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된 나무를 두고 ‘나무는 보았을 것이다, 나무는 알 것이다’라는 말을 가끔 한다. 단순히 시간에 대한 말은 아니고 뭔가 있었던 일에 대한, 역사에 대한 현장의 산 증인으로 나무를 소환한다. 그러한 예가 될 법한 나무 두 그루를 불러보자.
▶ 신니면 원평리 미륵불과 나무
1930년대에 매일신보 충북지국 기자였던 정운승(鄭雲昇)은 1931년 기사에서 미륵리석불입상을 소개할 때에 ‘문헌에 증거할 것이 없으나 일반에 전해오는 바에 의하면 거금, 1300여년 전 신라 진지왕(眞智王) 시대에 충주군 대소원(大召院)으로부터 경상북도 문경군 문경면에 이르는 중간에 808암(庵)을 설(設)한 당시에 건설한 것이라’고 썼다. 808개의 암자 또는 절집을 숫자로 헤아릴 수는 없지만 새재를 넘어 충주 사이에 무수히 많은 절집이 있었단 얘기로 읽었다.
신니면에는 그 연장에서 원평리 석불과 문숭리 석불이 있다.
1514년 (음) 7월 21일 고향 경주에서 말을 타고 서울로 출발한 24세 청년이 있었다. 이언적[李彦迪, 1491(중종 22) ~ 1553(명종 8)]으로 과거를 보러가는 길이었다. 그 여정을 <서정시(西征詩)>라는 제목으로 장편의 시로 썼다. (음) 7월 29일 조령을 지나던 날 정오에 노루목을 벗어났고, 영곡사(靈鵠寺)를 설핏 보고 단월역(丹月驛)에 들어 쪽잠을 잤다. 그 다음날인 7월 그믐(30일) 새벽, 아침노을이 퍼질 때에 다시 출발하여 용원을 지나며 본 장면을 시에 넣어 두었다.
忠西四十里(충서사십리) 충주에서 서쪽으로 사십 리쯤
古院有彌勒(고원유미륵) 오래 된 역원 옆에 미륵이 있어
屹立繚垣墻(흘립료원장) 담장으로 싸인 채 높이 섰는데
身長數十尺(신장수십척) 높이가 무려 수십 척이나 된다
- 이언적, 「서정시」, 『회재집』 권1, 고시 금시 부분
오래 된 역원은 신니면 용원리에 있었던 용원역(龍院驛) 또는 용안역(用安驛)을 말한다. 가장 가까운 근처의 미륵은 원평리 미륵이다. 담장이 둘러쳐진 안쪽에 큰 키의 미륵이 서 있다. 506년 전의 모습이다. 지금은 담장이 없어서 그게 그건가 의심되기도 한다.
1921년 오하라 토시타케(大原利武)라는 일본인이 충주 지역의 문화재를 조사하기 위해 돌아다닌 일이 있다. 그리고 여러 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 중에 신니면 원평리와 문숭리의 미륵불 사진도 남아 있다. 두 미륵을 찍은 사진을 보면 모두 남서북면에 돌담이 둘러져 있다.
원평리 미륵은 정면과 우측면의 두 장을 사진으로 남겼다. 정면 사진을 보면 뒤에 왼쪽(南)과 뒤쪽(西)에 돌담 흔적이 보인다. 그리고 왼쪽 구석에 작은 나무가 한 그루 있다. 그런데, 지금 거기에는 돌담은 없고 미륵불 뒤에 큰 나무 한 그루가 서있다. 수종은 시무나무로 충주시 보호수다. 1982년 11월 11일자로 보호수 지정이 되었는데, 당시 새긴 돌에 나무 나이는 360년으로 되어 있다.
100년 전에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보면 수령 360년이 잘 이해되지 않는다. 뒤쪽에 보이는 작은 나무가 커서 지금 나무가 됐거나, 아니면 그 뒤에 담장을 헐어내고 새로 심었거나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정 당시를 기준으로 할 때에 근 400년 된 나무라고 보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림이라면 부정할 수 있겠지만 사진은 다르다. 사진 한 장에 담긴 대상물과 주변의 나무 한 그루는 시간의 변화와 함께 공간의 변화를 얘기해준다. 없던, 또는 어린 나무를 갑자기 360살이니 400살이니 하면 나무로서는 너무 억울한 일이 아닐까. 나무는 알고 있을 것이다. 나무가 말할 수 있다면 이야기해 줄 것이다. 그러나 나무는 말 못하기에 그것을 증거할 수 있는 사진 한 장을 놓고 나무의 억울한 나이를 바로잡아 줘야 한다. 행정 편의의 모순을 바로 잡아야 한다.
▶ 충주예총회관(구 성내동사무소) 앞의 다 죽어가는 나무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충주를 기록한 대표적인 책이 네 권 있다. ① 1915년, 무라카미 토모지로우(村上友次郞)의 『最近之忠州』, ② 1916년, 가네다니 유세이(金谷雅城)의 『忠州發展誌』, ③ 1931년, 오쿠도이 텐가이(奧土居天外)의 『忠州觀察誌』, ④ 1933년, 이영[李英, 본명 이봉근(李奉根)]의 『忠州發展史』 등이다. 모두 일본어로 썼지만, 일제강점기 충주 사회와 그 시대 변화를 읽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할 책이기도 하다.
이 중에 이영의 『충주발전사』를 제외한 나머지 것에는 화보 형태의 사진으로 구성한 페이지가 많다. 충주 시내의 변화를 읽어낼 수 있는, 특히 읍성(邑城) 공간의 변화와 관련된 사진 자료가 많다. 그 책에 들어있는 여러 사진 중에 1931년 오쿠도이 텐가이의 『충주관찰지』에 실린 <충주군청> 사진이 있다.
이 사진 중간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그리고 그 뒤로 1930년 10월 17일에 낙성돼 1983년 9월 30일자로 중원군청이 이전할 때까지 썼던 건물이 보인다.
이 나무는 현재 그 자리에 서 있다. 과거 성내동사무소가 있을 당시에 동사무소 입구의 나무였고, 지금은 충주예총회관 입구의 나무가 되었다. 관아공원 둘레의 나무를 빼고, 읍성 공간 내에서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은 이 나무는 1931년의 사진 한 장에 모습을 드러낸 후 지금까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읍성의 공간 변화에서 가장 뚜렷한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나무이다.
이 나무의 현재 상태를 보면, 재작년에 본줄기가 찢어져 잘려나간 후, 곁가지가 겨우 살아있어 위태롭게 버티고 있다. 나무 한 그루가 그 자리에 있으므로 해서 공간이 가질 수 있는 의미는 나무의 오래됨과 또는 그 나무가 보여주는 뭔가에 따라 다르다. 충주읍성에 대한 다양한 연구와 조사, 그리고 공간 구성에 대한 역사적 추적이 진행되지만, 그 시간, 그 역사를 함께 해온 나무에 대한 관심과 보호ㆍ보존도 병행되어야 하지 않을까?
▶ 사진 한 장과 그 속의 나무 한 그루
비단 오늘 든 두 가지 예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기록이라는 것이 글로 서류로 책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게 이루어져 왔다. 사진이라는 것이 들어온 후 그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과거 어느 시기, 어느 지점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뚜렷한 증거가 되기도 한다. 특히 역사적인 변화에서 가장 헤매고 있는 충주의 지난 100년은 아직도 그 실체 접근이 부진하다. 누가 무슨 이유로 찍었는가 하는 문제도 있지만, 100년 전에 찍은 사진이 남아 자료로 읽히고 활용될 때, 지난 100년간의 변화를 우리는 추적해갈 수 있다. 눈으로 볼 수 있는 가장 명확한 결과값을 얻을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주기적이고 지속적인 사진기록이 공공의 영역에서 반복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
나무 한 그루를 생각하다 보니, 갑자기 예전에 자료정리할 때 보았던 <변강쇠전>이 생각난다. 옹녀와 살림을 차린 변강쇠가 나무를 해오라는 성화에 지게를 지고 나가 해온 나무가 그 마을 장승을 뽑아 빠개온 것이다. 결국 변강쇠는 장승 동티로 죽음에 이르렀다. 살아있는 나무 한 그루의 쓰임새는 잘린 그 순간 새로운 의미로 삶을 상징해 가는 경우가 많다. 나무 한 그루의 의미를 사진 한 장 속에 남겨진 잔상에서 생각해본 아침이다. <저작권자 ⓒ 충주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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