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충주에는 충주읍성의 4대문을 본 사람이 없다. 너무 이른 시기에 파괴되었다. 그리고 그 문의 전체를 찍어 놓은 사진 역시 나타나지 않는다. 유일하게 보이는 것이 영국의 <Daily Mail>지 특파원으로 다녀간 프레드릭 매킨지(1869~1931)가 쓴 <조선의 비극>에 실린 사진이다. 1896년 호좌의진의 충주성 공격 당시에 4대 문루(門樓)가 불타고 남은 성벽과 홍예(虹霓)를 찍은 것으로 드리운 그림자를 통해 남문으로 추정되는 사진이다.
1913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제의 <충주시구개정(忠州市區改正)> 사업에 의해 성벽과 성문 등이 헐어졌다. 공사 시작 1년이 지나며 대부분 훼철된 것으로 추정되는 성벽과 함께 성문의 흔적도 사라졌다. 그 위치에 대한 기록도 마땅치 않아 개발 중심으로 지나온 지난 100년 동안 계속되는 혼선으로 남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자료를 중심으로 추정한 결과물에서도 위치를 잘못 표시하여 혼선에 혼선을 보태는 상황도 벌어졌다.
충주읍성의 4대문에 대한 접근은 여러 가지 지도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우선적으로 1912년 말 경에 측량된 충주읍성을 중심으로 하는 시가지도에 포개놓은 시구개정도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다. 즉, <충주시구개정도>는 일제에 의해 그들 삶의 방식에 맞는 도시로의 공간 개조를 위한 밑그림이다. 성벽을 허물어낸 자리를 넓혀 직선화된 도심 도로망의 기본으로 삼으며 성서동 지역과 성남동 지역을 대상으로 구역을 확대하여 지금의 구도심을 만들어낸 것이다. 다행히 <충주시구개정도> 상에는 본래 있었던 길과 새로 계획한 길이 공존한다.
그리고 <충주시구개정> 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14년 11월 19일부터 1915년 3월 23일까지 지적원도 측량 작업이 이루어졌다. 해당 지역의 지적원도 5장을 이어붙이고 길을 표시해 보면, 시구개정도에서 계획한 도심 도로의 기본적인 윤곽이 드러난다.
이 두 개의 도면을 놓고 읍성의 성벽을 추정할 수 있고, 성 내의 옛길을 표시하면 4대문으로 향하고 이어지는 도로망을 볼 수 있다. 성벽과 안팎의 길이 만나는 지점이 곧 충주읍성의 4대문이 된다.
여기에 1910년과 1915년에 측량된 1:5만 지형도와 1916년에 측량된 1:1만 지형도를 통해 읍성 부분을 확대하여 살펴보면, 시구개정도와 지적원도에서 구현된 도로망의 전후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특히 1910년에 측량된 1:5만 지형도에는 충주읍성의 성벽 상태를 알 수 있는 동시에 4대문의 위치를 측량에 의한 결과물로 확인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몇 가지 지도류의 자료를 통해 4대문의 위치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동문은 문화회관의 남쪽 모서리 지점으로 도면에서도 성 안팎의 길이 그곳을 향하고 있다. 예전에 동문지 밖에는 조양여관(朝陽旅館)이 있었다고 한다. 동문의 이름인 조양문(朝陽門)에서 따온 상호이다. 문화회관 북측 모퉁이에 동문이 있었다고 하는 일부 주장이 있으나, 도면과 지도에 나타나는 표식들을 종합해 보면 그 주장은 맞지 않는다.
서문의 경우에 1910년의 지형도에서는 표시되지 않았다. 또한 서문의 위치에서 제1로터리까지의 성벽 역시 표시되지 않았다. 1896년 이후 1910년 사이에 서벽의 일부와 서문이 파괴된 것을 알 수 있다. 서문이 있던 지점은 혜상칼라가 있는 4거리가 된다. 제1로터리 직전의 국민은행과 중앙시장 사이의 4거리라는 주장도 있다. 이 역시 도면과 지도에 나타나는 표식들을 종합해 보면 그른 주장임을 알 수 있다.
남문의 경우에도 혼선이 있다. 관아공원을 향하는 입구인 염소탕집이 있는 삼거리를 남문 자리로 얘기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기본적으로 문을 두고 안팎으로 연결되는 길의 조건에서 맞지 않는다. 남문의 경우 구충주세무서 골목과 성내동 가구점골목길이 만나는 주노플라워 4거리에 있었다. 몇 해 전에 여관 건축을 위한 터파기 중에 성돌이 나와서 잠시 세간의 주목을 받던 곳이다. 남문을 나오면 곧바로 충주진영(忠州鎭營)과 연결되었다.
유일하게 이견이 없는 곳이 북문 자리이다. 보통 보문당 4거리로 불리는 곳이다. 공식명칭과는 달리 북문이 있었기 때문에 북문다리라는 말이 있거나, 예전에 근처에 북문천막, 북문약국 등의 가게들이 있었다. 이 가게들은 이름은 유지한 채 모두 다른 곳으로 이전해 영업 중이다.
충주읍성을 수개축한 후에 세운 <축성사적비(築城事蹟碑)>가 관아 공원에 있다. 당시 공사를 담당했던 충주목사 조병로(趙秉老)가 세운 것으로 비문을 옮기면 다음과 같다.
<築城事蹟碑> 聖上卽位六年 己巳二月始築 十一月訖役 城之周三千九百五十尺 軆厚二十五尺 高二十尺 雉堞四百十五間 敬天門樓十五間 守門廳四間半 鳳阿門樓十間 守門廳三間 朝陽門樓八間 守門廳三間 輝金門樓八間 守門廳三間 / 崇禎紀元後五辛未三月 日 / 行牧使通政大夫趙秉老(축성사적비 전면)
읍성 수축의 기간과 규모, 4대문의 이름과 문루의 규모, 수문청 사항을 기록해 놓았다. 동문은 조양문(朝陽門), 서문은 휘금문(輝金門), 남문은 봉아문(鳳阿門), 북문은 경천문(敬天門)으로 각각 그 방향의 특징을 담고 있다. 동문은 아침 햇볕을 받는 곳으로, 서문은 저녁 노을의 휘황함을, 남문은 금봉산(金鳳山) 언덕을 향하는, 북문은 임금이 계신 조정을 향하는 각각의 방위상 특징을 응축해 놓았다.
<축성사적비>가 세워진 시기에 만들어진 <호서읍지(湖西邑誌)>의 <충주목(忠州牧)>에 기록된 사항과 아울러 1872년에 같은 선상에서 그려진 <충주목지도(忠州牧地圖)>를 함께 놓고 보면 보다 자세한 사항을 알 수 있다. 특히 호서읍지에는 <축성기(築城記)>와 4대문의 상량문(上樑文)이 수록돼 있다. 임진왜란 이후 황폐된 충주읍성을 수개축한 후에 남긴 기록으로 4대문의 현판은 당시의 실세였던 흥선대원군의 친필을 받아 걸었던 것도 알 수 있다.
원도심 재생사업이 막바지를 향하고 있다. 또한 여러 곳에서 도시재생사업이 결정되어 진행 중이거나 진행 예정이다. 계획에 의한 단계별 실행이 이루어지겠지만, 해당 사업 단위지역이 가지는 특징을 정확히 반영하지 못한 사례가 곳곳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충주읍성의 4대문을 꺼낸 이유는, 그 문의 위치에 대한 시비도 제대로 가리지 못한 상황에서 일부에서 복원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다. 현실적인 금전적인 문제는 기본이지만, 역사적 사실에 대한 고증과 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눈에 보이는 당장의 무엇을 쫓아 행해지는 사업은 출발부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역사도시라는 것이 다만 오래된 도시를 지칭하는 것만은 아니다. 그에 걸맞는 볼거리가 있어야 한다. 일제에 의해 파괴되고 훼철되며 변형된 공간의 복구 내지는 당장의 복원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예산이 없으니까, 그런 계획이 발표되면 땅값만 천정부지로 솟구치니까 라는 식의 미적거림은 일을 더욱 어렵게 하는 우리 스스로의 회피이다.
당장 충주교육청 자리의 연당(蓮塘)에 대한 정밀발굴조사를 문화재청에서 결정했지만, 11월 중순이 다 되도록 첫 삽도 뜨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그곳의 전제는 원도심 재생사업에서 계획한 주차공간 확보를 위한 주차장 설치가 우선인 것으로 읽힌다. 저물어가는 2019년을 결산하는 시점에서 역사도시의 상징공간들이 처한 현실과 그에 대한 행정 행위의 온당성도 함께 돌이켜 볼 시점이 된 것 같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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