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중외일보 기사에 등장했던 충주군 용산리 사적보존지 44,619평과 호암택지개발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출토된 용산사(龍山寺)라는 사명(寺名)이 음각(陰刻)된 기와를 통해 용산사의 위치를 추론한 바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광부처거리에 있던 충주철불(보물 제98호)가 있던 절이 곧 용산사일 가능성이 높다는 가정도 해보았다.
1914년 11월부터 충주시내 각 동에 대한 측량조사가 진행됐다. 짧게는 1개월, 길게는 3개월 정도 걸려서 당시 충주면내의 16개 리동에 대해 행해진 작업은 지적도(地籍圖)의 원도(原圖)가 되었다. 그리고 측량을 바탕으로 지번이 새로 부여되었다. ‘지번 - 가지번 - 지목(地目) - 지적(地積) - 신고(申告) 또는 통고(通告) 연월일 - 소유자(주소, 씨명 또는 명칭) - 적요’ 순으로 정리하여 각 리동 단위의 지적부로 정리한 것이 토지조사부(土地調査簿)로 1914년을 기준으로 작성되었다.
지적도와 토지조사부를 이용해 연수동 지역의 미확인 장소였던 여제단(厲祭壇, 연수동 737번지)을 찾고, 1997년도에 발굴조사했던 성황사(城隍祠) 터를 확인했다. 두 곳의 공통점은 토지조사부상에서 지목이 사사지(社寺地)이고, 지적도에는 ‘사(社)’로 표기하고 있는 점이다. 소유자에 있어서 여제단은 연수동 소유였고, 성황사는 국유지였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용산사 자리로 추정했던 충주공고와 그 주변을 지적도를 통해 살펴보았다.
해당 지역의 지적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는 것은 용산리 135번지로 지목은 잡종지(雜種地)이고, 소유는 국유였다. 이것을 중심으로 주변을 살피던 중 용산리 130번지의 조그만 점 같은 지점에 ‘사(社)’로 표기되고, 국유지인 곳이 확인됐다. 이것이 무엇일까 한참을 고민하게 됐다.
보통 광부처거리 또는 광불거리라 불리는 곳이 있다. 영진아파트 상가와 충주공고 테니스장 서북쪽 모서리가 만나는 네거리 지점을 일컫는다. 그곳에 지금은 대원사에 모셔져 있는 충주철불이 개천에 방치됐었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해져 기록돼 있다. 이것과 관련하여 130번지의 사사지가 의심되었다. 그리고 충주철불이 1914년에 청녕헌 앞에 옮겨지기 전에 있던 곳이 바로 지적원도의 용산리 130번지라는 결론을 내렸다.
성남초와 공고 사이를 흐르는 도랑이 이어져 45도 좌측으로 꺾여 흐르는 1/3지점쯤에 위치한 130번지는, 과거 성남초를 다닐 때의 내 기억에 다리 건너 처음에 위치한 ‘우리문구’ 뒤편 모퉁이쯤으로 추정된다. 지금은 중흥S클래스 아파트가 들어서 도랑도 묻혔고 지번도 바뀌었다. 충북건재철물 뒤의 골목(동촌 6길)이 그나마 남아있는 옛도랑의 흔적이다.
여기서 다시 1923년 기사에 언급된 용산리 사적보존지 44,619평을 가늠해 보았다. 충북건재철물(형설로 160)을 기준으로 형설로(여고방향)를 따라 충주공고를 지나 서림알뜰주유소(형설로 102)까지, 거기에서 동쪽으로 남산아파트 방면으로 가서 나들가게 대성강마트(금봉6길 26)까지, 거기에서 서북쪽으로 난 작은 골목을 따라 남부교회 주차장까지 와서 충주공고와 성남초 사이의 길(금봉4길) 끝에서 대각선으로 중흥S클래스를 지나 다시 충북건재철물까지 공간 면적을 가늠하면 대략 44,500평 정도가 된다. 1920년대의 사적보존지 면적과 근사치가 되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해당 지역이 충북건재철물에서 합쳐지는 두 도랑의 중간에 놓여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앞서 추론했듯, 해당 공간이 용산리 사적보존지로 가장 유력했으며, 대단위 면적의 공공재로 존재했을 경우에 1946년에 인가ㆍ설립된 충주사범학교가 단기간에 들어설 수 있었다고 했던 점과 맞아떨어진다. 현재의 충주공고 부지 대부분은 1914년 측량 당시에 주변 일부가 분할되어 개인 소유로 되었지만, 용산리 135번지는 잡종지로 국유였었던 것이 확인된다. 따라서 주변의 일부 개인소유지를 매입하여 빠른 기간 내에 대단위 면적의 학교를 건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모든 것이 충주공고를 중심으로 그 앞뒤의 택지를 포함한 공간을 가리키고 있다. 또한 그것은 용산(龍山)이라는 지역 내에 존재했던 용산사(龍山寺)를 가리킨다. 광불로 불리며 자리했던 곳 역시 본래 있던 절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면, 이 일대가 용산사가 있었던 곳일 가능성이 가장 유력하다. 따라서 충주철불은 충주용산사철불(忠州龍山寺鐵佛)이란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용산사(龍山寺)와 안림동 어림의 의림사(義林寺)는 문헌에 기록된 절이 아니다. 용산사는 최근 출토된 기와 한 장에서 절이름이 확인됐고, 의림사는 1989년 대원고등학교 건축 과정에서 발견된 청동반자(靑銅飯子)의 명문에서 절이름이 확인됐다. 최근 의림사지로 추정되는 곳의 좌대가 임의로 옮겨져 관심있는 이들의 걱정을 더하게 한 일이 있다. 추정은 되지만 구체적인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절집의 규모 등을 가늠할 수 없다. 용산사도 마찬가지다. 현재 기와 한 점에 새겨진 절이름이 유일한 증거이다. 하지만 물증을 뒷받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료를 통한 합리적인 추론을 해보면 충주공고 부지, 그 중에서도 충주철불이 있던 곳과 가까운 곳을 중심으로 가람이 배치되었다고 한다면, 테니스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간이 가장 유력할 것으로 판단된다.
택지개발, 도로 개ㆍ증설 등으로 확대ㆍ파괴되는 유적이 수없이 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충분한 사전 검토를 통해 유력한 판단이 선다면 용산사와 의림사 터를 발굴하는 일이 우선 급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용산사 부지로 추정되는 첫 지점(충북건재철물)은 충주읍성의 동벽과 남벽 모서리에서 직선거리로 150m 정도 떨어져 있다. 지금과 다른 고려 전기의 불교가 국교였던 상황을 고려해 본다면, 용산사의 실체를 밝히는 것은 충주가 충주(忠州)라는 이름을 가진 당시에 도심에 존재했던 절집의 위상과 의미를 재해석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천년 도시 충주의 앞부분의 모습을 재구함과 동시에 도시계획 또는 문화관광 등 현재 사업에 있어 고려해야 할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충주철불좌상을 검색해 보면, ‘단호사 철불좌상처럼 원래 어디에 봉안되었던 불상인지는 알 수 없다.’라는 설명으로 시작된다. 과연 그럴까? 원래 어디에 봉안되었었는데, 그 어디가 어딘지 확인을 미루고 있지나 않은 것인지 반문한다. 그리고 충주시와 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 등 관련 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집 잃고 떠돌고 있는 충주철불의 한을 풀어주었으면 한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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