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명 : 동헌(東軒), 칸수 : 28, 현상 : 완(完), 현용청 : 군사무실(郡事務室), 적요 : 융희 2년(1908) 8월 일 이입(移入).
충주군청에 대한 기록이다. 1909년에 발간된 <한국충청북도일반>(p.173)에 실린 관아공해(官衙公廨) 현황에서 충주군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소위 관아공원내의 청녕헌(淸寧軒)에 관한 기록이다.
이 당시에 충주군에 속한 면은 덕산(德山), 살미(乷味), 감물(甘勿), 율지(栗枝), 유등(柳等), 소파(蘇坡), 사이(沙伊), 주류(周柳), 신석(薪石), 신니(申尼), 덕면(德面), 이안(利安), 금천(金遷), 노은(老隱), 복성(福城), 가흥(可興), 앙암(仰岩), 소대(蘇臺), 엄정(嚴政), 산척(山尺), 동량(東良), 김생(金生), 가차(加次), 남변(南邊), 북변(北邊) 등 25개였다. 직전인 1906년에 금목(金目), 생동(笙洞), 맹동(孟洞), 소탄(所呑), 법왕(法旺), 지내(枝內), 대조(大鳥), 두의(豆衣), 사다(沙多), 천기(川歧), 감미(甘味), 거곡(居谷) 등 12면이 음성으로, 불정(佛頂)이 괴산군으로 편입된 뒤의 상황이다.
일제강점기가 된 후에도 충주군청은 청녕헌에 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편이 있은 후에 충주군에 속한 면은 읍내면(남변+북변), 이류면(이안+유등), 신니면(신석+신니), 가금면(가흥+금천), 앙성면(앙암+복성), 금가면(김생+가차), 주덕면(주류+덕면), 동량면, 노은면, 산척면, 엄정면, 소태면, 살미면 등 13면이었다. 덕산은 제천으로, 감물과 율지는 괴산으로, 소파와 사이는 음성으로 각각 분리되어 나갔다.
1929년에 충주군청 신축 결정이 있었다.
【청주】 충청북도 제2위의 도시가 되는 충주읍은 군청이 고대식으로 부후(腐朽)된 건물임으로, 신축의 필요를 절감하고 목하 도 토목과장 길전(吉田;요시다) 기사가 설계 중에 있는데, 본관은 총 건평 94평에 부속건물 21평과 기타 숙직실 급 변소 등을 합하여 합계 115평으로 8월 말일에 입찰에 부(附)하야 10월 말에 준공케 할 예정이라더라. (매일신보. 1929. 7. 1. 3면 7단, <충주군청 신축 결정, 10월 말 준공 예정>)
하지만 당시의 세계경제공황의 여파로 인해 계획은 1년 미뤄졌다. 1930년 10월 17일에 충주농업학교 교사 신축 낙성과 함께 충주군청 낙성식이 행해졌다. 관아공원 안의 마당 공간으로 과거 충주목 시기에 내아(內衙)가 있던 자리였다. 이 건물은 해방 후에도 계속하여 충주군청으로 이용되었다. 그리고 1952년 11월 3일 밤에 공비에 의한 방화로 화재를 입었다. 곧바로 수리하여 사용하였고, 1956년 7월 8일자로 중원군과 충주시가 분리되면서 중원군청이 되었다. 1963년 1월 1일자로 괴산군 상모면이 중원군으로 편입되었다.
성내동에서 군청사를 이어오다가 1983년 9월 30일에 금릉동에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2층으로 신축한 중원군청은 1988년에 3층으로 증축, 다시 1992년에 4층으로 증축하였다. 그 상태에서 1995년 1월 1일자로 충주시와 통합되면서 충주군 또는 중원군으로서의 100년 여정을 마감하였다.
한편, 지금의 시청은 충주군에 속했던 읍내면사무소에서 시작된다. 1915년에 측량된 1:5만 지형도에 면사무소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1914년 4월에 충주군 남변면과 북변면을 합해 읍내면이 되었다. 이때 읍내면사무소가 생겼다. 지금의 제2로터리 부근의 제일신협 뒷마당 공간이다. 해당 자리는 사창(司倉)이 있던 곳이다. 관청 건물이 유지돼 오다가 면사무소가 들어선 것이다. 1917년 9월에 읍내면은 충주면으로 개칭했다. 다시 1923년에 지정면이 되었고, 1933년 4월에 면제(面制) 실시에 의해 충주읍(忠州邑)으로 개칭했다.
읍내면사무소로 시작된 충주면사무소는 1932년에 사무소 신축공사를 결정ㆍ진행했다.
【충주】 지난 2월 12일에 충주읍회 의원은 읍소회의실에 집합하여 의장 추산문웅(秋山文雄;아키야 마후미오) 이하 신년 벽두에 처음으로 신년 계획을 토의하고 아래와 같이 낙착을 지었다 한다.
◇ 제1호안 충주읍사무소 위치 변경의 건
읍사무소를 신축하기로 결정하고 우편국의 관유지부터 도로를 직통하야 서측에 건축하기로 낙착 …(후략)… (조선중앙일보. 1932. 2. 19. 3면 1단, <신년 계획으로 충주읍 의회, 2월 12일에>)
신축 사무소의 위치는 지금의 성내동 KT 주차장 구역에 해당된다. 그 공간은 1908년 2월에 준공된 충주보통학교(현 교현초) 자리였다. 1932년 9월 1일자로 지금의 교현동 위치로 학교가 신축 이전하면서 그 공간을 대체하여 읍사무소가 들어간 것이다. 읍사무소는 1932년 12월 17일에 낙성식을 갖고 업무에 들어갔다. 이 공간에서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되면서 읍사무소는 충주시청이 되었다.
시승격 후에 신청사 마련을 위한 결정이 1957년 12월 2일에 있었다. 문화동 E마트 자리로의 신축 이전 결정이었다. 1958년 4월 24일 14회 시의회(임시의회)에서 충주시청 위치 변경안이 통과되었고, 7월 29일에 입찰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1959년 4월 10일에 문화동에 충주시청을 준공하여 이사했다. 1990년 12월 29일에 화재사고가 있기도 했다. 그리고 충주시와 중원군이 통합된 후인 1997년 6월 25일에 지금의 금릉동 청사가 준공되어 업무를 시작해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다시 문제는 1908년 8월 이전 상황이다. 1895년 5월 26일자로 조선 건국 이래 지속해 온 8도제를 해체하고 23부(府)로 분할하는 행정구역 개편을 단행하는 칙령을 발표했다. 이 때 충주부(忠州府)가 생겼다. 부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어 관할 군현을 밑에 두는 광역단체장 체제가 되었다. 초대 충주부관찰사는 조한국(趙漢國)이었고, 두 번 째가 김규식(金奎軾)으로 이는 1896년 2월의 을미의병 충주 공격 상황에서 참수된 인물이다.
관찰사가 임명됨과 동시에 관찰부(觀察府)가 설치되었고, 동시에 충주관찰부의 일원으로 충주군이 생겨나고 군수(郡守)가 임명되었다. 관찰사는 1895년 5월 30일자로 초임됐지만, 군수는 10월 16일자로 권직상(權直相)이 초임됐다. 일정 기간 충주목사(忠州牧使)가 주재했던 청녕헌 공간에서 동거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충주부는 1896년 8월 4일에 실시된 13도제에 의해 충청북도 관찰부로 변경되며 지금의 충청북도 전체를 관할하는 곳이 되었다. 관찰부 소재지는 그대로 충주군에 두었다. 충주군에 위치했던 관찰부, 관찰사가 주재하던 공간을 선화당(宣化堂)으로 불렀었다. 그리고 군수가 주재했던 공간은 어디였을까?
앞서 성남동에 있었던 충주진영 공간을 충주군청이 위치했을 것으로 추정한 일이 있다. 그러나 해당 공간은 지방군제가 폐지된 1895년 직후, 을미년 11월 3일자에 ‘충주진해(忠州鎭廨)는 가작경무소(可作警務所)요’라고 하여 초기의 충주경찰서 자리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는 공간은 면사무소가 있었던 제일신협 뒤의 주차장 공간인 사창(司倉) 자리가 남는다.
충주진영은 1895년에 경무소가 들어섰다가 1905년 11월에 일본군 수비대가 차지했다. 동헌인 청녕헌은 1895년 충주부관찰부로 1896년 충청북도관찰부로 명칭을 바꾸고, 1908년 6월 5일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관찰부로 이용되었다. 그렇다면 충주군청이 1908년 8월에 이사들어 온(移入) 상황은 제3의 공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아직 확정하지 못할 초기 13년간의 충주군청 공간을 찾는 일부터 다시 살펴야할 숙제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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