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월동에는 단월역(丹月驛)이 있었다. 충렬사(忠烈祠) 앞에 위치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위치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다. 그러면 그런대로 옛 기록과 현재의 상태를 되짚어 보자.
단월역에 대한 오래된 기록은 1120년대 정지상(鄭知常)의 시에서 등장한다.
단월역(丹月驛)
음천의침화병저(飮闡欹枕畵屛低) : 술 취해 비스듬히 베개 고이니 병풍그림이 눈에 든다.
몽각전촌제일계(夢覺前村第一鷄) : 앞마을 첫 닭 횃소리에 꿈을 깼다.
각억야심운우산(却憶夜深雲雨散) : 문득 생각하니 지난밤 비구름은 흩어졌다.
벽공고월소루서(碧空孤月小樓西) : 푸른 하늘 홑달이 작은 다락 서쪽에 걸렸다.
영남 지방을 다녀오며 <영곡사(靈鵠寺);현재 정심사>를 지난 후에 단월역에 들었던 정지상이 남긴 시 한편이다. 이 시를 첫 편에 꼽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단월역을 ‘예전 단월부곡(丹月部曲)의 땅인데, 고을 남쪽 10리에 있다. 역 남쪽에 계월루(溪月樓)가 있다’고 적어 놓았다.
현재의 단월동 지역으로 그 공간 어딘가에 계월루라는 2층 누각이 강가 쪽을 향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 누대는 1520년대에 충주목사를 지낸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시에 풍정(豊亭)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또한 과거 향소부곡(鄕所部曲)제도가 유지될 때에 부곡으로 특수한 지역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 특수한 일이 역(驛)의 임무와 관계된 것이라면 단월역의 역사는 1000년을 훌쩍 넘긴 그 어느 시기부터 해당된다.
<충청도읍지(忠淸道邑誌)>에는 단월역의 규모를 기록해 놓았다. 즉 ‘연원역(連原驛) 소속으로 주(州)에서 남쪽으로 10리에 있다. 노(奴) 110명, 비(婢) 89명, 대마(大馬) 2필, 기마(騎馬) 7필, 복마(卜馬) 5필이다.’라고 하였다. 단월역은 남쪽의 안보역(安保驛)과 서쪽의 용원역(龍院驛), 북서쪽의 가흥역(可興驛), 북쪽의 연원역(連原驛)과 연결된다. 그 규모에 있어서는 연원역에 버금가는 큰 규모였다.
이곳을 지나간 명사도 많다. 고려시대 정지상을 시작으로 단월역을 지나며 남긴 시편의 작자를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 보면 서거정(徐居正;1420~1488), 양희지(楊熙止;1439~1504), 홍귀달(洪貴達;1428~1504), 김종직(金宗直;1431~1492), 이황(李滉;1501~1570), 박상(朴祥;1474~1530), 박승임(朴承任;1517~1586), 조태억(趙泰億;1675~1725), 윤형로(尹衡老;미상, 조선중기), 신후재(申厚載;1636~1699), 정기안(鄭基安;1695~1767), 신체인(申體仁;1731~1812), 이희발(李羲發;1766~1849) 등이 등장한다. 이 중에 박상의 시에는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주역으로 귀양 가던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를 단월역에서 전별했다는 제목의 시도 전한다. 전남 담양의 유배지로 향하는 조광조가 왜 충주 단월역에서 전별하는 장면이 그려졌는지는 합리적인 의심을 가질만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이들의 왕래가 있었고, 그 중에 단월역에 대한 감상과 심정을 읊은 시들도 많은 역사적 장소의 한 곳이다.
조선시대 역(驛) 제도는 1894년 갑오개혁에 의해 폐지된다. 그 후에 각 역에 속한 토지, 즉 역둔토(驛屯土)와 관련한 소작 문제가 20세기 시작과 함께 대두되며 역의 흔적을 추적할 단서로 남는다.
단월역 관련 사건 중에 1895년 충주관찰부가 설치되고, 다시 1896년 충청북도관찰부로 바뀌어 소위 도청소재지가 되었을 때에 있었던 사실 하나가 확인된다. 1904년 10월 15일에 가흥병참소에 주둔한 일본군 전보선 선로수선반 일행이 점심 참에 단월주막에 들었다. 수선반에서 통역을 맡은 김기용(金基用)이 단월주막 주인 엄덕용(嚴德容)이 자리 소제를 늦게 했다고 하여 주먹다짐을 한다. 그래서 엄덕용의 눈알이 빠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를 두고 충주관찰부의 총순 이근배(李根培)가 그 일행을 체포하여 관찰사에게 데려왔고, 가흥병참소에 주둔한 일본군이 다시 총순 이근배를 강제로 체포해가는 일이 있었다. 이 사건의 경과보고에서 등장하는 관찰사 집무 공간이 ‘선화당(宣化堂)’으로 나온다. 현재로서는 충청북도관찰부가 있었던 1896년~1908년 사이에 관찰사 집무 공간에 대한 명칭이 단월역과 관련된 단월주막 폭행사건 진행 과정에서 유일하게 등장한다.
이후 단월주막 주인 엄덕용은 1907년에 그의 일가 엄덕호(嚴德浩) 및 엄장근(嚴長根)과 함께 8년간 경작해온 전답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이 있었다. 엄덕호는 직전의 단월역토 관리를 맡았던 마름[舍音]이었고, 그 과정에서 단월역에 딸린 역둔토 일부를 경작하며, 이내 그 소유권을 주장하는 일까지 있었던 것이다.
단월역에 딸린 역둔토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그 정확한 수치를 밝히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 하지만 1914년에 진행된 지적원도 작업에서 단월리(丹月里) 소재 국유지를 보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대지는 22필지 14,844평, 논은 17필지 36,530평, 밭은 25필지 121,266평, 임야는 11필지 88,283평으로 총 75필지에 260,923평의 국유지가 단월리에 분포돼 있었다. 단월리 전체 토지에서 국유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대지의 30.29%, 논의 18.37%, 밭의 28.63%, 임야의 90.83%였다. 이것은 단월리 전체 토지에서 34.74%가 국유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이 모두 단월역에 딸린 역둔토인가는 좀 더 조사해 봐야 할 일이지만, 역이 있는 곳 주변에 국유지 분포가 많은 일반적인 현상에 비춰볼 때에 단월역과 관련한 토지 규모의 어느 정도를 가늠할 수 있다.
그렇다면 단월역의 위치는 어디였을까? 유주막(柳酒幕) 삼거리라고 하는 단월정수장 근처의 <유주막> 비석에는 단월정수장 부근을 단월역 자리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 자료를 검토해보면 유주막 부근은 단월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1910년에 측량된 1:5만 지형도나 1914년 측량의 지적원도, 1915년 측량의 1:5만 지형도 등에서 확인되는 위치는 충렬사 앞이 유력하다. 특히 충렬사 앞의 삼거리를 중심으로 단월동행정복지센터 주변의 대지(1914년의 지번 단월리 470)는 1914년 측량에서 5,143평의 단독 대지이고, 그 안쪽의 단월초등학교와 접한 일부 대지(1914년의 지번 단월리 459)는 2,195평의 단독 대지로 확인된다. 유주막 삼거리에서 단월 충렬사로 들어오는 옛길은 남아 있다. 충렬사 앞 길에서 만나는 너른 대지는 상식적으로 마방이 존재했던 단월역 자리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곳 공간의 변형 내지 파괴는 심각할 정도다. 추정 지역 전체의 85%이상은 변형되거나 파괴된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다고 표지석 하나가 제대로 서 있는 것도 아니다.
단월역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다. 충주시 경계내에 있었던 연원역, 가흥역, 용원역, 안부역 등의 다른 역도 제대로 된 표지석 하나가 있는 곳이 없다. 우선은 그 정확한 위치를 조사하지 않은 탓도 있다. 또한 충주의 옛 교통로 상에서의 역할과 위상에 대해 그 노선 상에 있었던 역이나 원(院) 등을 통한 접근이 부족했던 이유도 있다. 뒤늦게나마 더 이상 파괴되거나 변형되기 전에 그 실상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그 결과에 의한 표지석 등의 사실 표시가 우선 진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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