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2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5/07 [14:05]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2

김희찬 | 입력 : 2024/05/07 [14:05]

 

▲ 지난해 수해로 모래주머니 방벽이 생겼고, 강에는 섶다리와 줄배가 있었다.  © 충주신문

 

정심사로 향하는 길 중간에 강 건너 풍동과 왕래하던 섶다리와 줄배가 있었다. 그 위치가 가물가물하다. 마침 1955년 식목일날 수안보온천에 가던 길에 유주막에서 노루목 구간의 풍경을 묘사한 유촌(柳村) 유재형(柳在衡, 1907~1961) 선생의 기행문 한 대목이 있다.

 

“마침 식목일이고 하여 학생들과 함께 교실 앞에 간략한 화단을 만들고 났더니 사제의 연이 있는 오영환(吳榮煥) 군이 찝차를 가지고 와서 차를 타라는 것이었다. 굳이 사양할 것도 못되어 전란 후 처음으로 수안보를 가본다. 일행이 5인으로 하루의 소풍 정도, 그저 온천장에서 목욕이나 하고 오리라는 극히 가벼운 정도를 벗어나지 못한 행로이다.

 

달천강을 끼고 암석절벽을 굽이굽이 돌아가는 「노루목」 운치는 언제나 제법 멋이 있었고 더구나 강안 석벽 밑에 신설한 듯한 물네방아 바퀴가 끊임없이 도는 정경에는 저윽이 심금을 건디리는 바 있었다. 차속에서 푸른 강물을 조감할 때 머언 지난날이 회상되며 그중에서도 지금은 생사조차 모르는 「시문학(詩文學)」에 등단되었던 현구(炫鳩)의 「푸른 강물…」 시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작은 목선을 두 소년이 노를 저어 대안(對岸)을 향하는 풍경도 그대로 한폭 활화(活畫)로서 구차스레 모옥(茅屋)속에 딩굴던 하루 하루와 견줄 때 이만한 것이나마 스치게 된다는 것이 다행하기도 하였다.” (유재형, 「수안보행」, 『충북신보』, 1955년 4월 18일자 2면 2단 부분.)

 

노루목 거기쯤에 연신 돌던 물레방아를 보았던 것도 같고, 내가 알지 못하는 김현구(金炫耈, 1904~1950) 시인을 추억하며 내가 기억하는 섶다리와 줄배는 나중 일이었음을 알려준 유촌 선생의 글 풍경은, 지금은 사라졌고 잊혔다. 사라지고 잊힌 것이 어디 그 뿐이랴!

 

1908년 3월 3일자 대한매일신보에 함경남도 한 여인의 구술로 정리하여 실린 기사에는 충주 이야기가 있다.

 

“충주 단월 큰내(=달천, 달내)에 이ᅀᅳᆷ(이무기)이 있어 때때로 안개와 바람을 일으켜 작난이 심하였다. 충민공 임경업은 그곳 사람이라, 나이 13세에 그 이무기의 해를 덜고져 하여 하로는 옷매무새를 잡고 냇가에 가서 인기척을 하니 물속의 이무기가 과연 나오는데, 길이가 10여 장이오 온몸 빛이 무쇠같더라. 임장군이 몸을 날려 공중에 올랐다가 내려오며 이무기의 꼬리를 두 손으로 잡아서 냇가 바위에 힘껏 내리쳤다. 이무기는 간 데 없고 손에 잡았던 꼬리가 변하여 칼자루가 되어 서기방광(瑞氣放光)하는 8척 장검이 되었다.

 

그 칼을 가지고 천하를 누볐는데, 청국을 갔다가 나올 적에 압록강을 건널 때였다. 그 칼이 쟁연(錚然)히 소리하며 칼집 밖으로 뛰어나와 압록강에 빠졌더라. 그 이무기를 내려치던 바위에 이무기의 전체 흔적이 있다고 한다.”

 

<이무기 바위 전설> 정도로 제목을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임경업 장군이 썼던 용천검(龍泉劍)의 탄생과 사라짐에 대한 것이다. 용천검에 새겼다는 검명시(劍銘詩)는 있지만, 용천검은 사라졌다. 함경남도 여인의 이야기처럼 다시 이무기가 되어 압록강에 빠져서 사라진 것은 아니다.

 

1937년 4월 9일자 매일신보에 <임경업 장군의 양개(兩個) 보검, 절취되어 매물로써 유랑(流浪)> 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등장한 것이 마지막이다. 양개 보검은 용천검과 추련도(秋蓮刀)를 말한다. 추련도는 일제강점기 말에 주덕의 조씨 집안에서 쌀 30석을 주고 되찾아왔으나, 용천검은 행방을 알 수 없다. 전설의 증거였던 <이무기 바위>도 길을 넓히는 과정에서 바위를 폭파하여 흔적도 위치도 모른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잠깐 걸으면 다시 임경업 장군의 이야기와 만난다.

 

삼초대(三超臺)!

 

대림산성과 유주막 중간쯤에 버스정류장이 있다. 고개 돌려 골짜기를 올려보면, 벼랑 위에 보일 듯 말 듯 숲에 가려진 건물 한 채가 있다. 그 건물은 정심사 산신각이고, 바위는 임경업 장군의 전설이 전해지는 삼초대이다. 정심사에 오르는 초입에 그와 관련된 안내판이 하나 있다. (안내판에 적은 내용은 사실과 달리 심각하게 각색되었지만, 옮긴다.)

 

▲ 정심사 입구의 유래 안내판  © 충주신문


<정심사의 삼초대 유래>

조선시대의 유명한 장군인 임경업은 1594년(선조27년) 11월 2일 강건너 풍동에서 출생하셨다.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에 뛰어났는데 삼초대는 임장군이 소년시절 학문과 무술을 연마하였던 곳으로 현재도 3단계 석축이 남아 있으며, 이곳 삼초대 앞 달천강 건너 제일 높은 봉우리 아래 장군의 무덤이 한눈에 보인다. 삼초대의 사찰에서 1000m 떨어진 곳 하단(단월동) 충렬사 사당이 있는데 이곳에 장군의 유상(遺像)을 봉안하고 이곳에 유품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영곡사 또는 영국사로 기록되어 있는데 조선초기의 문인 정지상이 쓴 “천길이나 높은 바위에 천년 넘은 옛 절이 있으니 앞에는 강물에 임하였고 뒤로는 산에 의지하였도다.”라는 「영곡사시」가 있다. 고려 말에는 월은사(月隱寺) 조선시대에는 달암사(達岩寺) 또는 호암사(虎岩寺)로 불렸다. 일제강점기에는 개운사(開雲寺)가 되었다가 정심사(靜深寺)로 개명되었다. 정심사 주지 ○○

 

이선(李選, 1632~1692)이 쓴 <임경업전>에는 ‘壬辰倭亂, 篁避兵關西. 甲午仲冬, 生將軍于价川. 亂定, 移居忠州達川’(이선, 「임경업전」, 『지호집』)으로 기록했다. 1688년 9월에 지은 이선의 임경업전 외에도 임경업 장군에 대한 전(傳)이 여럿 있다. 그 중에 이선의 글에서 출생에 관한 가장 객관적이고 구체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이선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경업의 아버지는 가솔을 데리고 관서 지방으로 피난을 떠났다. 갑오년인 1594년 중동에 평남 개천에서 임경업 장군을 낳았고, 난이 평정된 뒤에 충주 달천에 이사해 살았다’고 한다.

 

임경업 장군의 출생지부터 오류인 안내문은 정심사 측에서 임의로 세운 것이다. 내용이 사실에 부합한다면 상관없지만, 오류투성이 정보를 담은 안내판은 수정이 필요하다. 충주시에서도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으로 생각한다.

 

이처럼 정심사는 삼초대와 함께 임경업 장군의 전설을 앞세우며 소개하고 있지만, 내 발길과 생각은 정심사 아래 길가에서 머뭇거린다. 작년에 <천리충주>를 시작하면서 다섯 번을 걸으며 지났지만, 언제나 그 앞에서 머뭇거리는 이유는 정지상(鄭知常)의 시상(詩想)에서 비롯된다.

 

영곡사에 대한 기록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충주목 불우조에서 시작된다. 거기에,

 

영곡사(靈鵠寺) : 대림산(大林山)에 있다. 깎아지른 절벽에 기대고 푸른 시냇물을 굽어보며 공중에 걸쳐서 누각을 지었다. 밑에서 바라보면 달아맨 것 같다. ○ 정지상의 시에, “천 길 바위 머리에 천년 묵은 절, 앞은 강물에 임하고 뒤는 산에 기대었다. 위로는 별(星)에 닿았으니 집이 세 뿔이 났고, 반쯤 허공에 솟았으니 다락 한 칸이로다.” 하였다.

 

절에 올라갈까? 그냥 바라볼까?를 두고 매번 망설이는 곳이 정심사 앞 시내버스 정류장이다. 그런 생각을 하게 하는 정지상의 영곡사는 <천리충주> 걷기에는 남다른 의미가 있다.

 

▲ 단월동과 살미면의 경계. 작년 수해로 단월동 표지판이 쓰러져 있다.  © 충주신문

▲ 노루목 벼라길 건너편의 풍동마을  © 충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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