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과

신옥주 | 기사입력 2023/09/11 [10:10]

파과

신옥주 | 입력 : 2023/09/11 [10:10]

▲ 신옥주 주부독서회원     ©

내가 읽은 책 중에서 60대 여성이 킬러로 나온 작품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었지만, 외국 영화에서나 가끔 나오는 등장인물을 주인공으로 한국의 여성작가가 썼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마음을 갖게 한 작품이 구병모의 ‘파과’이다. 물론 내 생각이 지극히 주관적이고 편견에 치우친다는 것을 알지만, 수많은 독자들 생각이 그러리라고 짐작하며 읽었다. 출판사에서 알려주는 줄거리를 보면 주인공은 40여 년간 날카롭고 냉혹하게 청부살인을 업으로 삼고 살아온 60대 여성 킬러 '조각(爪角)'이다. 언뜻 보기에는 노년의 정석에 가까운 모자라지도 않고 튀지도 않은 차림을 한 일반적인 중산층 노인으로 보이지만, 동네 아니면 백화점 이월 행사장에서 샀을 법한 옷 아래엔 오랜 운동과 훈련으로 다져진 탄탄한 근육이 있고, 옷과 가방 속에는 언제라도 목표물을 해칠 수 있는 무기와 시체 처리 도구가 숨겨져 있다. 몸도 기억도 예전 같지 않아 퇴물 취급받지만, 조각 자신은 언제든 생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다면 기쁘게 맞으리라는 각오로 일에 임한다는 설정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마치 내가 영화감독인양 머릿속에 영상이 떠오를 정도로 시나리오를 읽는 기분이 든다. 등장인물들이 모두 생동감 있고, 대사도 일반인이 할 법한 말을 그들의 목소리를 흉내내며 읽으면 착착 입에 붙는다. 주윤발의 영화를 보고 자란 우리 세대는 르와르는 남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는데, 여성의 몸으로 더구나 60대 노인이라니 얼마나 신선했는지 모른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장면이라고 혹자는 비평하겠지만, 한살한살 나이가 들면서 30대로 몸을 움직이는 일을 하는 것과 60대로 몸으로 일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다름을 알기에 이 주인공에게 쉽게 감정이입했다.

 

특히 소설의 첫 장면은 제발 누군가 영화로 제작했으면 싶을만큼 강렬하고 짜릿했다. 매일 일어나는 일상이라 슬쩍 넘겼는데 반전이 있다. 퇴근길을 재촉하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금요일 밤 시간대의 전철 안, 선 채로 꾸벅꾸벅 졸던 50대 후반 남자가 잠에서 깬 게 민망했는지 공연히 마주한 의자에 앉은 젊은 여자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찌른다. "아저씨 왜 그러시죠?" 여자가 묻자 아저씨가 답한다. "아저씨이? 젊은 년이 눈 똑바로 뜨고 대드냐. 잘한 것 있냐. 노인 앞에 두고 모른 척 핸드폰이나 처들여다보는 주제에." "네, 할아버지, 저 임신했어요." "요즘 젊은 년들은 죄 결혼도 작파하고 애새끼도 안 뽑고 의무를 게을리하는 주제에 저 편할 때만 임신 타령이지. ... 너 혼자만 애 뱄냐? 혼자만 애 낳아?" 너무나 흔한 광경이라 대부분 모른 척 넘기는 상황을 글로 읽으니 느낌이 더 쌩하게 오고, 내가 살면서 무얼 놓치고 사는지 얼마나 비겁한지를 홀로 깨우치며 얼굴을 붉히게 만든다. 게다가 저 사람이 죽었으면 하지만 정말로 죽을 것이라고 생각조차 않는데, 조각이 그를 죽이는 장면에서 통쾌함보다 저래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드는 모순적인 나를 알게 된 장면이라 많은 생각을 가지며 책을 읽었다.

 

세월이 흘러 조각은 청부업자로서 전성기를 지나 한물간 퇴물 취급을 받는다. 젊은 시절 스승이자 보호자였던 류에게 전수받은 실력으로 한치의 실수도 없이 방역(이 책에서 살인을 방역이라 부른다)을 처리했지만 슬슬 은퇴해야 할 시기라는 것을 본인도 주변 사람들도 느끼고 있다. 나이를 먹으니 신체적인 노화뿐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는 킬러 투우는 사사건건 그녀를 고의적으로 방해하는데, 투우는 조각이 젊은 시절 제거했던 대상의 어린 아들이었다. 나는 아이가 자라서 복수하려고 왔는지, 아니면 킬러로서의 조각의 실력을 이겨보려고 왔는지 궁금해하며 읽었다. 마지막을 읽으며 여성 작가이기 때문에

 

독자에게 이런 감성을 이끌어냈다는 생각이 든다. 투우가 만들어 놓은 함정임을 알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당당히 대응하는 조각은 끝내 투우를 죽이게 된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당신은 아직 갈 때가 안 됐다는 거네." 희미해지던 양치식물의 냄새가 사라지고 그녀는 투우의 눈을 감긴 다음, 역시 무심코 중얼거린다. "이제 알약, 삼킬 줄 아니." 어느 시점에 어떻게 투우를 기억해 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조각은 투우가 누구인지 생각이 났고, 투우는 조각에게 다른 무엇보다 자신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는 존재의 여부를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물론 다른 해석을 하는 독자들이 많겠지만 나는 이렇게 느꼈다.

 

마지막 장면, 조각은 투우에게 한 손을 잃고 남은 다섯손가락에 네일아트를 한다. 한 손만의 고객을 처음 본 어린 네일아트사의 대응도 무척 신선했다. 한 손을 물들이고 있는 네일아트도, 조각 자신도, 심지어 세상 대부분 것들이 언젠가는 사라지고 제 기능을 상실할 것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 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 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언젠가 사라질 운명이라고 해도 우리 모두 빛나게 살아봐야 하지 않을까 라는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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