주간의 영업허가를 얻으며 시작되는데, 청주 - 충주간은 여객 수요가 적어 부정기적으로 운행하다가, 짝수일에 1회씩 정기운행하기 시작했다고 한다.(청주연혁지, 1923) 오전 7시 30분에 청주를 출발 → 증평(潘灘, 8시 30분) → 음성(9시 30분) → 대소원(10시 20분) → 충주(11시 14분)에 도착하여 1시간 있다가 12시 15분에 출발, 4시에 청주에 도착하는 1일 1회 왕복하는 방식이었다. 이를 위해 충주에 직거(織居)자동차부 충주영업부가 있었고, 충주에 이주한 일본인 우야좌평(宇野佐平;우노 사다이라)이 충주정류소를 운영했다.

 

▶ 지역간 노선의 확충과 철도의 연장

 

서울, 청주 중심의 노선을 시작으로 1918년 3월 6일자로 대구에 살던 이등길삼랑(伊藤吉三郞;이토오 키치사부로우)이 대구 - 충주간 노선 운행도 시작했다. 이외에도 강릉 - 충주간, 김화 - 충주간의 정기노선이 개설되어 운행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던 중 1928년 12월 25일에 증평 - 충주간의 충북선이 연장ㆍ개통됐다. 기존에 운송물량의 60%를 차지하던 수운(水運)이 급속히 쇠퇴하고, 철도와 화물자동차를 이용한 육운(陸運)중심으로 판도가 바뀌었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여 1931년에 발간된 <충주관찰지>의 광고에는 ① 조선トラツク(트럭)주식회사 ② 조선운송주식회사 충주지점 ③ 조선철도자동차주식회사 충주영업소 ④ 조선철도주식회사 ⑤ 충북무진주식회사 등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조선트럭운수주식회사는 충주에 본점을 설치하고 제천, 영월, 원주, 춘천, 경성 등의 각지에 지점ㆍ출장소를 배치해 수 십대의 트럭 운전에 의한 영업을 준비하고 있고, 기타 크고 작은 10여 명의 운송업자가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충주관찰지. 1931년 상황)

 

▲ <자료:매일신보. 1940. 1. 6> ‘축흥아신춘(祝興亞新春)’ 충주단체 광고 중에 충북자동차운수주식회사 충주자동차영업소, 조선중앙무진주식회사 충주출장소, 충북선 충주역전 조선운송주식회사 충주출장소, 조선트럭운수주식회사 충주지점의 상호가 확인된다.  

그리고 1935년에는 충주 출신으로 서울에 <경충(京忠)무역사>를 차린 정영택(鄭永澤, 필명 정호승(鄭昊昇))도 등장한다. 그는 종로 4가에 2층 건물을 얻어 1층에 경충무역사를 운영하고, 2층에는 <조선문학사> 사무실로 내놓았다. 충주 출신의 이무영(李無影), 이흡(李洽, 또는 이강흡(李康洽)), 지봉문(池奉文, 또는 지복문(池福文)) 등과 함께 <조선문학(朝鮮文學)>을 경영하던 시기였다.

 

▶ 황색연초와 운수업의 관계

물류 운송체계의 확립에 있어서 교통망의 확충은 필수이다. 또한 수지타산이 될만한 물건의 확보 역시 중요하다. 과거 세곡의 집산에 따라 수운이 발달했던 충주에서는 그와 관련된 업종들이 창(倉) 설치 지역을 중심으로 성황을 이뤘었다. 관을 중심으로 한 창(倉)과 달리 상업 중심의 포구로 목계(牧溪)가 수운의 영향 아래에서 전성기를 이루기도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점된 상황에서의 수운은 1928년 충북선 철도의 충주 연장 이전까지 대량 물류 수송의 중추적 기능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물건(物件)이 바로 황색연초였다. 1913년 9월에 본격 시작된 충주시구개정 과정에서 부민약국 삼거리로 불리는 그곳에서 탄금대까지 이어지는 신작로가 개설된 것도 담배 운송과 관련된다. 탄금대로 뻗은 신작로의 개설 목적이 충주를 거점 산지로 시작된 황색연초 재배와 관련된 것이라면, 당시 화물운송 회사의 위치 역시 황색연초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중앙운수㈜의 첫 사업장 주소지가 충주군 충주읍 용산리 665번지이다. 용산동 영진아파트 후문 부근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에 있었던 조선트럭운수㈜의 주소지는 용산리 834번지로 확인된다. 주로 지곡다리에서 충주공고에 이르는 길 언저리에 해당된다. 이것은 용산동의 용산에서 시작해 영진아파트를 부지까지 확장되었던 소위 ‘충주 전매청’이라 부르던 ‘전매과(專賣課) 충주출장소’의 시작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수납된 연초의 수송과 관련해 인근에 운수회사들이 포진했던 것이다.

 

특정 물건만을 취급하는 것은 아니지만, 안정적인 물량 확보가 가능한 대량의 물건이 존재하는 것은 교통망 확충과 더불어 지역 기반의 운수업 발달의 중요한 요인이다. 그런 측면에서 충주 황색엽연초가 일제에 의해 조직적으로 재배됨과 동시에 그에 부수한 운송체계 구축 측면에서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런 현상은 충주원예조합이 충인동에 있을 당시에 개인용달이나 운수회사가 그쪽 지역에 몰렸던 상황과 비교해 보면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충인동 지역이 화물 운수업의 주요 공간으로 자리했을 당시에는 충주 특산으로 성장하던 사과의 집매ㆍ출하의 중심공간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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