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1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18 [10:23]

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1

김희찬 | 입력 : 2023/09/18 [10:23]

 

문경 새재를 넘어와서 탔던 242번 충주 시내버스를 다시 타고 들어가 종점에 닿는다. 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걷기 위해서이다. 충주 시내를 벗어나며 펼쳐지는 계절 풍광은 직행버스를 타고 갈 때와는 다른 멋이 있다. 시내버스는 마을과 마을을 들르며 가기 때문이다.

 

연풍레포츠공원에 내려서 들이마시는 공기는 시내의 그것과 다르다. 크게 한 모금 들이마시고 걷기 시작하면 곧바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빽빽한 길을 만난다. 은행나무를 생각하면 노랗게 물든 가을에 걷기가 제멋일 것이다. 은행나무 사이로 살짝살짝 비치는 신선봉의 봉긋 솟은 봉우리들을 곁눈질하며 잠깐 걸으면 지금은 한적한 연풍과 이어진 옛 3번 국도와 만난다. 공교롭게도 수안보까지 걷는 중에 가장 난이도가 높은 곳이 작은 새재 아래의 은행나무 터널길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은행나무 터널길은 연풍 땅이다. 거기를 걸어올라 만나는 지점이 곧 충주와 연풍의 경계가 된다.

 

그 경계에서 새로 닦인 자동차 전용도로와 만나는 곳까지 화천리 비탈길을 내리 걸으면 된다. 가끔 자전거 타는 이들을 만나게 되는데 가벼운 인사를 나눠도 괜찮다. 비탈길을 한 굽이 두 굽이 걷다가 잠시 상상할 일이 있다.

 

대소원면 매현리에 사당이 있는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 1422 ~ 1484)가 시로 남긴 이야기가 그 길 어딘가에 있다.

 

<길가 산기슭의 무덤 두 개>

* 연풍에서 이십 리쯤 되는 곳의 길가에 있는 산기슭에 무덤 두 개가 있는데, 봉긋하게 솟은 것이 마치 길가에 있는 돈대와 같았다. 그곳 사람들이 전하는 말에 “경주에 사는 아전이 혼자 그 집에서 기르던 개와 함께 책 보따리를 짊어지고 걸어서 서울로 과거를 보러 가다가 도중에 병이 들어 이곳에 이르러 죽었다. 그러자 그 개가 집에 돌아가 슬피 울면서 마치 애절하게 호소하는 듯이 하였다. 그 아들이 개가 혼자 돌아온 것이 의심스럽고 또 하는 짓이 이상하여 곧바로 양식을 싸 짊어지고 개를 따라 길을 나섰다. 개가 빨리 달리면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그 아버지가 죽은 곳에 도착하여서는 숨이 막혀 죽어 버렸다. 그 아들이 자기 힘으로는 귀장할 수가 없어서 아버지 시신을 산기슭에 가매장하고 개도 그 옆에 묻었다.” 하였다. (距延豐二十里許 道邊斷麓上 有二塚壘壘 若路堠. 土人相傳, 有慶州吏獨 與一家狗 負笈徒步 將赴擧于京師 道病至此 而死. 其狗還家 出入悲鳴 若有哀訴之狀. 其子疑狗獨還 且怪異常 卽齎粮隨狗而去. 狗疾造先導 遂至死所 乃長鼻氣暍而死. 其子力不能歸葬 擧父屍厝于麓上 幷瘞狗其傍云.)

 

誰憐道死委山阿 길 가다가 죽은 시신 뉘 가련히 여기리오

犬獨還歸報主家 개만 홀로 되돌아가 주인집에 알렸다네

與子偕來仍暍死 그 아들과 같이 와서 숨 막혀서 죽었거니

隴頭雙塚世傳誇 언덕 위에 쌍총 있어 후대 전해 자랑하네

- 이승소, 『삼탄집』 권4, 시

 

때는 1467년이다. 이승소가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한 후 연풍현을 순시하러 가는 길에 보고, 물어서 들은, 그래서 남긴 이야기다. 연풍에서 20리 쯤 되는 곳이 곧 작은 새재에서 내려와 만나는 화천리 그 비탈길 중간 어디쯤이 된다. 더구나 거기에 묻힌 경주 사람은 과거를 보러 가는 길이었다고 한다. 1467년을 기준으로 식년문과(式年文科)라고도 부르던 정기 시험은 1465년(세조 11)이 을유년(乙酉年)으로 식년시(式年試)가 있었던 해이다. 사건은 1465년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문경 새재를 넘고 작은 새재를 넘어 내려오다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았다. 그래서 거기 비탈길 어디쯤이 맞을 것이다. 지금은 충주 땅이지만 1963년에 상모면이 당시 중원군에 편입되기 전까지 지금 걷는 작은 새재 비탈길은 연풍 땅이었다. 일제가 우리 땅에 손대기 전에는 연풍현(延豐縣)으로 독립되었던 곳이기도 하다.

 

전북 남원 옆에 오수라는 곳에 전해지는 ‘오수 개’ 이야기가 의견(義犬) 이야기의 대표적인 예로 전해지고 있다. 어느 봄날 주인을 따라 이웃 마을 잔칫집에 갔다 오다가 거나하게 취한 김에 잔디밭에 누워 주인은 잠들었다. 공교롭게 들불이 나서 주인이 잠든 쪽을 향해 불길이 번져오자 개는 주인을 깨우려고 짖었지만 깊은 잠에 빠진 주인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개는 근처 개울에 들어가 몸을 적셔 주인 주변의 잔디를 여러 번 적시고는 지쳐서 끝내 죽고 말았다.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전국적으로 몇 개가 분포하며 전해진다. 충주 만해도 엄정면에 ‘개비 거리’라는 곳이 있고 유사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여기 작은 새재 비탈길의 두 기의 무덤 이야기는 일반적인 의로운 개 이야기와는 다른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뒤에 고인의 아들이 두 무덤을 경주로 이장을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 무덤이 있던 자리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연풍에서 20리쯤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작은 새재로 연풍과 충주의 경계가 나뉘는 충주 쪽의 비탈길 어디쯤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곳이 곧 작은 새재를 지나 내리 걷고 있는 화천리의 비탈길이다. 한양에 과거를 보러 가기 위해 경주에서 떠났다고 했으니, 문경 새재를 넘어와 충주 쪽으로 길을 잡아들었을 것이다.

 

개가 마당에서 대문을 지키지 않는 지금, 안방을 차지하고 있는 지금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저런 생각을 하며 내리 걷다 보면 새로 난 국도와 고속철도가 지나는 곳에 다다른다. 계절에 따라 새소리, 매미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사실 길을 내려 걷는 내내 골짜기에 울려 퍼지는 자동차 소리가 함께 걷고 있다. 거기에 내년 말부터는 고속철 지나는 소리가 보태질 것이다. 수십 미터 높이로 공중에 떠있는 고속철도를 길게 연결해 상상해 보면 그 노선이 옛길의 언저리를 따라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마치 1910년대에 일제가 경부선 복선화 계획을 세웠던 것과 겹쳐지는 듯하다. 그 복선화라는 것이 지금처럼 두 개의 철로를 놓아 상ㆍ하행선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었다. 청량리에서 여주를 거쳐 충주를 지나고 문경을 거쳐 대구에서 경부선과 연결하는 계획이었다. 그것은 달리 중앙선(中央線)으로 이름하였었다. 문경까지는 대규모 탄광이 개발되면서 경북선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철도가 놓였었고, 그것은 해방 후에 시멘트 원료인 석회석 광산이 개발되면서 점촌에 시멘트공장이 세워지며 요긴하게 이용되다가 폐쇄되었다.

 

이제 다시 고속철도가 놓이는 노선에는 역사의 뒤안길로 잊히는 국도 3호선, 그 이전의 영남대로(嶺南大路)로 불리던 그것이 밑그림으로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두고 수안보역과 문경새재역이 한창 공사 중인데, 주변 사람들이 그것에 거는 기대가 크다. 문경 새재를 넘어서 걸으며 가흥까지 이어지는 걷기에는 중간중간 고속철도 노선과 만나는 경우가 여러 번 있다. 이번 걷기의 커다란 밑그림이 되는 옛날의 역로(驛路)와 지금 새로 놓고 있는 고속철도 노선과 기차역을 생각해 보면 그것에 거는 기대가 무엇인지 느끼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지금은 경제적 관념에서 역세권(驛勢圈)으로 부르는 그것과 과거 역이 있던 마을을 중심으로 흥했던 상황을 역세권이라고 놓고 보면 땅길이나 철도, 또는 물길이 지나던 상황과 유ㆍ불리(有不利)가 명확하게 이해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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