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19세기 충주의 제의공간(祭儀空間)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09 [18:31]

120. 19세기 충주의 제의공간(祭儀空間)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09/09 [18:31]

 

제의(祭儀)라 하면 제사(祭祀)와 의식(儀式) 의례(儀禮)의 줄임말이다. 그런 만큼 엄숙(嚴肅)했고 엄정(嚴正)하며 엄격(嚴格)하기도 했다. 사적인 의례는 기본이지만 공적은, 즉 관(官)에서 주관하는 제의가 따로 있기도 했다. 19세기 말에 충주에서 행해진 제의 공간으로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에서 확인되는 것이 여럿 있다.

 

洋夷侵犯非戰則和, 主和賣國(서양 오랑캐의 침입에 맞서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평하자는 것이며, 싸우지 않고 화평을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이다)라는 척화비(斥和碑)가 세워지고 쇄국정책이 시작됐다. 이 즈음, 충주는 임진왜란 이후 손보지 못했던 충주읍성을 목사 조병로(趙秉老)의 지휘로 고쳐 세웠다. 그리고 1872년 전국 군현에 내려진 지도 제작의 명에 의해 충주목지도가 그려져 조정에 보내졌다. 거기에 그려진 사직단(社稷壇), 객사(客舍), 향교(鄕校), 성황제단(城隍祭壇), 여제단(厲祭壇), 양진명소제단(楊津溟所祭壇) 등이 충주목사가 제관이 되어 실행했던 제의의 주요 공간들이다. 또한 1898년 정부에서 조사한 각 지방의 향사(享祀)에 관한 청의(請議)를 정리한 문서에 의하면, 충주에서는 ① 양진명소(楊津溟所) ② 호성사(護聖祠) ③ 충렬사(忠烈祠) ④ 영악제(靈嶽祭) ⑤ 독제(纛祭) 등 5개 행사의 비용 지원을 신청하였다.

 

그리고 업무편람 격인 호서읍지(湖西邑誌, 1871)에 각각의 제의에 대한 기록이 있다.

 

① 사직대제(社稷大祭). 헌관은 친행(親行)한다. 대축(大祝) 1원(員)(은 유림 중 향교에서 가리고, 두 차례 관청에 공궤(供饋)한다. 제 집사는 6원이다. 저녁 한 때만 관청에서 공궤한다. 감관(監官) 1인, 단직(壇直)은 5명 중 4명을 감하고 나머지 1명이다.

 

② 성황(城隍)의 발고제(發告祭)는 봄에 1차, 가을에 2차로 지낸다. 헌관은 친행한다. 대축 1원은 관청에서 공궤한다.

 

③ 여제(厲祭)는 봄에 1차, 가을에 2차로 지낸다. 헌관은 친행한다. 대축 1원으로 두 때 공궤한다. 제 집사는 6원이다. 저녁 한 때만 관청에서 공궤한다. 감관 1인, 수호군 10명이나 지금은 없다.

 

④ 양진명소제(楊津溟所祭)는 봄에 2차, 가을에 1차례 한다. 헌관은 1원이며 친행한다. 대축 1원으로 연원찰방도(連原察訪道)가 예(例)에 따라 한다. 제 집사는 6원이다. 저녁에 한 때 관청에서 공궤한다. 감관 1인, 산직(山直)이 10명이나 지금은 없다. 수직군(守直軍) 1명이다.

 

⑤ 독제(纛祭). 헌관은 영사 도(營使道)로 친행한다. 두 때의 진지(進支)와 밤에 별미를 관청에서 등대한다. 아헌(亞獻)과 종헌(終獻)은 훈련청(訓練廳)의 천별장(千別將)으로 두 때 관청에서 공궤한다. 제 집사 6원과 대축, 교생(校生)은 저녁에 한 때 관청에서 공궤한다. 원생(院生) 27인은 서원(書員) 1명, 수복(守僕) 1명, 동ㆍ서재 고직(庫直) 2명, 대청직(大廳直) 1명, 재직(齋直) 3명, 지공(紙工) 1명, 토역수(土役手) 1명, 등패(等牌) 5명, 구종(驅從) 3명, 모속(募屬) 20명, 노비(奴婢) 59명이나 지금은 없다.

 

⑥ 석전제(釋奠祭). 헌관 14원은 대축 1원, 봉향(奉香) 1원, 봉로(奉爐) 1원은 입재(入齋)에서 과재까지 이른다. 관청에서 가을 세 차례, 봄 두 차례 공궤한다. 제 집사는 6원으로 저녁 한때 공궤한다. 교생 90인은 30인으로 다시 정했다. 제향(祭享) 집사생 20인, 수리(修理) 유사(有司) 9인, 모속 160명, 완호군(完護軍) 40명, 재직 11명은 모두 혁파되었다.

 

⑦ 충렬사 서원(忠烈祠書院)의 제사. 원생 21인, 수리생(修理生) 20인, 서원(書員) 1명, 수복(守僕) 1명, 등패(等牌) 7명, 모속(募屬) 64명, 어제(御題) 비각직(碑閣直) 6명은 모두 혁파되었다. 고직(庫直) 2명, 재직(齋直) 9명은 각 1명으로 다시 정하였다.

 

⑧ 팔봉서원(八峯書院), 운곡서원(雲谷書院), 누암서원(樓巖書院)은 신미년(辛未年, 1871)에 훼철되었다.

 

⑨ 지천사(知川祠)와 용강영당(龍岡影堂), 일송영당(一松影堂), 하강사(荷江祠)는 기사년(己巳年, 1869)에 훼철되었다.

 

⑩ 청덕사(淸德祠)는 불정면(佛頂面)에 있다. 수호군(守護軍) 15명을 신미년(1871)에 혁파했다.

 

⑪ 기우제(祈雨祭). 폐백(幣帛), 저포(苧布) 15척(尺)이다. 처음에는 사직(社稷)에서, 두 번째는 양진(楊津)에서, 3차는 용담(龍潭)에서, 4차는 월악(月岳)에서 한다. 처음에는 2일 간격으로 돌고, 두 번째는 1일 간격으로 돌아가며 행한다.

 

⑫ 각 제향(祭享)에는 양(梁)ㆍ서(黍)ㆍ도(稻)ㆍ미(米) 16석 3두 및 술쌀(酒米) 3석 8두를 회감(會減) 환미(還米)하고, 사창(司倉)의 장졸은 환색(換色, 환품)하여 납입하는데 지금은 고루 나누어 결전(結錢)하되 상하한다.

 

당시의 제의는 어떤 면에서 지역의 축제와도 같다. 그러나 현재 행해지고 있는 것은 향교의 봄ㆍ가을 석전제 밖에 없다. 또는 이러한 제의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제의가 행해진 공간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객사(客舍)는 성내동 KT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여지승람(輿地勝覽, 1759)에 의하면 읍성의 주요 공해(公廨)의 하나로 44칸 규모였다고 한다. 집 이름이 중원관(中原館)이라고 했다. 일제시대에 찍은 충주간이농업학교 건물로 사용할 당시의 사진에서 현판이 확인된다. 이곳은 조선조 왕들의 전패(殿牌)를 모시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예를 올리던 곳이다. 또는 외국 사신이나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다. 우리가 많이 듣던 종묘사직(宗廟社稷)에 비추어 종묘(宗廟)에 해당하던 곳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사직대제가 행해진 사직단은 곡식의 신과 토지의 신을 위하던 곳이다. 충주 사람들은 어머니회관이라고 하면 쉽게 이해한다. 그 산이 사직산이고, 그 곳에는 사단과 직단이 있었다. 그것이 1912년 명치천황(明治天皇)의 장례식을 위한 봉도단(奉悼壇)이 설치됐었고, 그 후 신사와 러일전쟁승전 기념비를 세워 변질됐다. 또한 해방 후에 1순위로 신사를 부수고 그 자리를 충주 전망대로 한동안 사용했었다. 그리고 일제 때부터 계획했던 상수도 공사가 진행되면서 고도차에 의한 수압(水壓)으로 수돗물을 공급하기 위해 1956년에 배수지(配水池)를 만들며 완전히 파괴했다.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진 상황이고, 그렇다고 그곳에 표석이 하나 있는 것도 아니다.

 

석전제(釋奠祭)가 행해지는 향교는 교현동의 그 향교를 말한다. 1872년의 충주목지도에 표현된 향교 공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동무(東廡), 왼쪽에 서무(西廡)가 표시되었다. 그리고 그 정문은 풍화루(風化樓)라고 하여 2층 누문으로 기록해 놓았다. 제의공간을 중심으로 표현해 놓았기에 명륜당과 동재(東齋)ㆍ서재(西齋)가 생략된 그림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호성사(護聖祠) 공간이 별도로 있지만 지도에는 생략되었다. 다만 지역 유학자들의 중심공간이었던 사마소(司馬所)가 향교와 관련된 공간으로 존재해 있다.

 

충주향교는 1896년 유인석이 이끈 호좌의진의 충주성 공격 당시에 화재로 전소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듬해인 1897년에 재건하였다. 하지만 현재 향교 공간은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의공간은 온전히 유지하고 있지만, 강학공간에는 명륜당만 있고 동ㆍ서재가 없는 상태이다. 다만, 1914년에 측량된 지적원도에는 동ㆍ서재를 포함한 공간 전체의 흔적이 보인다. 아마도 이후에 길을 새로 내면서 동ㆍ서재 건물을 훼철하고 향교 공간 자체가 축소된 것으로 여겨진다. 부속된 호성사의 경우가 그나마 원형에 가장 가깝게 유지되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제의공간에 해당하는 동ㆍ서무 역시 창고로 이용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생각해 볼 일이 많은 공간이다.

 

성황제단은 충주목지도에 표시되어 있고, 또한 1997년도 충주산업대학교 박물관 주관의 연수택지개발지구 발굴조사를 통해 확인된 공간이다. 특히 발굴조사를 통해 철마(鐵馬)와 토제마(土製馬)가 다량 출토되었고, 건물 자리도 확인되었다. 말과 관련된 유물의 출토는 그곳이 성황사였음을 방증해 주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추가적인 보존 조치가 이루어지지 않아 택지로 개발되고 말았다. 해당 장소는 1914년 지적도에서 부여된 첫 지번은 연수동 436번지로, 현재 지적편집도 상에서는 연수동 476-2과와 사잇길 건너의 1412번지를 아우른 곳이었다. 성황사는 주로 외부에서 들어오는 액(厄)ㆍ질병ㆍ재해ㆍ호환(虎患) 등을 막아주는 기원을 했던 장소이다. 따라서 이 땅에 살던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 가장 밀접한 제의공간이며 신앙장소로서 역할했음에 비추어 당시의 여건에서 보존조치를 취하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충주목지도에 여제단(厲祭壇)으로 표시된 곳이 있다. 연수동 지역으로 판단했고, 예성춘추(蘂城春秋)에 동수산상(東守山上)에 있다고 하여 위치의 혼선이 계속된 공간이기도 하다. 최근 지적도를 통해 그 정확한 위치가 확인됐다. 지번상 연수동 716번지로 과거 연원역으로 통하는 입구에 해당되기도 한다. 이 곳은 아직 택지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공간으로 그나마 보존 가능성이 높다. 현재 편의점이 들어서 있어서 더욱 그러하다. 여제단은 여귀(厲鬼)를 위하던 곳이다. 여귀란 여러 가지 사정으로 인하여 제사를 받을 수 없는 무사귀신(無祀鬼神) 혹은 불행한 죽음을 당한 원혼을 가리킨다. 이들 여귀의 원한을 제대로 풀지 않으면 호환 마마 역질 등의 탈이 난다고 여겨 여제를 시행하여 모든 탈을 방지하기 위한 제의로 행해졌던 것이다. 즉 한 많은 원혼을 달램으로써 살아있는 사람들의 안녕을 기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충주의 지명에 ‘예귀당터(禮鬼堂-)라는 것이 교현동에서 찾아진다. 이것은 여귀를 예귀(禮鬼)로 와전해 잘못 전해진 예로 짐작된다. 그 공간 또한 전혀 엉뚱한 고구문거리 언저리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1871년에 이미 그 제의의 단절 또는 축소 현상이 기록된 점에 비추어, 그로부터 근 3세대에 걸쳐 맥이 끊기며 생긴 현상으로 추정해본다.

 

양진명소제는 탄금대 양진(楊津)에서 행해졌던 것으로 연원찰방도에서 주관했다고 한다. 19세기 전반기 충주지역을 두루 다니며 기록한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중에 있는 ‘충주형승변증설(忠州形勝辨證說)’에는 “읍치로부터 서북 7일 쯤에 있는 작은 산 하나가 두 강이 합치는 안쪽에 있는데, 신라 때에 우륵선인이 가야금을 타던 곳으로 12층 바위가 있다. 이 곳을 이름하여 탄금대라 한다. 그 아래에 양진명소(楊津溟所)가 있고 대(臺) 중간에 사당(祠)이 있는데 호랑이 머리를 던져 비 내리기를 빌면 효험이 있다. 신립이 임진왜란 때 배수진을 여기에서 쳤다가 패했고, 여기에서 명을 다했다.”고 기록했다. 즉 지금의 열두대 중간에 사당이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그가 직접 본 것을 기록한 것으로 여겨진다. 충주와 관련된 제의 행위 중에 가장 오랜 기록 중의 하나인 명산대천에 지내는 소제(小祭)의 장소로 양진명소가 일찍부터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대상 공간만 그나마 남아있는 경우이다.

 

1898년의 문서 기록에 등장하는 영악제(靈嶽祭)는 양진명소제와 동격인 명산에 지냈던 소제의 흔적으로 여겨진다. 즉, 충주에서 명산에 지내던 제의는 월산산신에게 지내던 것으로 월악산이 대상이 된다. 이러한 제의가 행해질 당시에 월악산을 지난 제천시 덕산면도 충주목의 관할 지역이었음을 감안하면, 명산대천에 지내던 제의가 19세기 끝자락까지 존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충렬사서원, 팔봉서원, 운곡서원, 누암서원 등 서원의 제향 역시 있었지만, 충렬사서원의 제사를 제외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특이한 것으로 아직 그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것이 독제(纛祭)이다. 기록을 보면 앞선 다른 제의와 달리 독제는 특정한 공간에 신위(神位)를 따로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진영(鎭營), 목(牧), 찰방도(察訪道) 등 충주의 주요 관공서가 연합한 형태를 띄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행사의 실체가 무엇인지 현재로서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한 가지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있다. 즉 예성춘추에 기록된 ‘무학당 앞 무예노리’라는 것이 그것이다.

 

무학당(武學堂)은 읍 서 충주교(忠州橋)로부터 탄금대로 통행하는 가도 현 농산물검사소 적(跡)에 소재하였는데, 이조 숙종대왕 39년 즉 단기 4046년(1713) 계사(癸巳)에 무예를 연습하기 위하여 무학당 6칸을 건축하고 또 현 삼원국민학교 문전 가도변 적에 가단(假壇)을 설치한 후, 매년 추기를 이용하여 무학당 전 좌우에 기치창검(旗幟槍劍)을 나열시킨 후 충주영장(忠州營將)과 연원찰방(連院察訪)이 구갑주(具甲冑) 기역마(騎驛馬)하고 가단에 질치왕래(疾馳往來)하며 왜장(倭將) 청정(淸正)을 효수(梟首)한다고 대성호칭(大聲呼稱)하며 무예를 연습하는 고로 차시에는 관람인이 노소남녀를 막론하고 사방에서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더니, 이조 고종왕 30년 즉 단기 4226년(1893) 계사(癸巳)에 폐지하였다.

 

이 기록에 근거한다면 독제는 대규모 군사퍼레이드와 같은 형식의 열린 공간에서 행해졌던 일종의 축제로 여겨진다. 무예를 연습하는 동시에 일반인들에게 공개함으로써 사방에서 운집하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지역 최대의 축제로 생각해 볼 개연성이 크다. 1893년에 폐지하였다고 했지만, 1898년의 각 지방 향사에 관한 청원서에는 양진명소(춘2차, 추1차, 67양 5전), 호성사(춘추, 39양 1전), 충렬사(춘추, 28양 3전 8푼), 영악제(춘추, 50양 2전), 독제(춘추, 78양 6푼)가 충주에서 신청되었는데, 횟수 대비 신청 비용이 가장 큰 것이 확인된다. 그만큼 대규모 행사였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행사의 고증과 재연은 비록 전승 맥이 끊긴 지금에 있어 쉽지는 않겠지만, 지역의 특화 콘텐츠로 되살릴 수 있는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개략적이나마 19세기에 충주에서 행해지던 제의의 종류와 그 공간에 대해 정리하였다. 개별적인 공간과 의식으로 보기보다는 충주라는 지역 전체의 연중 행사와 관련하여 관을 중심으로 행하던 공식행사였다는 점에서 다시 살필 이유가 있다. 또한 공간의 현재 상황을 각각 확인하고 그 공간이 가지는 역사적 의미에 걸맞게 되살리는 방안도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역사적 공간에 대한 복원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역이 가졌던 위상만큼 지역에서 행해졌던 과거의 사실은 이 지역이 앞으로 나아감에 있어 우선해야할 정체성과도 연결된 문제라는 생각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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