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전반기. 충주댐 공사가 한창일 때 전국의 수석 애호가들의 관심이 집중되던 곳이 충주였다. 오랜 세월을 지나며 갖은 모양을 닮은 수석(壽石)이 댐 공사를 계기로 일대 붐을 일으켰었다. 그래서 충주 수석(忠州壽石)은 한때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었다.
그것만큼은 아니겠지만, 충주와 관련된 한시(漢詩)를 찾다보니 몇몇 사연 있는 돌 이야기가 나온다. 글쓴이의 연배 순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① 교리석(校理石)
성현[成俔, 1439(세종 21) ~ 1504(연산군10)]의 <용재총화(慵齋叢話)>에 나오는 얘기다.
사문(斯文) 안(安)ㆍ권(權) 두 선비가 충주(忠州)로 향하려 할 때 안(安)은 노(盧)의 집에서 푸른 구슬로 만든 갓끈을 빌리고, 권은 박(朴)의 집에서 자줏빛 띠[帶]를 빌렸는데, 안의 별명은 연취(鳶鷲)라 하고 권의 별명은 봉시관(奉時官)이라 했다.
권은 항상 수염을 쓰다듬었는데 충주에 이르러 안은 기생 죽간매(竹間梅)를 사랑하고, 권은 기생 월하봉(月下逢)을 사랑하였다. 4군(郡)을 두루 다니며 수십 일을 지내다가 달천(獺川)가에서 이별하며 서로 붙들고 통곡하니, 사문(斯文) 금생(琴生)도 옆에 있다가 눈물을 흘리며 흐느껴 울었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도 사람들은 그들이 앉아 있던 돌을 교리석(校理石)이라고 한다. 사문(斯文) 유공(柳公)이 시를 짓기를,
나란히 고삐 잡고 재갈 물려 화산으로 떠나며 / 竝轡聯鏕發華山
예성 동쪽으로 가리킨 길은 멀고도 멀다 / 蕊城東指路漫漫
자줏빛 박의 띠는 가늘게 허리 둘렀고 / 紫芝朴帶圍腰細
청옥색 노의 갓끈은 차갑게 뺨에 비췄다 / 靑玉盧纓照臉寒
죽간의 긴 나래는 목마른 매가 임한 듯 / 張翅竹間臨渴鷲
월하의 치켜든 수염은 봉시관이로다 / 掀髥月下奉時官
수십 일 동안 운우로 남의 웃음거리요 / 數旬雲雨供人笑
4군의 풍류는 빼어난 구경거리라네 / 四郡風流絶勝觀
배 위의 두 사내는 이별 눈물 휘뿌리는데 / 船上兩郞揮淚別
길가에 두 기생은 노래부르며 돌아가도다 / 陌頭雙妓放歌還
우습도다 금공은 어떤 손이길래 / 堪笑琴公何許客
병신처럼 이별을 함께 서러워하는고 / 籧篨同作別離難
- 성현, <용재총화> 권6
애틋할 듯도 하면서 어이없는 사연이다. 서울에서 부러 친구한테 뽐낼 장식을 빌려 꾸미고 충주에 온 안과 권 두 선비. 제천ㆍ청풍ㆍ단양ㆍ영춘의 4군을 유람하며 죽간매와 월하봉이라는 두 기생을 동반했다. 수십일 유람하고 서울로 돌아갈 때, 그들은 달천 가에서 이별했다. 얘기는 여기부터다.
달천에서 이별하고 배를 타고 물 건너는 두 선비는 이별 눈물을 흩뿌렸다. 그러나 두 기생은 뒤도 안돌아보고 노래부르며 돌아갔다. 강 건너 널바위에 앉아 넋놓고 통곡하는 두 사내 곁에 금(琴)이라는 친구가 있다가 영문도 모르고 덩달아 흐느껴 울었다. 그 세 남자가 앉아 울던 돌을 ‘교리석(校理石)’이라고 부른다고 했다. 그것을 또 다른 친구 유(柳)가 듣고는 풍자시를 썼다.
이별의 아픔일 듯도 싶지만, 넋 빠진 사내들의 치기어린 행동의 풍자다. 달천대교 건너 용두동과 용관동 경계쯤에 해당되는 곳에 있었을 ‘교리석’은 어리석음을 비꼰 경계(警戒)의 돌이었다.
② 충주석(忠州石)
권필[權韠, 1569년(선조 2) ~ 1612년(광해군 4)]의 시에 등장하는 돌이다.
<충주석(忠州石) : 백낙천(白樂天)의 작품을 본떠서 짓다.>
충주의 좋은 돌은 유리와 같이 고운데 / 忠州美石如琉璃
천 사람이 캐내고 만 마리 소가 옮기네 / 千人劚出萬牛移
묻노라 돌을 옮겨 어느 곳으로 가는고 / 爲問移石向何處
가서 권세가의 신도비를 만들지요 / 去作勢家神道碑
신도비에는 누가 글을 짓는고 / 神道之碑誰所銘
필력이 굴강하고 문법이 뛰어나다 / 筆力倔强文法奇
모두 말하길 이 공이 재세할 때 / 皆言此公在世日
천품과 학업이 모두 출중하였나니 / 天姿學業超等夷
임금을 섬김은 충성스럽고 정직하며 / 事君忠且直
집안에서는 효성스럽고 자애로웠다 / 居家孝且慈
문 앞에는 뇌물 청탁이 아주 없었고 / 門前絶賄賂
창고 안에는 쌓아둔 재물이 없었으며 / 庫裏無財資
그 말은 세상의 법이 될 만하고 / 言能爲世法
그 행실은 남의 사표가 될 만하지 / 行足爲人師
평생에 일신의 진퇴 거취가 / 平生進退間
하나도 도리에 안 맞는 게 없다 / 無一不合宜
그래서 이 비석을 세워서 / 所以垂顯刻
길이 사적이 인몰되지 않게 한다 / 永永無磷緇
이 말이 사실인지 사실 아닌지 / 此語信不信
다른 사람은 아는지 알지 못하는지 / 他人知不知
마침내 충주 산 위의 돌들은 / 遂令忠州山上石
날로 달로 사라져 지금은 남은 게 없네 / 日銷月鑠今無遺
하늘이 돌을 낼 때 입 없는 게 다행이지 / 天生頑物幸無口
돌에 입이 있다면 응당 할 말이 있으리라 / 使石有口應有辭
- 권필, 『석주집』 권2, 칠언고시
내용이 길다. 하지만 백거이의 작품을 본떴다고 했다. 권필이 본뜬 백거이의 작품은 <청석(靑石)>이다. 청석의 제목 풀이에는 ‘충렬을 격려한다[激忠烈也]’고 했다.
남전산(藍田山)에서 나는 질 좋은 빗돌인 청석은 수레에 실려 장안(長安)에 와서 장인[工人]의 손을 거쳐 다듬어진다. 그러나 돌은 말을 못하기에 시인이 대신 말해준다고 했다. 시인이 말하길, ‘인가나 묘 앞의 신도갈(神道碣)이 되는 것도, 관가나 길가의 덕정비(德政碑) 되는 것도 원치 않는다. 다만 태위(太尉) 단수실(段秀實)이나 태사(太師) 안진경(顔眞卿)과 같은 진정한 충신ㆍ열사의 빗돌이 되고자 한다’며 청석을 대변했다.
권필은 마구잡이로 권세가의 신도비(神道碑)로 쓰이는 충주석(忠州石)을 빗댔다. 사실인지 아닌지, 아는지 모르는지 상관없이 우후죽순 격으로 세워지는 신도비니 선정비로 인해 충주 산 위의 돌들이 사라져 남은 게 없다고 했다. 돌이 입이 있다면 사실인지 아닌지 말해 줄 것이라며 슬쩍 비껴갔다. 지금도 떠도는 소문처럼 부임하면 선정비부터 만들라고 했던 일이 과연 사실이었을까?
권필의 <충주석>은 비석세우기 경쟁을 고발ㆍ경계함과 동시에 말 못하는 <충주석>처럼 이 땅에 살아간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해주는 것 같기도 하다.
③ 완사석(浣紗石)
박장원[朴長遠, 1612(광해군 4) ~ 1671(현종 12)]의 <구당집>에 실린 충주 관련 15편의 시중에 등장하는 돌이다.
<고인을 본받아[效古]>
완사석에 배를 매고 / 繫舟浣紗石
서쪽 바라니 탄금대다 / 西望彈琴臺
흐르는 물은 여운을 둘렀는데 / 流水帶餘韻
선인은 어찌 지내시는지 / 仙人安在哉
선약 만들 기술 없어 겸연쩍어 / 愧無丹竈術
지는 해를 보며 공연히 배회한다 / 落日空徘徊
- 박장원, 『구당집』권5, 시, 남찬록(南竄錄, 1653~1654 興海 유배 시기)
박장원은 ‘달천에 완사석이 있다[達川有浣紗石]’고 주를 달아놓았다. ‘완사석’은 보통 서시(西施)가 비단 빨래하던 돌을 말한다. 서시가 충주 달천에 와서 빨래했을 이유는 없다. 완사석에 배를 매었다고 했으니, 완사석은 뱃줄을 거는 돌이다. 비단 빨래를 할 정도면 돌 자체가 무척 매끈하고 곱다는 얘기다. 배를 매는 돌을 완사석이라고 부를 정도면, 그 돌에 얼마나 오랫동안, 얼마나 많은 배를 매어 뒀을까? 그렇다면 그것은 가장 번화했던 포구에 있는 돌이었을 것이다. 탄금대 근처에 가장 큰 포구로 등장하는 곳이 바로 금휴포(琴休浦)다. 지금 탄금대 장례식장이 들어서 있는 곳 근처로, 수몰선 아래에 있다.
<완사석>을 직접 확인할 수는 없다. 하지만 오랜 기간 충주의 뱃길 관문으로 수많은 배가 정박했던 곳이 금휴포였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해주는 증거가 된다.
사연있는 돌의 이야기를 펼쳐보면 충주의 단면이 하나 둘 드러난다. 의미없는 것도 많지만, 그렇다고 의미있지 않을 것 같은 무언가에도 이 땅의 이야기가 스며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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