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마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3/10/02 [11:28]

123. 마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3/10/02 [11:28]

 

최근 교육계를 중심으로 ‘마을’에 대한 교육적 접근을 위한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런데 그 마을을 어떻게 규정하고 어떻게 접근하며 또 무엇을 이끌어낼 것인가 하는 기본적인 문제에 대한 고민은 부족한 것 같다. 아직 초창기의 혼선 단계이기에 충주시내를 대상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타당한 예를 찾아보고자 한다.

 

지금은 마을의 경계가 없다. 그렇다고 오래된 마을, 즉 중심 마을의 기능과 역할 또는 그 규모 또한 모호하다. 이것을 정하지 않고 마을에 대한 접근과 이해를 시도하는 것은 어쩌면 가장 무모한 방법 중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기본적으로 충주의 경우 역대 지지(地誌)나 지도류에 각 면단위의 중심 마을이 표시되어 있어 마을을 살피는 기준을 세울 수 있다. 또한 그것이 20세기 들어서면서 진행된 일제의 지도측량에 의해 기록된 사례가 여럿 있다. 뭔가 인공적인 인위적인 변화가 있기 직전 단계의 모습을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여러 자료를 종합해 마을에 대한 이해의 기준을 마련하는 것은 지금의 모습을 역으로 추정해 내고 앞으로 나갈 마을 단위의 여러 가지 일을 도모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먼저 1872년에 제작된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와 1910년에 측량된 5만분의 1지도에 나타난 지명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충주는 남변면(南邊面)과 북변면(北邊面)으로 구분되었다.

 

목지도에서 남변면에는 ‘중부(中部), 성내(城內), 남부(南部), 용산(龍山), 상단(上丹), 하단(下丹), 풍동(楓洞), 서부(西部), 달천(達川), 관산(觀山)’의 10개, 북변면에는 ‘교전(校前), 안심(安心), 기탄(歧灘), 연원(連原), 방정(方井), 내리(內里), 칠지(柒枝)’의 7개 마을이 기록돼 있다. 이것은 동쪽의 경우 남산에서 발원해 염밭을 흐르는 물길을 따라 용산동과 교현동의 경계를 기준으로 하고, 서쪽의 경우 부민약국 삼거리 근처에서 달철대교로 나가는 옛길을 경계로 하여 구분된 것으로 파악된다.

 

이것이 1910년 측량에서 남변면은 남부동(南部洞), 호암(虎岩), 직동(直洞 상하), 구운리(九雲里 동서), 발티(發峙), 관주동(貫珠洞), 도장동(道庄洞), 대제동(大堤洞), 달신동(達新洞), 달천동(達川洞), 송림(松林), 신대(新垈) 하단월(下丹月), 상단월(上丹月), 송정리(松亭里), 능동(陵洞), 상풍동(上楓洞), 하풍동(下楓洞), 상동막(上東幕), 하동막(下東幕), 대가주(大佳洲), 소가주(小佳洲), 사양리(沙陽里), 관산동(觀山洞), 용두동(龍頭洞) 등으로, 북변면은 교동(校洞), 야현(冶峴), 어림동(御林洞), 안심(安心), 약막(藥幕), 요각곡(要角谷), 원대(院垈), 대가미(大加味), 금제(金堤), 조리(鳥里, 島里의 오기), 봉계(鳳溪), 상방동(上方洞), 하방(下方), 신촌(新村), 탄금대(彈琴臺), 칠지(柒枝), 능암(陵岩), 중리(中里), 동수(東守), 연원(連原), 호암(虎岩), 미력리(美力里), (행정리(杏亭里), 목수(牧水), 기탄(岐灘), 용동(龍洞), 사라(沙羅), 구동(臼洞), 종당리(宗堂里), 기동(基洞), 범동(凡洞) 등으로 표시돼 있다.

 

그리고 1915년에 측량된 5만분의 1지도에는 충주군 충주면(忠州面)으로 통합된 상태로 호람리(虎巖里 - 大堤洞, 貫珠洞, 道庄洞), 직동(直洞 - 發峙, 九雲里), 단월리(丹月里 - 上丹月, 下丹月, 松亭里, 丹新里, 松林里), 풍동(楓洞 - 上豊洞, 下豊洞, 陵洞, 東幕里), 가주리(佳洲里 - 大佳里, 小佳里, 沙陽里), 용관리(龍觀里 - 斗潭里, 龍山里), 용두리(龍頭里 - 上龍頭里), 달천리(達川里 - 達新里) 등이 구 남변면 지역의 행정리동으로, 교현동(校峴洞 - 大加味), 안림리(安林里 - 御林里, 安心里, 凡衣洞), 종민동(宗民洞 - 上宗堂, 下宗堂, 院垈, 要角洞, 眞衣谷), 연수동(連守洞 - 東守洞, 虎巖里), 봉방리(鳳方里 - 鳳溪, 上方洞, 下方洞), 칠금리(漆琴利 - 琴臺), 금릉리(金陵里 - 金堤洞), 목행리(牧杏里 - 牧水, 杏亭, 美力里), 용탄리(龍灘里 - 龍洞, 岐灘, 臼洞, 沙羅洞) 등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후의 상황을 반영한 지도가 있다.

 

여기에 1916년에 측량된 1만분의 1지도를 보면 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마을 이름이 보다 자세히 적혀 있다. 즉 동문 밖은 동문리(東門里)라 하여 동촌(東村)이 생기기 이전의 마을을 표시하고 있다. 또한 가장 넓은 구역을 점유했던 용산리(龍山里)의 경우 1부동(一部洞 : 무학시장 및 삼원초등학교 구역), 2부동(二部洞 : 부민삼거리와 사직산 사이의 문화동 구역), 서부동(西部洞 : 빙현교 건너 사직산 동사면 아래의 지현동 구역), 남부동(南部洞 : 제2로터리에서 지곡다리 사이 구역)으로 표시하였다. 교현동(校峴洞)의 경우 향교를 중심으로 만리산 아래까지를 교동(校洞), 교현초와 경찰서 뒤쪽 마을을 야현리(冶峴里), 동아아파트 사거리에서 건대병원 사거리 사이를 주봉리(珠峯里)로 하여 시가지 정리 후의 상황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거부터 불렸던 마을의 이름을 그 위치를 찾아 확인하는 일은 문자로 기록된 지명지나 지지를 통해서는 쉽지 않다. 위의 지도류를 통해 표시된 지명을 가지고 변화 이전의 마을의 위치와 모양을 추적해 내는 것은 마을을 이해하는 첫 점의 기준이 될 수 있다. 특히 아직 포장도로나 직선도로, 복개된 하천이 없는 상황에서 농사를 중심으로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자리했던 마을을 찾고 이해하는 일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은 일이다. 이러한 지도를 통해 확인되는 오래된 마을 중에 현재도 그 원형을 거의 유지하고 있는 마을이 몇 곳 있다.

 

향교 앞의 교전(校前) 또는 교동(校洞)으로 불리던 곳은 교현동의 중심 마을이면서 일부 아직 옛길의 흔적과 마을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그리고 향교 뒤의 야현리(冶峴里)의 경우에는 마을의 골목이 그대로 살아있는 곳이다. 논과 밭을 생업의 기지로 삼던 시기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침수 피해 등이 적은 야산 밑에 자리한 마을의 모양이 원형에 가깝게 남아있는 것은 신기할 정도이다. 이 곳이 아마도 이번 교현동 도시재생사업의 대상 지역의 하나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충주경찰서의 이전 후에 어떻게 변해갈지 또는 어떻게 살려야할지를 고민하기 좋은 도심 속의 오래된 마을이다. 사전에 충분한 조사와 검토가 이루어진다면, 충주에서 옛 마을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 조사나 마을 교육 사업의 모범이 될법한 공간이기도 하다. 그리고 안림동의 약막이나 어림, 안심 같은 곳 역시 부분적인 변화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100년 전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마을로 확인된다. 도심과는 거리가 있는 지역에 자리한 마을들의 오래됨은 또다른 측면에서 해석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다. 그 이유를 마을의 유래와 변화를 통해 찾아낸다면, 이 또한 다양한 형태로 존재하는 마을의 원형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 좋은 예로 삼을 수 있다.

 

도시개발 또는 도심 집중, 외곽의 아파트단지 개발 등으로 주거형태의 변화가 초래됐다. 그러면서 마을과 마을은 별개의 점으로 존재하던 것이 하나의 선으로 구역으로 연결되어 그 구별점이 사라졌다. 그런 가운데 기준이 될 만한 마을을 찾아 정리하는 것은 100년의 시간 동안 변화된 충주의 다양한 모습을 끌어내는 동시에 충주 전체의 변화 첫 점의 기준을 우리 스스로 찾는 계기가 될 것이다.

 

▲ 1910년의 시내와 교현, 안림동  © 충주신문

 

▲ 1915년의 시내와 교현, 안림동  © 충주신문

 

▲ 1916년의 시내와 교현, 안림동  © 충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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