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경영루(慶迎樓) 이야기

우보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1/25 [16:28]

142. 경영루(慶迎樓) 이야기

우보 김희찬 | 입력 : 2024/01/25 [16:28]

 

조선시대의 충주를 접근하다 보면 만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경영루(慶迎樓)’이다. 충주 읍성 안에 있던 주요 건물의 하나로 지지(地誌)에 대표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경영루에 대해서는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정인지(鄭麟趾)가 쓴 기문(記文)이 소개되어 있다. 경영루의 건축 사실 관계 등을 기록한 <경영루기(慶迎樓記)>를 통해 시작 상황을 읽을 수 있다.

 

<경영루의 위치와 객사>

 

경영루는 객관(客館) 동쪽에 있었고, 이전 이름은 동루(東樓)였다.

 

객관은 객사(客舍)로 불리기도 한다. 충주 객사의 당호(堂號), 즉 건물 이름은 중원관(中原館)이었다. 충주가 고향인 삼탄(三灘) 이승소(李承召)는 1466년(세조 12)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낸 바 있다. 그의 시에는 다만 충주객관(忠州客館)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충주가 본관(本貫), 즉 본향(本鄕)이었던 눌재(訥齋) 박상(朴祥)의 경우 1524년에 충주목사로 부임하여 여러 편의 시를 지었는데, 그의 시에서 ‘중원관(中原館)’이 처음 확인된다. 이후 충주객사는 1930년대 초까지 존재하며 ‘중원관’이라는 당호로 불리었다.

 

객사를 기준하여 동쪽은 2019년에 발굴ㆍ조사가 진행된 연당(蓮塘) 쪽이다. 현재의 KT지사 건물 뒤쪽의 주차장 공간 및 부속건물 전체가 기본적으로 객사 부지였다. 경영루가 있었던 개략적인 공간 위치는 KT충주지사 주차장이 된다.

 

<경영루의 건축 계기와 시기>

 

‘경영루기’를 지은 정인지는 1435년에 충청도관찰사로서 충주에서 근무했다. 충주는 한양을 방어하기 위한 목구멍이라고 ‘인후지지(咽喉之地)’로 표현한 장본인이기도 한다. 그만큼 충주에 대하여 잘 알고 있었던 인물이다.

 

1442년(세종 24) 가을에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경주에서 받들어오라고 대신을 보냈다. 그 운송 과정에서 중요 길목이었던 충주에서 하룻밤 머문 일이 있다. 당시 충주목사 김중성(金仲誠)이 경계에 나가 정성껏 마중하였다. 태조의 영정을 정청(正廳)에 모시려 했지만 낮고 누추하여서 객관 동루(東樓)에 모시고 예를 갖췄다고 한다. 다음날 태조의 영정을 모신 대신 일행을 배웅하고 돌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오늘날 어용(御容)이 잠깐 멈추신 것은 참으로 이 고을의 만나기 어려운 영광이니, 신자(臣子)로서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정성껏 받들어야 한다. 이 고을에 세워진 지 가장 오래되어 삼한(三韓)이 반드시 다투는 땅이 되었고, 신라에 있어서는 한강군(漢江郡)이 되었고, 고구려에 있어서는 국원성(國原城)이 되었는데, 예전 누각이 좁고 기울어져 관부(官府)에서도 쉴 곳이 없다. 하물며 어용이 돌아오시는 날에 다시 여기에 모신다면 신자의 마음에 편안하겠는가?”

 

하니, 모두 말하기를,

 

“참으로 불안합니다.”

 

하자,

 

“그렇다면 어째서 새롭게 하기를 도모하지 않겠는가?”

 

하고 감사 이익박(李益朴)과 도사 강이(姜履)에게 아뢰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청도, 충주목, 누정조, 경영루)

 

당시의 관찰사 이익박도 1427년(세종 9)에 충주판관으로 근무했던 경험이 있어서 충주 상황과 사정에 밝은 인물이었다. 당시에 김 목사를 적극 보좌했던 사람은 황영(黃永)이었다. 상의와 허락이 있은 후에, 고을 사람 민수(閔修)가 전체 감독을 맡고, 중 신정(信靖)이 건축을 담당하여 한 달 만에 공사를 끝냈다고 한다. 그 과정을 알리고 기문을 청해 받은 것이 <경영루기>였고, 경영루라는 이름은 ‘어용(御容)을 받들어 맞음’이란 뜻에서 취한 것이라고 했다.

 

임금의 친행은 아닐지라도 조선의 창업주 영정이 모셔진 일은 최대의 영광스런 일이었다. 그 머물렀던 공간을 새로 고쳐지었을 때의 위용은 대단한 의미를 가진다. 이런 계기로 동루에서 경영루로 탈바꿈한 것이 1442년 늦가을이다.

 

<경영루 시의 존속과 경영루의 사라짐>

 

경영루의 건물 규모 등에 대한 기록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이 언제까지 있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다만 지지류에 경영루가 사라진 후에도 ‘금폐(今廢)’로 덧글을 달며 계속 기록되었다. 그 기록의 이유는 누정(樓亭)에 대한 제영(題詠)을 소개하는 과정에서 지속되었다.

 

첫 기록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이승소의 시가 실리면서였다. 1481년(성종 12)에 50권으로 완성된 <동국여지승람>은 이후 1499년(연산군 5)의 개수를 거쳐 1530년(중종 25)에 증보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으로 완성되었다. 이 증보 과정에서 김종직, 성현, 양희지, 홍귀달 등 4명의 경영루 관련 시가 추가되어 5명, 7편이 수록되었다. 이것이 그대로 19세기의 <호서읍지(湖西邑誌)>에까지 이어졌다.

 

경영루와 관련된 시편들은 이 외에도 다수 찾아진다.

 

그 처음은 1466년 (음)8월 22일자로 ‘충주루운(忠州樓韻)’이라고 하여 지은 이석형[李石亨, 1415(태종 15) ~ 1477(성종 8)]의 시에서 찾아진다. 이 시가 현재로서는 시작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는 한시를 지음에 있어서 적용되는 차운(次韻)에서 찾을 수 있다. 즉 이석형의 ‘충주루운’은 칠언율시로 상평성(上平聲) 7 우(虞) 목(目)에서 ‘구(區), 우(隅), 도(圖), 호(呼)’를 운자로 썼다. 이후의 시는 이석형의 운을 따라 차운하며 반복적으로 창작되었다.

 

이석형을 시작으로 서거정(徐居正), 이승소(李承召), 김종직(金宗直), 성현(成俔), 양희지(楊熙止), 홍귀달(洪貴達), 조위(曺偉), 박상(朴祥), 주세붕(周世鵬), 이황(李滉), 이정(李楨), 황준량(黃俊良), 오수영(吳守盈), 구봉령(具鳳齡), 홍성민(洪聖民), 이성중(李誠中) 등 총 17명의 작가에 의해 24편이 지어지며 차운되었다. 이들의 생몰년을 기준으로 하면 모두가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것들이다.

 

▲ 1750년대 <해동지도(海東地圖)>의 충주읍성 부분충주읍성 내에 목사의 정무공간인 아(衙)와 별도의 중심 건물로 객사(客舍)가 표시되어 있다. 객사는 양쪽에 부속 건물을 포함하였다. 동ㆍ서루(東ㆍ西樓)로 임진왜란 이후에 복구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임진왜란 이전에 동루는 1442년에 신축하여 경영루(慶迎樓)라 하였었다.



시 제목에 쓰인 경영루의 명칭도 다양하다. 이미 경영루란 이름이 지어졌음에도 이석형은 충주루(忠州樓)라고 했고, 경영루를 쓴 경우가 있는가 하면, 경연루(慶延樓), 연경루(延慶樓)로 썼거나, 동헌(東軒)으로 쓴 경우도 있다. 차운 상황을 제목으로 쓴 경우도 있는데, 이 때에는 ‘충주 판상운(板上韻)’에서 차운했다고 썼다. 앞서 지은 유명인사의 시가 판에 씌어져 처마 밑에 걸려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내용은 각 시인마다 다르지만, 경영루가 가지는 건물 위상과 궤를 같이한다. 즉, 충주 읍성 내의 공해(公廨) 중에서 최고 권위의 건물인 만큼, 경영루 자체의 건축미나 주변 풍광을 읊지 않았다. 대신에 충주를 최대 미사여구와 의미를 부여해 썼다. 충주에 대한 역사적 위상, 한양과의 관계에서의 중요성, 풍요롭고 살기 좋은 곳, 인심 후덕하고 삶이 넉넉한 곳 등의 조선전기 약 150년간의 평화롭던 시절을 상징해 놓았다. 어떤 경우에는 너무 과찬하셨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러나 이 경영루에 대한 차운의 전통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왜일까? 실재 건물이 사라진 데서 이유를 찾는 것이 합당하다. 즉, 임진왜란 때에 농성(籠城)하던 충주의 민간인 중 최소 5,000명 이상이 왜군에 의해 참살됐고, 읍성 내의 많은 시설이 불탔던 가운데 경영루도 불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그 처마 밑에 걸려있던 여러 시판(詩板)이 건물과 함께 불탔기 때문에, 그 공간에 머물 수도 없었을 뿐더러 앞선 시인들의 작품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당장 1598년 11월에 사직하고 돌아가던 중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충주에서 하룻밤 잘 때, 하루 늦게 출발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에게 남긴 시가 하나 있다. 정경세가 묵은 곳은 충주연당(忠州蓮堂)이었고, 그 건물의 이름은 ‘청원당(淸遠堂)’이었다. 임진왜란의 전화를 제대로 복구하지 못한 상황에서 부원군(府院君)이었던 정경세가 묵은 곳이 경영루가 아니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등을 겪으며 말 그대로 쑥대밭이 되었던 충주에 온전한 것이 무엇이 있었을까? 오죽하면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어 1602년에 감영을 공주로 옮겨야 했을까?

 

세종대에 왕조의 안정기로 접어들면서 전체적인 삶이 나아지던 150년간의 변화가 상징으로 남아 있는 것이 경영루 관련 시다. 그리고 그것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멸됨에 따라 차운시의 전통도 맥이 끊겼다.

 

<조선전기 충주를 설명할 기준점, 경영루>

 

충주읍성에 대한 의미부여와 함께 공간 복원에 대한 의견도 많다. 그러나 그 공간은 시대적 변화상에 대한 정확한 고증과 함께 방증 자료를 엄청나게 보완해야 한다. 특히 임진왜란의 전화를 입기 전의 공간 상황에 대해서는 충주사고(忠州史庫)였던 실록각(實錄閣)을 대표적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이용과 그에 따른 기록 또는 충주에 대한 다소 과장되지만, 현실에 대한 반영이었던 경영루와 경영루 시는 조선전기 충주를 해석하고 접근하는 하나의 기준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관련기사목록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포토뉴스
충주 다이브페스티벌 개막
1/10
광고
광고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