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2

김희찬 | 기사입력 2023/09/18 [10:25]

작은 새재에서 수안보까지 - 2

김희찬 | 입력 : 2023/09/18 [10:25]

 

작은 새재의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면 새로 닦인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나게 된다. 거기에서 어떤 길을 걸을지 선택해야 한다. 자전거전용도로가 있는 물안보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약간의 위험이 따를 수 있는 자동차전용도로를 걸을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화천>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생길 수 있는 선택이고 갈등이다. 나는 자동차전용도로를 따라서 걸었다.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들면서 예전의 국도 3호선의 화천 시내버스 정류장 지점을 뭉개서 끊어 놓았다. 그것이 연결되어 있다면 걷기에 그만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교통사고를 막기 위한 방편이겠지만, 사다리라도 설치하여 통행할 수 있도록 하면 걷기에 더없이 좋을 것 같았다.) 잠시잠깐 자동차전용도로를 지나면 뇌곡 마을로 연결된 예전의 국도 3호선의 잔길을 만나며 걷게 된다.

 

뇌곡(雷谷)이라! 그 이름만을 놓고 보면 무서운 생각이 든다. 천둥소리가 나는 골짜기로 뜻풀이를 할 수 있는데, 자동차전용도로를 따라 걷는 잠시간에는 무서운 속도로 달리는 자동차 바퀴의 마찰음이 굉장하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전용도로 아래의 예전 국도를 따라 걸을 때에는 그 소리가 상대적으로 작게 들린다. 수안보 지역에서 운행되는 마을버스는 옛길로 연결된 마을을 요리조리 잘도 지나다닌다. 마을 규모는 작지만 뇌곡 마을에는 커다란 농협 창고가 하나 있다. 거기에는 ‘하늘소’라는 상표가 눈에 띄는데, 충주 지역에서 판매되는 잡곡에서 자주 보는 상표이다.

 

뇌곡을 지나면 월악산 휴게소가 나온다. 그쯤이 이번 길의 중간쯤 된다. 다리도 쉴 겸 지날 때마다 매번 들렀던 곳이다. 종교단체가 운영하는 휴게소라는 선입견에 불편함이 없다면 전체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을 갖게 한다.

 

휴게소를 나와 신호등 네거리 모퉁이에는 커다란 느티나무가 서있다. 이 길을 지난 수많은 사람들이 한번쯤 쳐다보았을 것인데, 예전에는 거기에 작은 돌부처가 있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멀리 수안보의 돌고개를 바라보며 오른쪽으로 난 옛길을 따라 걸으면 ‘대안보’라는 마을비와 함께 아기자기한 마을이 나온다. 월악산의 지릅재에서 내리는 석문천(石門川)이 마을 중간을 가로질러 흐르는 곳인데, 예전에 안부역(安富驛) 또는 안보역(安保驛)이 있던 역마을이다. 1910년대에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마을을 우회하는 길을 냈지만, 본래는 돌고개로 이어진 길이 곧장 가는 길이었다.

 

이 마을은 연풍현에 속했지만, 충주의 연원역(連原驛)을 중심으로 관리되던 연원도(連原道)의 남쪽 역이 있던 곳이다.(연원도의 남쪽 끝 역은 연풍현의 신풍역(新豐驛)으로 그곳에도 고속철도 개통과 함께 연풍역이 들어선다.) 역이 있었기 때문에 성장한 마을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나 옛날의 역과 관련된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어떠한 설명도 안내도 없다. 이 마을의 지적원도를 살펴보면 여느 마을과 달리 국유(國有) 가옥과 전답이나 임야가 많다. 역이 있었던 마을의 지적원도에서 보이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기록을 찾아보면 근대사의 변화 중심에 놓였던 마을임을 알 수 있다.

 

1894년 7월 25일 [甲午七月二十五日]

 

일본 병사가 충주를 지나간 일은 이미 임금께 급히 보고하였으며, 오늘 접한 연풍현감 한진태(韓鎭泰)의 보고 내용에, “7월 17일 문경부(聞慶府) 공형의 방위사통(防僞私通)을 접해 보니, 일본 중장(中將) 일행 30여 명이 방금 도착하였으며, 고군(雇軍) 355명을 연풍현에 통문으로 연락하여 내일 이른 아침에 색리(色吏)를 정하여 안보참(安保站)에서 인솔하여 기다려 달라고 일본인이 직접 청하러 왔습니다. 이는 동래(東萊)에서부터 올라오는 연로의 각 읍을 통행하는 관례라고 하였습니다. 짐꾼의 삯과 먹을 것에 대한 값은 수대로 내어 주어 처음부터 폐해를 끼친 일은 없으며, 백미·피모(皮牟)·간장·큰 나무로 된 반상·사기·솥 등의 물건들은 요청한 것에 의거해 주겠다고 하였으므로, 고군 355명과 함께 장리(將吏)를 입회하여 안보참으로 보내 호송하도록 하였습니다.

 

18일 지나갈 때, 짐꾼 중에 짐을 지지 않은 자들에게는 고가(雇價)를 주지 않았는데, 등이 구부러지고 넘어지는 등 모습이 애처로웠습니다. 조령(鳥嶺)에서 충주에 이르기까지 50리의 근처 5개 동(洞)은 백성들이 모두 놀라서 겁을 먹고 도망하여 마을들이 비었으며, 일본군들은 매일 30~40명, 혹은 40~50명 정도가 계속 이어져 끊이지 않았고, 또 전신선을 가설[架電]한 후에 안보동(安保洞)에 분국을 설치하였는데, 거의 수백 명이 여전히 머물고 있어서, 놀라서 흩어진 백성들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잘 타일러 경계하도록 하여도 조금도 정돈되지 않아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연유를 급히 보고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통과하는 일본군은 적절하게 응대하고, 흩어진 백성들을 편안하게 살 수 있도록 어루만져 주어야 합니다. 이후의 상황은 연속하여 급히 보고하라고 단단히 타이르고 명령을 보냈습니다. 그러한 연유를 임금께 급히 보고 드립니다.(<금번집략(錦藩集略)>, 별계(別啓), 갑오년 7월 25일(음))

 

충청도 관찰사가 1894년 7월 25일(음)에 올린 장계의 내용이다. 갑오농민전쟁 또는 동학혁명으로 부르는 그 일이 끝나고, 청일전쟁으로 이어진 상황의 끝자락 일이다. 안보참(安保站)과 안보동(安保洞)이 등장한다. 갑오경장으로 불리는 1894년 조치에 의해 역제(驛制)가 막 폐지된 시기이기도 하다.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군이 매일 수십에서 수백 명씩 서울로 향하는 상황에서 안보역은 그들의 차지가 되었다. 직전의 역제가 실시될 때에 안부역이 있었고, 거기에는 파발 등의 급한 공문서를 전달하는 안보참도 있었다. 그것을 그대로 일본군이 부산에서 서울까지 전보선을 가설하면서 그들의 병참소(兵站所)로 전환하여 안보동에 전신선 분국을 설치하였다. 이것은 충주전신전화국으로 기억되는 전보선의 연결 지점의 한 곳이었고, 과거에 가흥역, 가흥창, 가흥참이 있었던 중앙탑면 가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시작된 난리 아닌 난리에 놀란 사람들은 마을을 버리고 겁에 질려 피난하였고, 그 빈 마을에 일본군이 득시글했던 것이다. 이어서 벌어진 큰 사건이 을미사변이라는 국모 시해사건이었고, 단발령이었다. 양력을 공식적으로 쓰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을미의병(乙未義兵)으로 부르는 의병전쟁이 1896년에 일어났다. 그 상황에서 안보는 마을 전체가 불타고 마을 사람이 죽는 엄청난 피해를 입기도 했다.

 

(1896년) 8월 14일 내부대신 박정양 씨 보고가 군부에 왔는데, 그 전 충주관찰사 민영기 씨가 보고 내에 연풍군수 보고를 보니, 지난 4월 문경군 오봉정에서 노학수가 비도 괴수 100명을 데리고 출몰하여 작폐하다가 청주 병정에게 쫓겨 흩어지고, 괴수 김한성 엄봉치가 일인에게 잡혀 죽었는데, 5월 20일 비도 30여 명이 총과 칼을 가지고 관문에 들어가서 김한성을 죽였다 칭탁하고 군수와 관속을 결박하고 무수히 난타하여 가두고, 돈 3000냥과 군복 3000벌을 달라고 곤욕을 보이니 할 수 없어 돈 120냥을 간신히 출판하여 주니, 비도들이 본군 안보동으로 가서 백성의 집 134호를 불을 놓음에 동리 사람 셋이 죽었은즉, 거기 군대에게 신칙하여 비도를 급히 치게 하리라 하였다더라.(<독립신문>, 1896년 8월 18일자, 2면 3단)

 

옛날 안부역으로 기능하며 번성했던 마을의 역사와 격변기에 몸으로 막아냈던 안보동의 이야기는 시골의 작은 마을로 전락하며 잊혔다. 돌고개 너머의 수안보온천을 기억할 뿐이지 안부역이 있던, 걷던 시절의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아니 몰라서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다.

 

지금은 대안보동으로 불리는 그곳을 가로지르는 석문천에는 마을을 연결하는 다리가 두 개 있다. 구름다리처럼 앙증맞은 아랫다리 옆에는 다섯 기의 선정비와 한 개의 4H 비석, 그리고 ‘옛과거길’이라고 새긴 새로 만든 비석이 가지런하다. 그곳에서 왼쪽으로 돌고개 쪽을 보면 너머에 수안보가 있고, 오른쪽으로 보면 산을 뭉개 새로 짓고 있는 수안보역이 보인다. 수안보역이 만들어지면서 현대적인 역세권에 들어가는 마을이 되겠지만, 안부역은 본래 역세권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그것이 과연 어떻게 전개될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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