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흥역(可興驛), 가흥창(可興倉), 가흥참(可興站), 가흥발참(可興發站), 가흥점(可興店), 가흥병참(可興兵站) ……
가흥을 찾아가는 여정이 쉽지 않을 것 같다. 무엇을 대상으로 하는가에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그만큼의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기에 충분하다. 이러한 가흥의 역사상 등장은 고려사에 보이기 시작한다. 고려시대에 서울에서 한강을 거슬러 경북 봉화(奉化)에 이르는 길을 평구도(平丘道)라 불렀고, 거기에 속한 30개 역 중의 하나로 가흥(嘉興)이 있다. 가흥은 전통적인 역말이었다.
역말로 성장해오던 가흥에 창(倉)이 설치되면서 가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조선 세조 11년(1465) 음 1월 13일에 호조의 5도 경차관(五道敬差官) 김순명(金順命, 1435~1487)이 충주ㆍ금천 등의 조세 수납청을 가흥역리(可興驛里)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가흥역의 동쪽 2리에 가흥창이 위치했다. 그러면서 수운판관(水運判官)이 자리했었다.
역(驛)과 창(倉)이 공존하면서 가흥이 번성하였지만, 그곳 사람들은 잇속을 챙기려는 아전들의 횡포에 몹시도 힘든 삶을 살았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남긴 시 한편에 그 고단한 삶의 가쁜 숨이 전해지고 있다.
높고 가파른 계립령은 / 嵯峩雞立嶺
예로부터 남북을 그어놓았네 / 終古限北南
북쪽 사람은 호화를 다투고 / 北人鬪豪華
남쪽 사람은 기름과 피 빨리네 / 南人脂血甘
소달구지 조령을 넘어가니 / 牛車歷鳥道
농사 벌판에 남정들이 없겠다 / 農野無丁男
강변에서 밤에 줄지어 자는데 / 江干夜枕籍
아전들은 왜 그리 욕심도 사나운고 / 吏胥何婪婪
작은 저자에 생선은 실오라기만하고 / 小市魚欲縷
초가집 주막에 술은 쌀뜨물 같은데 / 茅店酒如泔
돈을 모아 유녀를 불러오니 / 醵錢喚遊女
푸른 머리단장에 분홍 저고리 남치마 / 翠翹凝紅藍
백성들은 살을 깎이는 것 괴로운데 / 民苦剜心肉
아전들은 멋대로 취해서 지껄이네 / 吏姿喧醉談
게다가 또 말과 섬으로 이(利)를 보려 계교하니 / 斗斛又計贏
조사는 마땅히 부끄러움을 알아야 하리 / 漕司宜發慚
관가의 부세는 십분의 일인데 / 官賦什之一
어찌해 2ㆍ3을 수운하게 하는고 / 胡令輸二三
강물은 도도히 제 흐르며 / 江水自滔滔
주야로 구름과 이내를 불어내는데 / 日夜噓雲嵐
돛대가 협구를 가득히 덮어 / 帆檣蔽峽口
북쪽으로 앞을 다투어 내려가는구나 / 北下爭驂驔
남쪽 사람들 낯을 찡그리고 바라보건만 / 南人蹙頞看
북쪽 사람들 뉘라서 이 사정 알리 / 北人誰能諳
- 김종직, <속동문선> 권3, 오언고시 <가흥참(可興站)>
고단한 삶이긴 했으나, 그래도 가흥은 금천(金遷)과 함께 살만한 동네로 평가되기도 했다.
가흥(嘉興)은 금천 서쪽 10리에 있는데 강 동남쪽부터 서북쪽으로 달려 남쪽 기슭에 마을이 있다. 부용의 한 줄기로 강을 거슬러 장미산(薔薇山)이 솟았는데, 이것이 가흥의 진산(鎭山)이다. 조정에서는 이곳에 창(倉)을 설치하여 영남 7읍(邑), 영외 7읍의 전부(田賦)를 받아 수운판관을 시켜 서울까지 배로 실어 나르게 하였다. 거주민은 주로 쌀이 들고날 때 손님과 더불어 쏟아지는 이문이 많다. <이규경(李圭景;1788~1863),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 충주형승변증설(忠州形勝辨證說)>
가흥은 또한 일본과의 왕래에 있어 주요 길목이기도 했다. 1420년(세종 2) 윤 정월 15일에 일본으로 사행을 떠났던 송희경(宋希璟)은 서울을 출발해 이천, 안평역(安平驛), 가흥역, 충주를 지나 문경관(聞慶館)에서 1박을 했다. 가흥을 지나며 보았던 모습을 이렇게 적고 있다.
한적한 세 집이 산모롱이[山曲] 옆에 있어 / 蕭條三戶傍山曲
이름은 가흥인데 흥하지 아니하다 / 名是可興猶未興
잠깐 가는 말 멈추고 아전의 말 들으니 / 暫駐征驂聞吏語
백성 편케 하는 일 많은데 내 무능 부끄럽다 / 便民多愧我無能
- 송희경, <일본행록(日本行錄>, 過可興驛
산모롱이를 끼고 집 세 채가 있던 가흥역을 그려볼 수 있다.
병자호란 직전인 1635년 후반 무렵, 조선은 후금(後金)의 군사적 위협과 명(明)의 요구를 감당하기도 버거웠다. 여기에 일본 문제도 골치 아픈 사안이었다. 일본을 다독여야 하는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일본 내에서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1633년 쓰시마의 가로(家老) 야나가와 시게오키(柳川調興)가 자신의 주군인 쓰시마 도주(島主) 소오 요시나리(宗義成)의 비리를 바쿠후(幕府)에 폭로하면서 시작됐다. 비리의 핵심은 소오가 1621년과 1629년에 조선에 사신을 보내면서 자기 휘하의 사람으로 멋대로 파견하고, 그 과정에서 바쿠후의 국서(國書)를 바꿔치기 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의 실행자가 외교승(外交僧)으로 알려진 겐포(玄方)인데, 1629년 사신단의 중심인물이다. 이의 종적이 바로 가흥에서 확인된다.
<대동야승(大東野乘)> 속잡록 권3에 보면, 1629년(인조 7년) 3월 1일 겐포와 타이라 토모히로(平智廣) 등 일단의 일본인이 별사(別使)라는 명칭으로 부산 왜관(倭館)에 도착했다. 음식과 반찬도 받지 않고 서계(書契)도 보이지 않으면서, 서울에 올라가서 조정에 들어가 직접 면달(面達)하겠다고 고집하는 상황을 동래부사가 서목(書目)으로 알렸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홍명(鄭弘溟, 1582~1650)을 선위사(宣慰使)로 내려보냈다. 그러나 국왕의 사신이 아니었으므로 선위사의 자격을 접위관(接慰官)으로 개칭했다. 두 달 넘게 버틴 끝에 윤4월 6일 겐포와 타이라는 가마를 타고 시봉(侍奉) 2명, 반종(伴從) 15명이 서울로 향했다. 보름만인 윤4월 20일에 도착하여 한 달 이상을 머물다가 5월 5일에 하직인사를 하고 5월 25일 가흥참(可興站)에 도착해 하루를 머물렀다.
겐포 일행이 조정에 들어가 전한 문서는 야나가와 이켄(柳川一件)을 통해 문제가 된 위조된 국서였다. 의도했던 목적을 이루지 못한 겐포 일행이 가흥에 도착했을 때에 역관 최의길(崔義吉)이 서계(書契)를 가지고 뒤쫓아 왔다. 접위관 이행원(李行遠, 1592~1648)이 곧바로 전해주려고 했으나 성을 내는 통에 이튿날인 5월 26일에 충주에 들어와서야 전달했다. 골부리던 겐포의 눈치를 보며 달랬던 곳이 바로 가흥이었고, 충주였다. 한일 관계사에 있어서 왕래 길목이었던 가흥역의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이다.
길을 지나며 가흥을 거쳐간 사람은 무수히 많다. 그 중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이 1589년 동인(東人)을 공박하다가 길주(吉州)로 향하던 귀양길에 가흥역에서 하룻밤 잔 일이 있다.
十四日庚申。晴。送別金,閔,南,李。得五刷馬以行。秣馬于南倉。又秣于丹月驛。宿于嘉興驛。成兄先至哭待。趙奉事熊君瑞贐以四扇。翌朝。又與李成來餞。 (조헌, <중봉선생문집> 권13, <북적일기(北謫日記)>)
그런가 하면 귀양살이의 배소(配所)로 가흥역이 등장하기도 한다.
<일성록> 1781년(정조 5) 7월 2일자에는 권상진(權尙鎭)을 충주목 가흥역에 2년 반 정배를 결정하였고, 1790년(정조 14) 5월 9일자에는 홍원섭(洪元燮, 1744~1807)을 충주목 가흥역에 3년 정배를 결정하기도 했다.
가흥역의 지난 사실을 찾는 중에 가장 흥미로우면서 충격적인 사실은 일본 배의 출현이 아닐까 싶다.
왜선이 며칠 동안 번갈아 왕래하니 / 倭船數日迭相先
안개 자욱한 왜국의 해변에 닿은 듯하네 / 宛泊蠻煙海島邊
호와 월이 한 집안 된 것은 주나라 덕택이고 / 胡越一家周德澤
배와 수레 만 리 오감은 우 임금 산천이네 / 舟車萬里禹山川
몸에 걸친 화려한 옷은 교인이 짠 것이고 / 身章斕斒鮫人織
섬 오랑캐 말이어서 역관이 통역하네 / 音語侏儷譯使傳
내왕해도 잡거나 내치지 않으니 / 來去不須追且拒
하늘처럼 포용하는 성상의 교화에 감격하네 / 包荒聖化感如天
- 권호문(權好文, 1532~1587), <송암집(松巖集)> 권2 詩 <到可興倉對倭船>
1570년대의 상황으로 짐작된다. 며칠을 두고 한강을 오르내리는 왜선(倭船)이 떠있는 가흥 풍경이 상상이 안된다. 정박한 배도 많아서 마치 일본의 어느 해변을 연상케 한다고 했다. 알록달록한 이방의 옷감으로 옷을 지어 입은 일본인들이 왔다갔다하고, 일본어 통역을 맡은 역관이 있다. 그들이 가흥을 활보해도 누구하나 제지하거나 잡지도 않는다. 그 모든 것은 임금님의 성화(聖化)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했다. 임진왜란(1592)이 나기 30년 이전 상황에서 일본 배들이 자유롭게 한강을 오르내리고 일본인들이 활보했던 가흥. 상상이 되는가? 권호문 자신이 직접 보고 쓴 시인만큼 믿을 수밖에.
1894년 서울-부산간 20개의 병참부(兵站部)가 세워졌다. 충주에는 안보와 가흥에 병참부가 들어섰다. 이들의 위세와 관련된 사건 하나가 보인다.
보고서 제17호 본부(本府;충청북도관찰부) 총순(總巡) 이근배(李根培)가 일본인들에세 잡혀간 사유는 이미 전보로 보셨고, 이에 다시 상세히 보고합니다. 이 달(10월) 15일 오시(午時 : 11~1시)에 일본 수선반(修線班) 일행이 군(郡)에 도착하였는데, 통역인 우리나라 사람 경성 중부동에 사는 김기용(金基用)이가 사처(舍處)로 정한 곳의 가게 주인 엄덕용(嚴德容)이 곧바로 청소하지 않은 일로 턱을 잡고 주먹으로 눈을 때려 눈알이 빠지고 피가 온 얼굴에 흘렀습니다. 그의 친속(親屬)과 이웃 사람들이 둘러싸고 통변(通辯)하여 경무서(警務署)에 고소하니, 총순 이근배가 그 피해의 참혹을 보고 통변의 행패에 괴로워하며 우리나라 사람으로써 그 예에 따라 겨우 곤장 4대를 쳤는데, 일본인 한 명이 따라와 이 상황을 보고 대놓고 공갈함에 다시 곤장을 치지 못했습니다. 부득이 가두었더니 순식간에 역소 사무원이 군인과 함께 일제히 경무서에 난입하여 마주치는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리고 시끌벅적 소리치는 기세가 위급하고 총순과 순검이 풍비박산되었습니다. 선화당(宣化堂)에 난입하여 본 관찰사를 힐박(詰駁)하며 총순을 보여달라고 요구함으로 사람을 시켜 불러오게 하고 서로 떠들고 있을 때에, 병사 하나가 선화당 아래에서 총순을 가리키며 서로 상의하더니 일제히 선화당 위로 달려들어 때리고 발로 차며 결박하고는 ‘경성 사령부(京城司令部)로 압송하겠다’고 하고는 충주 가흥의 일본병참소(日本兵站所)로 끌고 갔습니다. 그래서 일의 자초지종을 정리하여 총순을 풀어줄 것을 요구하는 공함(公函)을 병참소로 보냈으나 회보가 없고, 머물던 일본인과 역군(役軍)이 본 군(충주군) 동헌에 들이닥쳤으며, 일본인 몇 사람은 엄덕용의 집으로 가서 가산집물을 때려부쉈다고 하는데, 위태로운 패악질에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고 관리와 백성이 엄중히 경계하는 것이 마치 난리를 만난 것 같습니다. 주눅 든 백성들을 위로하려 관찰사가 부득이 격료(激鬧)하오나 몹시 비참한 바 이에 보고하오니, 사실을 조사하여 주시기를 바라옵니다. <광무(光武) 8년(1904) 10월 15일 충청북도관찰사 이승우(李勝宇)>
이미 1896년 호좌의진의 충주성 공격 때에 안보와 가흥병참부는 무장한 병력의 위세를 떨친 바 있었다. 그 후 계속해서 주둔하며 가흥은 또다시 일본군의 수중에 먼저 들어간 모양이 되었다.
역마을로 기능하며 성장해왔고, 또한 가흥창이 설치되며 조세운반의 요지로서 수운(水運)도 관장했던 가흥은 일본의 전신선(電信線)이 지나가며 그것을 유지보수하는 명목으로 병참소까지 설치되며 20세기를 맞았다. 작은 군사기지가 들어선 셈이다.
그렇다면 가흥역의 위치는 어디일까?
1914년 10월 29일부터 12월 16일까지 측량된 가흥리 지적원도에서 그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즉, KT가흥분기국사부터 뒷말 1길을 따라 있는 가흥리 208번지의 2,566평의 대지가 가흥역 자리로 보인다. 그리고 길 건너의 222번지 1,448평의 대지 역시 역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면사무소가 있었던 229번지의 1,765평 대지 또한 가흥역과 관련된 시설이 있었을 공간으로 보인다.
문제는 가흥창인데, 이것은 세조 11년(1465)에 설치되면서 가흥역 동쪽 2리에 있다고 하였다. 가흥보건진료소와 충주농협 가흥지점이 있는 가흥리 274번지의 3,862평 대지가 곧 가흥창 자리이다.
가흥역의 규모를 <여지도서>에는 ‘연원역에 속한다. 관아의 북쪽 30리에 있다. 역노 61명, 역비 41명이다. 기마(騎馬) 2마리, 복마(卜馬) 5마리이다.’라고 하였다. 대마(大馬)는 없었다.
지적원도와 함께 정리된 <토지조사부>에서 가흥리 지역의 국유지 상황을 보면, ① 밭이 17필지에 39,994평으로 전체 밭 면적의 8.32%, ② 논이 27필지에 59,537평으로 전체 논 면적의 17.12%, ③ 대지가 13필지에 12,125평으로 전체 대지 면적의 38.00%, ④ 임야가 14필지에 74,823평으로 전체 임야 면적의 71.26%를 차지하고 있다. 국유지는 총 71필지에 186,479평으로 가흥리 전체 토지 면적의 7.21%가 된다.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지적원도가 측량되던 시기에 일본인 소유의 토지가 상당 수 존재하는 상황에서 가흥리에는 일본인 소유 토지가 한 필지도 없다는 점이다. 다만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植株式會社) 소유의 논밭이 각각 한 필지씩 존재한다.
가흥역에서 비롯된 가흥 역사의 흐름은 세조 이후 가흥창의 설치와 함께 내륙 수운의 중심기지가 되었다. 교통과 물류의 중심지였던 가흥에 20세기 출발선상에서 보이는 두드러진 특징의 하나로 신식 학교의 설립을 통한 교육에 집중했던 모습이다. 즉, 1908년 10월에 호흥보창학교(湖興普昌學校)를 세웠다. 가흥리에 사는 안항순(安恒淳), 박경렬(朴景烈), 정규현(鄭奎鉉) 씨들의 발기에 의한 것으로 80명을 모집하여 시작됐다. 가흥이 고향인 서번(西蕃) 박재륜(朴載崙) 선생도 1923년에 호흥학교에서 2학년을 마치고 지금의 엄정초등학교인 용산리보통학교로 전학을 갔었다.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이 있기 전에 가흥면(可興面)의 중심 소재지였던 가흥은 금천면(金遷面)과 통합되어 가금면(可金面)이 되었다. 면의 중심이 탑평리(塔坪里)로 옮겨졌고, 또한 수운의 폐지, 신작로의 개설 등으로 교통, 물류, 통신의 중심이었던 과거의 면모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연발생적으로 들어선 고미술거리가 그나마 현재 가흥의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오늘의 변화상이 있기까지의 역사 속에 묻혀 있는 가흥 이야기를 가흥역을 중심에 놓고 되살려낼 필요가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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