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2년(壬申) 7월 17일(丙申) ‘태조가 백관의 추대를 받아 수창궁(壽昌宮)에서 왕위에 오르다’로 시작되는 조선.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닌 왕조 교체 시기에 충주는 누가 있었으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사뭇 궁금하다. 그래서 그 시기 전후의 기록 조각을 하나 둘 모아 정리하여 이야기의 윤곽을 그려보고자 한다.
▶ 최영(崔瑩) 장군과 충주 고려 말기를 이야기할 때 대표적인 인물 중에 최영 장군이 있다. 최영은 1316년(고려 충숙왕 3년, 병진년)에 태어나 1388년(고려 우왕 14년, 무진년)에 죽었다. 1388년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의한 정변(政變)이 있었고, 이에 따라 이성계(李成桂)를 중심으로 권력 장악이 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최영은 실각하여 최후를 맞게 되었다.
그가 최후의 죽임을 당하기에 앞서 체포되어 고문받고 유배된 곳이 충주였다는 기록이 종종 보인다.
최영(崔瑩)을 충주(忠州)로 유배 보내고 정승가(鄭承可)를 참하였으며, 조규(趙珪)는 각산(角山)으로, 조림(趙琳)은 풍주(豐州)로 장을 쳐서 유배 보내었고, 또 안소(安沼)ㆍ송광미(宋光美)ㆍ인원보(印元寶)를 유배지에서 참하였다. (『고려사절요』 권33, 신우(辛禑) 4년, 우왕 14년 7월)
1388년 하반기 충주에는 고려의 상징이었던 인물인 최영의 최후 흔적이 남겨진 것이다. 변화하는 정국의 최정점에서 있었던 최영의 유배는 어쩌면 충주에서 직접 감지할 수 있었던 가장 따끈한 뉴스가 되었을 것이다. 또는 당시에 충주는 이성계를 추종하는 세력의 관리권에 들어가 있었던 것이다.
인근 원주에 우거하고 있던 원천석(元天錫)은 최영의 죽음을 전해 듣고 시를 썼다. 1389년 정월 상순의 기록이다.
도통사 최영 장군의 사형 당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함 (3수) [聞都統使崔公被刑 寓歎](三首)
수경의 빛이 묻히고 기둥과 주춧돌이 무너져 / 水鏡埋光柱石頹
사방의 백성과 만물이 모두 슬퍼하네 / 四方民物盡悲哀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고 말았지만 / 赫然功業終歸朽
굳센 충성이야 죽었다고 사그라지랴 / 確爾忠誠死不灰
사적을 기록한 푸른 역사책이 일찍 가득했건만 / 紀事靑篇曾滿帙
가엾게도 누른 흙이 이미 무덤을 이뤘네 / 可憐黃壤已成堆
생각건대 아득한 황천 밑에서도 / 想應杳杳重泉下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고 분을 풀지 못하시겠지 / 抉眼東門憤未開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 자 없었으나 / 獨立朝端無敢下
충성과 의리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었네 / 直將忠義試諸難
육도(六道) 백성들의 소망을 따라 / 爲從六道黔黎望
삼한(三韓)의 사직을 편안케 했네 / 能致三韓社稷安
동렬의 영웅들은 얼굴 더욱 두터워지고 / 同列英雄顔更厚
아직 죽지 않은 간사한 자들은 뼈가 서늘해졌으리 / 未亡邪侫骨猶寒
어지러운 때를 다시 만나면 누가 꾀를 내려는지 / 更逢亂日誰爲計
이 시대 사람들 간사하게 일하는 것이 가소롭기만 하네 / 可笑時人用事姦
내 이제 부음 듣고 애도하는 시를 지었으니 / 我今聞計作哀詩
공을 위해 슬픈 게 아니라 나라 위해 슬픈 거라오 / 不爲公悲爲國悲
하늘 운수가 통할지 막힐지를 알기 어렵고 / 天運難能知否泰
나라 터전이 편안할지 위태할지도 정해질 수가 없네 / 邦基未可定安危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랴 / 銛鋒已折嗟何及
충성스러운 신하 항상 외롭다가 끝내 견디지 못했네 / 忠膽常孤恨不支
홀로 산하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부르니 / 獨對山河歌此曲
흰 구름과 흐르는 물도 모두들 슬퍼하네 / 白雲流水㧾噫嘻
- 원천석, 『운곡시사』 권4.
고려 말에 충주 천도설이 두 번 제기되었다.
처음은 1369년(공민왕 18년) 8월에 공민왕은 평양과 충주에 이궁(離宮)을 설치하고 노국공주(魯國公主)의 혼전(魂殿)을 짓는 사업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백성이 심히 괴롭게 여기기에 삼소(三蘇) 순주(巡駐) 계획을 정지하였다. 이에 앞서 신돈(辛旽)이 비밀히 시중(侍中) 이춘부(李春富)를 시켜 충주에 도읍을 옮길 것을 청한 일이 있다.(『고려사절요』 권28, 공민왕3, 공민왕 18년 8월조)
다음은 1377년(우왕 3년) 개경이 바다에 가깝기 때문에 왜적의 침입을 두려워하여 도읍을 내륙으로 옮기고자 찬반 의논이 있었다. 최영은 천도를 반대하였고, 이에 이인임(李仁任)은 ‘충주는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도로가 사방으로 고루 통하니 미리 태조(太祖, 왕건)의 진영(眞影)을 충주로 옮기고 송도를 방수(防戍)의 땅으로 만들고자 합니다’라고 하였었다. (『고려사』 권126, 열전 권제39, 간신(姦臣), 이인임)
그리고 1596년(선조 29) 1월 28일자 선조실록에는 비변사에서 “…(전략)… 중흥동(中興洞)에는 옛날에 산성이 있었는데 지금까지 석축(石築)이 완연합니다. 세인의 전언에 고려 때 최영(崔瑩)이 군사를 주둔하였던 곳이라 하는데, 지금도 그 상봉(上峯)의 암석에는 아직까지 깃대를 꽂았던 구멍이 있습니다. 그 동구(洞口)가 극히 험준하기 때문에 왜인이 오직 단 한번 그곳에 이른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곧 경성 후면의 가장 가까운 곳이라, 근일 아랫사람들의 의논 또한 ‘이곳에 별도로 하나의 진영을 설치하고 혹 사찰(寺刹)의 승도(僧徒)를 소집하되 응모하는 자에게 곧바로 면역(免役)의 도첩(度牒)을 주게 되면 머지않아 원근의 중들이 모여들 것이니, 이에 한 사람이 통솔하게 하여 화포 등의 기술을 연습하며 훈련을 통해 군(軍)을 이루게 하면 이는 경성과 더불어 서로 돕는 형세가 되어 만에 하나 적병이 일면에 와 핍박한다 하더라도 감히 산후(山後)를 포위하지는 못할 것이다.’고 합니다”라고 하여 왜구에 대비하기 위해 충주 중흥동에 최영이 군사를 주둔시켰던 사실도 확인된다. (『선조실록』 선조 29년 병신(1596) 1월 28일(을미))
최영의 실각과 유배, 그리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고려의 마지막 단계의 일들은 그 기록의 부실함에 의해 자세치 않다. 그러나 그 상황에서 충주와 관련된 조각들은 조선의 개국 상황에서 어떤 분위기, 어떤 상황에 놓였던가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이성계 추종 세력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최영을 유배 보내도 안심할 수 있었던 곳이 곧 충주였다고 해석해도 무방할 듯하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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