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수회에서 난양이(향산)까지 - 3 <갈마고개를 지나서>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4/08 [11:18]

다시 수회에서 난양이(향산)까지 - 3 <갈마고개를 지나서>

김희찬 | 입력 : 2024/04/08 [11:18]

 

▲ 세성3리 양원마을  © 충주신문

 

▲ 임경업 별묘  © 충주신문

 

▲ 임경업 별묘  © 충주신문


살미면 소재지인 세성리에 있는 임경업 장군 별묘(別廟)란 곳에 선다. 충주에 있는 대표적인 별묘 중의 한 곳이다. 소태면 오량리에는 허한(許僩, 1574~1642)의 별묘가 있다. 그곳에는 허한의 영정과 아들 허적(許積, 1610~1680)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별묘’로 부른다.

 

별묘란 곳이 사당이라는 의미지만, 두 별묘의 공통점은 영정을 모셨다는 점이다. 별묘에 대한 여러 가지 정의가 있지만, 충주에 있는 두 곳 별묘로 보면, 충주에서는 영정을 모신 사당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영정을 모셨다고 하면 보통 영당(影堂)이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그렇다는 얘기다.

 

단월의 충렬사에 임경업 장군의 영정이 있다. 충렬사에 있는 것은 복사본이고 진본은 살미면 세성리의 별묘에 있다. 임경업 영정은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79호로 지정되어 있기 때문에 별묘 앞에 안내판이 있다. 그러고 별묘 앞 왼편에 낡고 자그마한 건축물이 하나 있다. 쌍성각(雙成閣)이라는 현판을 달고 있는데 나는 그것에 더 관심이 간다.

 

▲ 쌍성각  © 충주신문

 

▲ 쌍성각  © 충주신문


쌍성각은 1790년에 정조의 명으로 지어진 것이다. 임경업 장군의 충(忠)과 부인 이씨의 열(烈)을 기려서, 충성과 정렬을 부부가 몸소 실천했기에 명명한 것이다. 쌍성각 안에는 ‘정려 전교(旌閭傳敎)’와 ‘정려문(旌閭文)’이 걸려 있다. 별묘에 보관된 영정과 함께 의미를 두기에 부족하지 않은 건축물인데 비지정문화재라서 제대로 관리되지 않는 느낌이 든다. 충주에는 임경업 장군과 관련된 유적이 여럿 있지만, 충주시에서 쌍성각을 지정문화재로 신청하려는 노력과 관심이 아쉬운 곳이기도 하다.

 

▲ 세성리 물멕이길가 마을  © 충주신문

 

설운천과 나란히 흐르는 길을 따라 걸으며 물멕이길로 이름붙인 마을 안 길가에 길게 늘어선 집들이 인상적이다. 한 번은 한 줄로 늘어선 마을을 따라 걷다가 길이 끊긴 곳을 억지로 걸어 나오기도 했는데, 그곳에 산책길을 연결하면 어떨까 싶었다.

 

세성리 소재지를 지나면 자동차전용도로를 만난다. 다시 걷기에 불편한 상황이 연출된다. ‘호음실’이라는 마을이 왼쪽 골짜기로 들어 앉았고, 맞은 편으로 길이 없는 듯한 길이 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며 들어가지 않았다. 두 번, 세 번 걸으면서 ‘막혔으면 돌아나오지’라는 생각으로 들어갔다. 길은 좁지만 이어진 길이었다. 제법 너른 과수원이 펼쳐졌고, 외떨어진 카페도 자리한 곳이다. 양원마을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었는데, 옛길에 있었던 원(院)을 떠올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역원조에 ‘주지원(注之院)’이 남쪽 16리 지점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의 남쪽 16리면 이 길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16리면 6.5㎞쯤 되는데 양원마을이라는 곳이 엇비슷한 거리가 된다. 너른 터와 외딴 공간이 혹시나 충주 남쪽에 있었다는 주지원은 아니었을까? 봄에는 사과꽃, 가을에는 발갛게 익은 사과와 개울가 논에 누렇게 물든 논이 예쁜 마을이다.

 

엉뚱한 상상을 하며 양원 마을을 걸어나오면 다시 자동차가 씽씽 달리는 찻길이다. 기도원과 주유소를 지나 대림산 줄기를 터널로 뚫고 나온 고속철도를 만나는 향산리 입구까지 달려오는 차를 조심하며 걸어야 한다. 수회에서 난양이 입구까지 롤러코스터를 타듯 쌩쌩 달리는 찻길과 걷기 좋은 길이 반복된다. 걷기가 기본이었던 시절에 그 길을 걷던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길을 상상이나 했을까?

 

향산리, 그것도 대향산 입구에서 구도로를 따라 설운천과 나란히 다시 걷는다. 자동차의 위협에서 벗어나 평안한 걷기를 다시 시작한다. 다시 주유소가 보이는 즈음에서 오른쪽 산등성이로 눈을 들면 바위가 보인다. 대림산성의 남문 자리라고도 하며, 거기에 있는 바위를 종주바위라고 부르는 곳이다.

 

종주바위는 숲이 우거지면 잘 보이지 않는다. 늦가을, 늦겨울에 걸으며 카메라를 최대한 줌인하여 종주바위를 담았다. 종주바위에는 이름과 관련된 전설 하나가 있다.

 

때는 1231년이다.

 

“충주부사(忠州副使) 우종주(于宗柱)가 매번 부서(簿書)하는 사이에 판관(判官) 유홍익(庾洪翼)과 틈이 있었는데, 몽고군이 장차 오리라는 것을 듣고 성을 지킬 것을 의논하였으나 의견이 달랐다. 우종주는 양반별초(兩班別抄)를, 유홍익은 노군잡류별초(奴軍雜類別抄)를 이끌었는데 서로 시기하다가 몽고군이 다다르자 우종주와 유홍익은 양반 등과 함께 모두 성을 버리고 달아나니 오직 노군(奴軍)·잡류(雜類)만이 힘을 합하여 몽고군을 물리쳤다. 몽고군이 물러가자, 우종주 등이 충주로 돌아와서는 관사(官私) 은기(銀器)를 조사하였는데, 노군은 몽고군이 약탈해 갔다고 말하였다. 호장(戶長) 광립(光立) 등이 몰래 노군 우두머리를 모살하려 하였는데, 노군이 이를 알고 말하기를, “몽고군이 이르자마자 모두 달아나 숨어서 지키지도 않더니, 어찌 이제 와서 몽고군이 약탈해 간 것을 도리어 우리에게 죄를 돌려서 죽이려고 하는가? 이러니 먼저 도모하지 않으리오?”라고 하고는 이내 속여 장례에 모이는 것처럼 하고 소라[螺]를 불어 그 무리를 모아 먼저 주모자의 집에 가서 불을 지르고, 평소 호강(豪强)으로 원한이 있던 자를 찾아 남김없이 죽였다.”(『고려사』 권103 열전 권제16, 제신(諸臣) 이자성(李子晟) 부분)

 

1232년에 충주의 반란으로 규정된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되었던 이자성의 열전에 기록된 사건이다. 1231년 몽고군의 1차 침공이 있을 때 충주의 노군잡류별초가 싸워 이긴 기록이기도 하고, 당시에 충주부사 우종주와 판관 유홍익이 양반별초를 이끌고 도망했다가 돌아온 내용이기도 하다. 고려사의 기록에는 우종주ㆍ유홍익 등 양반별초가 도망갔던 곳이 어디인지 밝히지 않았다. 하지만 대림산성 남문 자리에 있는 바위를 ‘종주바위’라고 부른다.

 

종주바위의 유래가 1231년의 몽고 침입 때에 도망간 우종주와 유홍익, 양반별초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설득력이 있다. 1231년의 승리는 여몽전쟁의 시작에서 충주가 처음 승전한 것이지만, 도망갔던 양반별초가 돌아와 노군잡류별초를 도둑으로 몰면서 반란으로 변했다. 갈등이었고 배신이었던 그것은 충주에 남겨진 상처였을 것이다. 20년이 지나 1253년에 다시 시작된 몽고의 2차 침공에서 충주산성 방호별감 김윤후 장군의 지휘로 70여 일간의 항전에서도 이겼다.

 

1232년, 충주가 반란의 도시가 되어 중앙군이 파견되었던 때, 김윤후 장군은 승려였다. 그리고 용인의 처인성에 피난했다가 적장 살례타이(撒禮塔)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면서 승려 김윤후는 파계하여 무장의 길을 걷게 되었다. 20년 뒤인 1252년에 충주산성 방호별감으로 충주에 부임했다.

 

▲ 대림산 종주바위(대림산성 남문 자리)  © 충주신문


종주바위!

 

770년, 790년, 아니 근 800년이 지난 여몽항쟁에서 충주가 겪었던 전쟁의 아픔과 기쁨이 교차되는 곳이 아닐까? 찻길에 서서 종주바위를 보며 800년 가까운 옛일을 생각하다가 소향산으로 불리는 마을의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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