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6

김희찬 | 기사입력 2024/06/18 [09:29]

노루목에서 달천나루까지 - 6

김희찬 | 입력 : 2024/06/18 [09:29]

 

▲ 1915년 단월리 지적원도  © 충주신문

 

▲ 달천동행정복지센터(옛 단월역 마굿간 자리) 뒤에 단월초등학교  © 충주신문


단월역을 이야기하면서 일반이 가장 궁금해할 대목은 단월역의 위치일 것이다. 단월역과 관련하여 이름만 있을 뿐, 문서화된 자료가 없기 때문에 단월역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부터 쉽지 않다. 더구나 지난 100년간 이루어진 개발에 의해 공간 파괴가 진행되면서 단월역 공간도 사라졌다.

 

1896년(건양 1) 1월 대한제국 칙령 제9호 ‘각 역 찰방 및 역속 폐지에 관한 건’에 의해 역원 제도가 폐지되면서 단월역도 폐지되었다. 역은 폐쇄되었지만, 단월역 소유의 건물이나 토지는 일정 기간 유지되었다. 1900년에 조사된 양안(量案)을 살펴보면 단월역 소유의 건물과 토지의 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양안에는 단월역 소유의 건물과 토지를 전(田), 답(畓), 전대(田垈)로 표시하였는데, 전은 236필지, 답은 103필지, 전대는 111필지로 확인된다. 모두 단월동을 중심으로 그 주위에 있었던 것으로 단월역의 운영을 위해 국가에서 부여했던 역전(驛田)에 해당된다. 이것은 1914년 11월 28일부터 1915년 1월 31일까지 측도된 단월리 지적원도에 국유지로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토지 분포를 중심으로 단월역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1896년 역제의 폐지 이후 1900년에 조사된 국유지(단월역 소유) 현황은 15년이 지난 1915년까지 그대로 존속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지의 경우 단월역의 핵심 공간은 국유지로 존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지적원도를 재구하여 확인해 보면, 단월역은 현재 달천동행복지원센터와 단월초등학교 운동장을 중심으로 위치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공간은 파괴되어서 100년 전의 모습을 찾을 수 없다.

 

단월역의 역사는 정확하게 고증할 수 없다. 하지만 옛 기록 중에 단월역의 공식적인 시작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보이기도 한다. 1521년 여름부터 1526년 봄까지 충주목사를 역임한 박상(朴祥, 1474 ~ 1530)이 재임 중에 쓴 글에는 충주와 관련해 요긴한 정보를 담고 있는 것들도 많다.

 

큰 연[大硏]을 제조해서 약을 가는 기구를 마련했다. 공이 일찍이 여강(驪江)의 별장을 떠나 창녕으로 돌아가는 날 지어서 단월역에서 보냈다. 단월역(檀月驛) 마당에 돌이 있는데 표각(標刻)에 천복(天復)이라고 했는데 당(唐) 소종(昭宗)의 연호라고 일깨워주었다. (鑄成大硏 以備磨藥之具 公嘗去驪江別莊 歸昌寧之日 作送檀月驛 庭有石標 刻云天復 相誥唐昭宗年號)

    - 박상, 「寄希剛相公」, 『눌재집』 권5, 율시 칠언

 

박상이 지은 시의 서(序)이다. 여주에서 창녕으로 돌아가는 희강(希剛, 이장곤(李長坤)의 자, 1474 ~ 미상) 상공을 단월역에서 전송하던 상황을 설명하였다. 그 때에 단월역 마당에는 천복(天復)이라는 연호를 새긴 돌이 있었다고 한다.

 

소종(昭宗)은 당나라 제19대 황제라고 한다. 그의 이름은 이엽(李曄, 867~904)이고, 재위 기간은 888년~900년, 901년~904년이라고 한다. 그 기간 중의 연호가 참 복잡하다.

 

그는 ‘용기(龍紀) 889년 → 대순(大順) 890년~892년 → 광명(廣明) 892년~893년 → 건녕(乾寧) 894년~898년 → 광화(光化) 898년~901년 → 천복(天復) 901년~904년 → 천우(天祐) 904년’ 등 7개의 연호를 썼는데, 천복은 901년~904년 중에 썼던 연호이다.

 

박상과 이장곤이 단월역에서 만나 보았다는 돌에 새긴 천복이, 그들의 대화처럼 당나라 소종의 연호가 맞다면 그것은 어쩌면 단월역이 설치된 시기를 새긴 것일 수 있다. 고려의 개국이 918년이니, 후삼국시대 말에 단월역이 처음 설치되었을 수 있다.

 

박상과 이장곤이 만났던 단월역은 동헌이 있었던 지금의 단월초등학교 운동장 어디 쯤이었을 것이다. 1946년 9월 1일에 설립인가가 났고, 10월 1일에 2학급으로 개교하여 단월국민학교로 시작된 단월초등학교는 2024년 현재 41명이 재학하고 있다. 올해 신입생으로 1학년 3명이 입학하였다고 한다.(단월초등학교 홈페이지, 학교 연혁과 학교 현황에서) 멀쩡한 학교 운동장을 일부러 발굴할 이유는 없지만, 나중에 혹시라도 폐교가 된다면 단월역의 역승이 주재했던 관리 공간의 중심이었던 점을 염두에 두고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과정에서 박상과 이장곤이 보았던 ‘천복’ 연호를 새긴 비석이 출토된다면 단월역의 역사를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해당 공간에 머물며 첫 기록을 남긴 이는 정지상(鄭知常, 미상 ~ 1135)이다. 직전에 영곡사 앞을 지나며 <영곡사(靈鵠寺)> 시를 짓고 단월역에 투숙했었다. 그리고 <단월역> 시를 짓고, 이튿날 분행역에 도착해 <분행역기충주자사>라는 세 편의 연작시를 남기며 시에 충주를 처음 등장시켰던 인물이다.

 

정지상이 지은 <단월역> 시는 단월역에 시판(詩板)으로 걸려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조선시대에 들어 김종직(金宗直, 1431 ~ 1492)이 단월역에 들렀을 때, 정지상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단월역(丹月驛)

 

낡은 병풍 외론 베개에 짧은 등경 나직하고 / 破屛孤枕短檠低

숙취가 덜 깨 몽롱한데 새벽닭이 벌써 우네 / 殘醉瞢騰已曉鷄

아전이 오경을 알리자 창문 밀치고 나가니 / 吏報五更推戶出

반 조각 밝은 달이 오동나무 서쪽에 떴구나 / 半輪明月老梧西

                   - 김종직, 「단월역」, 『사가시집보유』 권3, 시류

 

350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지은 김종직의 시는 공교롭게도 충주의 한시(漢詩) 중에 차운(次韻)의 전통을 잇는 첫 시가 된다. 이로써 단월역은 충주의 대표적인 역으로서의 지위뿐만 아니라, 그곳에 묵었던 이들이 앞선 사람의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짓던 차운시의 전통이 만들어진 첫 공간으로 치환된다. 정지상에서 시작된 <단월역> 시의 차운 전통은 정사룡(鄭士龍, 1491 ~ 1570)의 <우연히 사간 정지상의 단월역 운을 적어 5절을 얻어 창세(박상)에게 베껴주곤 크게 웃었다. [偶記鄭司諫知常丹月驛韻 輳得五絶 錄似昌世 博笑] 5수>로 이어지며 한 축을 이루었었고, 또 다른 차운시의 흐름도 존재했었다.

 

조선시대에 유명한 문사(文士)들의 글과 시에 <단월역>을 소재로 지은 것이 많다. 그 중에 조세구(趙世求, 미상)는 유배지로 가는 조광조(趙光祖, 1482 ~ 1519)를 단월역에서 전별하였다고 한다.

 

단월역에서 유배지로 가는 정암을 전별하다 [丹月驛餞別靜庵赴謫]

 

내가 아는 효직이 지금 가고 있는데 / 吾知孝直有今行

간절한 편지는 정녕 세상 물정 아니로세 / 諫札丁寧不世情

우레는 돌쇠뇌처럼 종일 분노한 줄 어찌 알았으며 / 雷礮豈知終日怒

번개는 깃발처럼 오히려 비춰 속마음을 밝히는구나 / 電幡猶照寸心明

유구역에 잠들었던 용이 깨어나 생기있고 / 維鳩驛裏龍眠活

사악성 가의 말은 발걸음 가볍구나 / 徙鰐城邊馬步輕

대장부의 몸은 적막하지 않으리니 / 大丈夫身非寂寞

한 때 평한 질책 역시 영달이 끊기리. / 一時評叱亦殊榮

                                 - 조세구, 『점필재선생속집』 부록 권4,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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